남북관계 아카이브

만월대, 상시 발굴로 마무리하고
공동 보존으로 나가야

만월대가 발굴되기까지

만월대는 태조가 즉위 이듬해인 919년, 수도를 철원에서 개경으로 옮기면서 만든 궁궐터이다. 그 후 몇 차례 불에 타기도 했지만, 새로 중건하면서 1361년 겨울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될 때까지 400여 년 동안 고려의 왕궁이었다. 이 궁궐은 고유한 이름이 없었다. 만월대라는 이름은 폐허가 되고 난 뒤 조선시대에 붙여진 것이다.

만월대는 개성 송악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면적은 25만㎡이다. 궁궐의 외곽을 성벽이 둘러싸고 있어, 궁궐 자체를 고려궁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측이 600년 이상 폐허로 남아 있던 만월대의 중심건축군을 조사하고 정비하여 관람객들이 볼 수 있게 하였지만, 나머지는 방치되어 있었다.

북측은 2004년 고구려고분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데 이어, 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 개성도 등재하려고 했다. 2005년 11월, 남북의 전문가들이 개성에 모여 등재 문제를 논의하는 토론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개성 역사유적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남북이 공동으로 유적을 발굴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여러 대상을 놓고 논의한 끝에 만월대가 조사 대상으로 선정됐다.

마침내 첫 삽을 뜨다

개성에서 진행되는 발굴이다 보니, 만월대 발굴은 남북관계의 영향을 심하게 받았다. 여러 차례 실무협의를 거쳐, 마침내 2006년 7월 3일부터 조사를 시작하기로 합의했다. 대상은 서부건축군 3만 3천㎡, 조사 기간은 60일이었다. 시간이 촉박한 상태에서 두 달 동안 체류하며 작업하는 데 필요한 준비를 부지런히 했다. 그러나 7월 1일 아침 돌연 ‘조사를 미루자’는 내용의 팩스가 들어왔다. 이날부터 남측 사람들의 개성 시내 출입이 전면 중단됐고 조사에 엄중한 난관이 조성됐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만 전해졌다. 진짜 이유는 나흘 후, 북측이 대포동 2호를 발사하면서 비로소 밝혀졌다. 이렇게 첫 조사 합의는 미사일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남북관계는 10월의 핵실험으로 더욱 경색됐지만, 2007년 들어 6자회담이 재개되면서 서서히 완화됐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3월, 개성 실무협의에서 5월부터 조사를 시작하기로 합의했다. 5월 15일, 마침내 이상준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을 비롯한 발굴 단원 12명이 파주 도라산 출입사무소를 거쳐 만월대로 들어갔다. 북에서는 문화보존지도국의 리승혁 처장을 비롯하여 조선중앙력사박물관과 개성 고려박물관, 문화유적관리소의 연구사들이 이들을 맞았다. 함께 발굴할 대원들이었다.

사흘 후, 착수식이 열렸다. 남측에서는 서중석 남북역사학자협의회 위원장과 유홍준 문화재청장, 북측에서는 박경철 민화협 부회장, 리승혁 처장 등이 참석했다. 필자는 ‘시굴해서 아무것도 안 나오면 어떡하나’ 걱정하며 참석했다. 현장을 돌아보는 중에, 누군가 삽을 넣어보았는지, 한편에서 석축이 살짝 노출된 것이 보였다. 그제야 유구가 지하에 남아 있으리라는 확신을 하게 됐고, 적이 안심되었다. 두 달간의 시굴 조사를 통해 만월대의 유구가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됐고, 남북은 바로 전면 발굴 조사로 넘어가기로 합의했다.

온탕과 냉탕, 발굴과 중단을 오가다

2차 발굴 조사는 9월에 시작되었다. 이후 2015년 12월까지 모두 여섯 차례 발굴 조사를 수행했다. 중간에 우여곡절도 많았다. 2차 조사 기간 중인 10월 4일에는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려 우호적인 분위기가 고양되었지만, 곧이은 정권 교체로 2008년 4월부터 시작할 예정이었던 3차 발굴은 연기됐다. 그 와중에 금강산에서 관광객이 북측의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3차 발굴은 북측 인건비를 모두 문화재 보존 관련 물자로 제공한다는 단서를 달고서, 겨울의 문턱인 11월에 시작됐다 그렇지만 북측이 12월 1일부터 개성 관광을 중단하고 남북협력 사업자의 군사분계선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는 바람에, 사진과 3D 촬영팀은 개성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때 출토된 유물은 이듬해 2월 평양에서 촬영했고, 실무협의도 중국에서 열어야 할 만큼 관계는 악화됐다. 결국 2009년에는 조사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평양에 있는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 만월대 출토 유물을 위한 작은 수장실을 조성하는 데 필요한 물자를 공급했다.

발굴을 완수하지 못하고 조기에 철수하는 일도 두 번이나 발생했다. 2010년 3월에 재개된 4차 발굴 조사는 본래 6월 10일까지 할 예정이었으나, 천안함 사건에 따른 5·24조치를 앞두고 5월 18일 조기 철수했다. 5차 조사는 2011년 11월 14일부터 12월 23일까지 진행할 예정이다. 그런데 12월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다. 서울 사무실이나 현장에서는 예정대로 작업을 마무리하고자 하였으나, 정부의 방침에 따라 20일 긴급히 철수했다. 당시 북측 지역에 머무는 남측 사람은 발굴단 13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복토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긴급 철수하는 바람에 북측 조사단은 수작업으로 복토하느라 무척 고생하였고, 홍수 피해를 입기도 했다.

긴급 철수 후 2년 동안 중단된 발굴 조사는 2014년 7월에 가까스로 재개됐다(6차 : 7월 22일 ~ 8월 16일). 7차 사는 2015년 6월부터 11월까지 6개월간 계속됐으며, 광복 70주년 기념으로 만월대 출토 유물전시회를 서울과 개성에서 개최했다. 2016년도부터는 상시 발굴과 보존 정비를 병행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새해 벽두부터 시작된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이어 박근혜 정부가 2월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모든 남북교류 협력을 중단하면서 발굴 조사는 기약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2018년 10월 발굴 조사를 재개하다

중단된 지 3년 만에 다시 만월대 발굴 조사가 시작됐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물꼬가 트인 남북교류는 연이은 정상회담으로 급속히 발전했다. 이에 힘입어 마침내 2018년 10월 22일, 남측 발굴단은 인적이 거의 끊어진 도라산 CIQ(출입사무소)를 넘어 가동을 멈춘 개성공업단지 숙소에 짐을 풀었다. 이번 작업 대상은 중심건축군 서부 석 축의 보존 정비였는데, 촘촘한 대북제재 때문에 정비 작업에 필요한 중장비를 가져갈 수 없어 중심건축군과 서부 건축군을 연결하는 계단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을 발굴 조사했다.

착수식과 자문회의를 위해 현장을 돌아보니, 생각보다 넓은 공간이 회경전과 장화전 사이의 서쪽 측면에 있었고, 여기에 서부건축군으로 통하는 넓은 계단이 조성됐다. 6차 조사에서 나온 북쪽의 계단에 이어 발견된 두 번째 계단이다. 계단 위에 건물을 축조한 것으로 보였고, 계단 속으로 수로를 만든 독특한 구조였다. 회경전 서쪽에 있는 임천각 터도 조사했는데, 서긍의 『고려도경』과는 달리 정면 7칸, 측면 3칸의 대형 건물이고, 뒤쪽 회랑도 확인했다.

중장비의 도움 없는 발굴 조사는 많은 어려움을 동반했다. 작업 진도는 늦었고, 부상자도 발생했다. 그러나 훌륭한 계단과 건물 유구를 찾아내면서 어려움을 잊었고, 힘든 작업을 손으로 직접 하면서 남북의 발굴단원들은 더 친밀해졌다. 8차 발굴은 12월 10일 종료했다.

금속활자가 출토되다

발굴은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서부건축군의 전체적인 건물 배치 양상을 파악하게 되었고, 사실상 정전 역할을 한 건덕전과 침전인 만령전, 조상 숭배 시설인 경령전 등 건물지 40여 동의 위치와 구조를 파악하게 되었다. 다양한 기와가 출토되어 고려기와의 편년 기준을 설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가지각색의 고급 청자들과 잡상, 놀이 기구는 궁궐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로 이용될 것이다.

1만 6천여 점의 출토품 가운데 단연 세간의 관심을 끈 것은 금속활자였다. 2015년 11월 14일 오전, 만월대로 들어가는 신봉문 서쪽에서 금속활자가 발견됐다. 당시 고려 금속활자는 남북이 각기 한 점씩 갖고 있었는데, 세 번째 금속활자가 출토된 것이다. 이 활자는 출토 장소와 시점, 과정이 명확하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남측 발굴단이 철수한 후, 북측은 활자 탐색 작업을 계속하여 4점을 더 찾아냈다. 이로써 7점의 고려 금속활자를 갖게 됐다.

활자는 정말 작다. 가로 세로의 크기가 1.3cm 정도이고, 높이는 0.6cm에 불과하다. 실제로 보면 엄지손톱만하고, 만져봐도 전혀 무게감을 느낄 수 없다. 불행히도 하단 일부가 손상되었지만, 아주 세련된 모습이다. 이 활자는 ‘오로지, 사랑스럽다, 전일(專一)하다’는 뜻을 가진 ‘전(嫥)’자로 읽고 있다.

얼마 후 남북의 전문가들이 개성에서 회합하여 금속활자를 실견(實見)하고 평가하는 모임을 가졌다. 평양에서는 조선력사학회 조희승 소장 등이 참석했다. 금속활자의 성분, 제작 시기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만월대가 1361년에 불탄 점을 고려하면, 1377년에 출간된 『직지』보다 이른 시기의 활자일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기존의 활자보다 훨씬 세련되어, 상대적으로 그것보다는 늦게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가 우세하였다. 그날 저녁 서울로 돌아와 기자회견을 통해 금속활자 출토 사실을 공개했다. 북측도 같은 시각에 공표하기로 하고 헤어졌으나, 어찌 된 일인지 한참 후에야 언론에 공개했다.

앞으로도 할 일은 많다

만월대 공동발굴은 아직 진행 중이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의 첫 번째는 무엇보다 계획된 발굴을 완료하는 것이다. 발굴은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유물을 남기지만, 지하에 묻혀 있는 유구를 세상에 드러내는 과정에서 피 할 수 없는 손상을 입는다. 만월대처럼 단속적(斷續的)으로 발굴하는 경우, 그런 위험성은 커진다. 그러므로 올해부터는 한여름과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상시 발굴함으로써, 하루빨리 발굴을 종료해야 한다.

둘째, 유적의 보존 정비를 추진해야 한다. 지금은 발굴한 유구를 다시 흙으로 덮어 원상회복하고 있다. 그러나 만월대는 개성의 핵심적인 유적이고 세계문화유산이므로, 그것이 최선이라고 할 수는 없다. 유적이 훼손되지 않도록 보존하면서 동시에 일부라도 관람할 수 있도록 정비할 필요가 있다. 현재 보존 정비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는데, 그 대상에는 지금 발굴 중인 서부건축군뿐만 아니라 중심건축군도 포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셋째, 출토된 유물의 보존과 활용이다. 현재는 만월대 서북쪽에 임시 수장고를 건설하여 보존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 조치이다. 또 훼손 우려가 있는 금속 등의 유물은 과학적 보존처리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개성공단안에 보존복원 시설을 공동으로 건립할 계획이다. 궁극적으로는 박물관을 건립하여 보존과 전시 기능을 담당해야할 것인데, 북측에서 박물관 건립 계획을 세우고 부지를 물색 중이라는 소식이 있다. 만월대를 공동으로 발굴 조사하였으니, 박물관도 공동으로 건립하여 운영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해본다.

넷째, 서부건축군 조사를 완료한 후에는 궁성 전체의 조사가 필요하다. 궁성의 영역을 확정하고, 동궁이 있었던 동쪽 지역도 조사하는 것이다.

다섯째, 만월대의 발굴 성과를 남북이 공유하는 것이다. 2015년에 만월대 발굴 전시회를 서울과 개성에서 개최하고, 최근에는 평창동계올림픽 기간에도 전시회를 개최했지만, 남쪽에서는 실물을 전시하지는 못하고 디지털 전시에 그쳤다. 남북 순회 전시와 출토된 유구와 유물 접근을 통해 남북과 세계의 시민들과 학자들이 만월대의 진면목을 감상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안 병 우 안 병 우
한신대 명예교수
남북여사학자협의회 고려특위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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