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산책

역사를 기억하는 곳,
3·1운동 따라 서울 기행

1919년 3월 1일, 사람들은 저마다 태극기와 함께 ‘독립 국가’라는 열망을 가슴에 품었다. 100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이제는 아스팔트 도로와 상가가 밀집한 삼일대로, 3·1운동을 세계에 알린 외국인 앨버트 테일러의 가옥 딜쿠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스러진 독립운동가들의 얼이 남아있는 서대문형무소까지. 눈여겨보지 않으면 잊기 쉬운, 그러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역사가 잠든 곳이다

Scene #1 역사(歷史)를 담은 역사(驛舍)

3·1운동의 자취를 따라가는 여행은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시작한다. 안국역은 서울시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테마역’으로 조성했다. 비단 그 이유만이 아니더라도 독립운동의 시작부터 과정, 결과를 모두 훑어보기에 안국역 일대는 손색이 없는 장소다. 안국역은 3·1운동의 중심지였던 북촌과 인사동 등을 잇는 연결 거점으로 여운형, 손병희 등 독립운동가의 집터와 보성사, 태화관, 승동교회 등 3·1운동의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사적지가 산재해 있다.

3·1운동 테마역으로 재탄생한 안국역 승강장에 내리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스크린도어를 장식한 독립운동가들의 얼굴이었다. 플랫폼을 따라 한 바퀴 쭉 걸으며 그들의 이름을 한 번씩 읊어본다. 안중근, 윤봉길, 유관순, 김구…. 익숙한 이들 사이로 낯선 이들의 얼굴과 이름이 적지 않게 눈에 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놀라움과 반성이 교차하는 플랫폼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승강장을 빠져나와 3·1운동과 민족사를 ‘강물’로 구성한 ‘100년 강물’을 따라가면 역사 4번 출구로 나올 수 있다. 이곳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대문을 표현한 ‘100년 하늘문’이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서 시작해 낙원상가를 지나 탑골공원을 넘어서까지 이어지는 큰 길이 바로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달렸던 삼일대로다.

서울시는 3·1운동 준비와 전개 과정에 중요한 공간적 배경이 됐던 역사적 장소를 7대 핵심거점으로 선정하고 연결해 ‘3·1시민공간’으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내놨다. 삼일대로 허리를 차지한 낙원상가 옥상에는 삼일대로를 넓게 조망할 수 있는 공간도 조성된다고 하니 조만간 이곳에서 다시 그날의 함성을 떠올릴 수 있게 될 것이다.

Scene #2 이것만은 안 됩니다

현재 조계사 뒤편에 ‘수송공원’이라는 이름의 작은 공터가 있다. 이곳은 기미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을 인쇄한 보성사가 위치해 있던 곳이다. 보성사는 본래 고종의 측근이었던 이용익이 보성중학교를 설립하면서 교재출판을 위해 학교 내에 설치한 인쇄소였다.

1919년 2월 27일 밤늦은 시각, 비밀항일결사체 천도구 국단의 단장이자 보성사 사장인 이종일, 공장감독 김홍규, 총무 장효근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있었다. 그때 한인 고등계형사 신승희가 한 밤중에 돌아가는 기계 소리를 듣고 보성사에 들이닥쳤다.

혹시나 독립선언서가 발각될까 성주 이씨 족보를 만드는 것처럼 위장을 해왔지만 신승희의 손에 먼저 쥐어진 것은 독립선언서였다. 이종일은 신승희에게 애원했다. “이것만은 안 됩니다. 하루만 봐주시오. 의암(손병희) 선생님한테 갑시다.”

뜻밖에 신승희는 이종일에게 “당신이 갔다 오시오”라고 말한다. 이종일은 단숨에 손병희에게 달려가 사정을 말했고, 손병희는 거금 5천 원을 그의 손에 쥐어준다. 5천원을 받아든 신승희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며 당부하고 사라졌다. 신승희의 마지막 양심이었는지, 아니면 돈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렇게 독립선언서 2만여 부가 무사히 인쇄될 수 있었다.

보성사 터는 현재 수송공원에 이종일의 동상과 함께 그 터를 표시하는 표석만 남아있다.

안국 일대에는 이렇게 터만 남아 ‘그러한 일이 있었노라’고 알려주는 표석이 수없이 남아있다.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거사를 논의했던 손병희 집터, 독립선언문을 검토하고 배부하던 장소이인 천도교 중앙대교당,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한 태화관, 학생대표들이 3·1운동 계획을 점검하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승동교회….

한때 3·1운동의 역사를 담은 사적지들이 너무나 허름하게 방치되어있다는 아쉬움이 깊이 남는 대목이다..

Scene #3 언덕 위 희망의 궁전, 딜쿠샤

3·1운동과 관련해 기억해야 할 사람이 있다. 3·1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외국인 앨버트 테일러(Albert Taylor)다. 그를 조금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서울역사박물관을 찾았다. 이곳에서는 ‘딜쿠샤와 호박목걸이’전이 한창 진행 중이다. ‘딜쿠샤(Dilkusha, ‘이상향’, ‘희망의 궁전’이라는 뜻의 힌두어)’는 앨버트 테일러가 1942년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될 때까지 20년간 그의 아내와 함께 거주했던 집이다.

아버지의 금광 사업을 돕기 위해 1897년 조선에 들어온 앨버트 테일러는 1917년 영국인 연극배우 메리 테일러와 결혼해 조선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3·1운동 전야인 2월 28일, 엘버트 테일러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태어날 때 병원 간호사가 부르스의 침대 밑에 숨긴 독립선언서를 발견했다. 그는 이것을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동생 편에 도쿄로 보냈고 도쿄 주재 AP 통신을 통해 3·1운동은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다.

이를 계기로 AP 통신의 임시특파원으로 임명된 앨버트 테일러는 평화적 시위에 참여한 군중에 대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과 3·1운동을 이끈 민족지도자들에 대한 재판과정을 직접 취재해 세계에 타전했다. 그는 당시 조선에 거주하면서 이러한 사태를 직접 목격하고 취재하여 알린 유일한 서양 언론인이었다.

앨버트 부부는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며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당했다. 이후 앨버트 테일러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했지만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사망한 후인 1948년 양화진 외국인 묘원에 안장되었다.

종로구 행촌동의 500년 된 은행나무 옆에 있는 딜쿠샤는 1950년대만 해도 ‘귀신 나오는 집’으로 불렸다. 테일러 부부가 떠난 후 무단 거주자들의 필요에 따라 증축되고 보수되면서 원래의 모습을 상당부분 잃어버렸고, 주변의 음산한 분위기 탓도 컸을 것이다.

현재 서울시는 딜쿠샤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복원 공사를 진행 중이다. 공사가 끝나면 시민들에게 전면 개방한다고 하니 언덕 위 희망의 궁전이 다시 문을 활짝 열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Scene #4 목숨이 하나뿐인 것이 유일한 슬픔입니다

딜쿠샤에서 서대문쪽으로 내려오면 멀지 않은 곳에 서대문형무소가 있다.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찾을 수 없는 이곳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자유와 민주라는 가치를 위해 산화한 곳이다. 지금이야 잘 다듬어진 길과 공원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지만 한때 이곳은 담장 너머에 갇힌 가족을 그리는 눈물과 한숨이 가득했던 곳이다.

1908년 당시에는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1987년 경기도 시흥으로 이전하기 까지 실제로 사용되었던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 서대문형무소에서 4800여 명의 독립투사가 옥고를 치렀고, 165명이 숨을 거두었다.

서대문형무소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이 유관순 열사다. 충남 천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1918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가 이듬해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에 참가했다. 학생 시위가 격화되자 일본 총독부는 학교 휴교령을 내렸고, 이에 유관순 열사는 고향인 천안에서 만세시위(아우내 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었다. 이때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일본 헌병에 의해 피살되었고, 오빠 유관옥도 일본에 체포되었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던 유관순 열사는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살아가 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라는 재판장의 질문에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반드시 천벌을 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고 말하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졌다.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할 정도로 독립을 열렬히 꿈꾸었던 그는 1920년 9월 28일 출옥을 이틀 남겨두고 형무소 안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1920년 10월 14일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된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1936년 택지 조성 등을 목적으로 이태원 공동묘지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무연고 묘로 처리되어 행방이 묘연해 졌다. 현재 고향인 충남 천안에 유관순 열사의 혼을 위로하는 초혼묘가 세워져 있다.

Scene #5 100년의 기억, 100년의 미래

기억하지 않으면 잊힌다. 기록하지 않으면 망각하기 쉽다. 역사가 그렇다. 3·1운동을 따라 가겠다던 단순한 생각은 생각보다 더 결이 깊은 과제였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종로 일대에는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의 자취가 남아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생각보다 더 단순한 것일지도 모른다. 기존 질서에 도전했던 사람들을 기억하는 일. 우리 주변에 남아있는 그들의 흔적을 보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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