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자주독립’과 ‘민주공화’의 두 날개 ,
임시정부

국내외에 수립된 8 개의 임시정부 국치 이래 희망을 잃고 노예처럼 살던 한민족은 3·1 혁명을 계기로 근대적 민족의식에 눈 뜨게 되고, 수많은 지사들이 국권을 되찾기 위해 국내에서 또는 해외에서 망명을 택해 독립 전선에 서게 되었다. 3·1 혁명 후 국내외에서는 몇 갈래의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시도되었다. 국치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먼저 해외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시도했다. 1914 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이 동휘 등이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고 1917 년 상하이에서 신규식·조소앙 등 17 인이 대동 단결선언을 통해 임시정부 수립을 제창한 바 있다. 본격적인 임시정부 수립은 3·1혁명 직후 에 전개되었다 . 기미독립선언서에서 ‘조선이 독립국’ 임을 선언하였으니, 이를 대변하는 민족 의 대표기구를 설립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1919년 3~4월에만 국내외에서 도합 8 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조선민국임시 정부, 신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간정부, 고려공화정부, 간도임시정부 등은 수립 과정이 분명 하지 않은 채 전단으로만 발표되었고, 실제적인 조직과 기반을 갖추고 수립된 것은 러시아 연해주, 상하이, 한성의 임시정부였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은 1919 년 4월 11일이다. 일제로부터 국토와 주권, 국민을 완전히 되찾아 ‘정식’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한시적으로 ‘임시’ 로 세운 정부였다. 상하이에서는 국내외에서 모여든 조선의 각 도대표 29 인이 4 월 10~11 일 임시의정원 회 의를 개최하고 여기에서 임시헌장 10 개조와 정부 관제를 채택,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대내 외에 선포하였다. 이는 비록 망명 정부일지언정 유사 이래 처음으로 민주공화제 정치체제를 채택한 것이었다.

임시헌장의 10개 조항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제1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제2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빈부 및 계급 없 이 일체 평등으로 함’(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언론·저작·출판·결사·집회·주소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제4조) 등 근대적 민주공화제의 헌법 내용을 담았다.

그러나 상하이 임시정부는 최고 수반인 국무총리 선출을 둘러싸고 심한 내홍을 겪었다. 추천된 국무총리 후보 이승만의 적격성 논란 때문이었다. 이회영·신채호·박용만 등 무장독 립운동계열 인사들이 ‘위임통치론’을 제기한 이승만을 거세게 비판했고, 의정원에서 이승만 이 선출되자 회의장에서 퇴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의 주장은 ‘외세에 의존하여 절대독립을 방해하는 사람이 새 정부의 수반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상하이로 오지 않고 미국에 머물러 있었다. 한성정부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그 사이 3·1혁명 이후 여러 곳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통합운동이 전개되었다. 각 정부가 추대 한 정부 수반이나 각료가 상호 중복되 어 있고 또 국내외 각지에 떨어져 활동 하고 있어 미취임 상태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각각의 임시정부 는 기능 공백 상태에 빠져들었고 원활 한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와 같 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모색된 것 이 단일정부로의 통합이었다.

1945년 11월 3일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이 환국을 앞두고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수 차례 개편과 논의 끝에 이루어진 정부 통합

상하이임시정부 국무총리 대리이자 내무총장인 안창호가 8월말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한성정부 및 블라디보스토크 국민의회 정부와의 통합과 정부개편 안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수 차례의 논의 끝에 9월 6일 3개 정부의 통합이 이루어졌고, 정부 수반의 호칭을 ‘대통령’ 으로 하는 새 헌법과 개선된 국무위원 이 발표되었다.

상하이임시정부는 수립 초기 정부령 제1호와 제2호를 반포하여 내외 동포에 게 납세를 전면 거부할 것(제1호)과, 적(일제)의 재판과 행정상의 모든 명령을 거부하라(제2호)는 강력한 포고문을 발령하였다. 그 리고 국내조직으로 연통제와 교통국을 설치한 데 이어 해외에는 거류민단을 조직하여 임시 정부의 관리 하에 두었다. 연통제는 지방행정조직이고 교통국은 비밀 통신조직이었다. 국내 의 무장·사상투쟁을 위하여 전국 각 군에 교통국을 두고 1개 면에 1개의 교통소를 설치하도록 했으며, 연통제는 각 도와 각 군에 지방조직을 갖춰나갔다. 그러나 1920년 말부터 일제의 정보망에 걸려 국내의 지방조직이 파괴되고, 3·1혁명의 열기가 점차 사그라지면서 국내의 독립기금 송금과 청년들의 임시정부 참여가 크게 줄어들었다.

상하이임시정부는 이승만 대통령 선임을 둘러싸고 외무총장 박용만과 교통총장 문창범 이 취임을 거부한 데 이어 이회영·신채호 등 무장투쟁 주창자들이 상하이를 떠나 북경으로 올라가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20년 국무총리 이동휘가 러시아 정부에서 지원한 독 립운동 자금을 독자적으로 처리하여 물의를 일으키다가 1921년에 임시정부를 떠났다. 이에 임시정부는 이동녕 → 신규식 → 노백린이 차례로 국무총리 대리를 맡아 정부를 이끌 만큼 불안정한 상태로 운영되었다. 1920년 12월 5일 미국 워싱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이 상하 이에 도착했다. 정부 수립 1년 반 만이었다. 이승만은 떠나는 이들을 붙잡아 포용하려는 대신 신규식·이동녕·이시영·노백린·손정도 등을 새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여 위기를 넘기고자 하였다. 당시 만주, 간도, 연해주 등지에서는 민족독립을 위한 무장독립전쟁 단체들이 속속 결성되어 항일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단, 대한광복군, 광복군총영, 의열단, 의군부, 대한신민단, 혈성단, 신대한청년회, 복황단, 창의단, 청년맹호단, 학생광복단, 자위단 등이 결성되고, 특히 1911년 신흥무관학교가 설립되어 강력한 군사훈련으로 독립군 간부들을 양성하였다. 만주 각지에서 조직된 무장독립군 세력은 연대 하여 봉오동전투(1920년 6월)와 청산리전투(1920년 10월)를 통해 국치 이래 최대의 항일대첩을 이루었다. 그러나 상하이임시정부는 이승만의 독선과 독주로 요인들이 하나둘씩 떠나가고, 실현가능성이 취약한 ‘외 교독립론’을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결국 이승만의 독선적인 정부 운영과 무대책에 실망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의정원의 원들은 국민대회를 준비하면서 지도체제를 대통령중심제에서 국무위원중심제 즉, 일종의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개헌작업을 시도하였다. 이승만이 이에 반대하면서 임시정부는 더욱 분열상이 가중되었고, 이를 이유로 이승만은 1921년 5월 상하이를 떠나고 말았다.

이승만의 1년 반 동안 임시정부의 활동은 이로써 사실상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직을 사퇴하지 않고 임시정부를 떠났고 얼마 후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하였다.

임시정부의 가치, 국권회복과 민주공화제

이런 분란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일제 패망 때까지 27년 동안 항일민족해방투쟁의 본거지로서 독립전쟁을 지휘하였다.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주도하 고, 광복군을 편성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한 것도 임시정부였다. 광복군을 기반으로 일 제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될 즈음 전후처리를 위해 미·영·중 3국의 수뇌가 카이로회담을 앞두고 있을 때 김구 주석 등이 장제스 중국 총통과 교섭하여 ‘한국의 독립’을 카이로선언에 담기로 한 것은 큰 외교적 성과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민족혁명당 등 좌파세력과 연대하여 좌우합작정 부를 수립하면서 일제와 싸웠다. 통합정부에는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들까지 참여함으로 써 임시정부는 명실상부한 한민족의 대표기관이 될 수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큰 특징은 왜적과 싸우는, 그야말로 전시체제임에도 정부수립 초기 부터 의정원이 정부 인사를 선임하고, 주요 정책을 결정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나 폴란드 망명정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임시정부는 또한 일제 패망을 내다보면서 ‘건 국강령’을 제정하여 향후 수립될 독립정부의 정책방향을 준비하였다. 삼균주의 사상의 원 칙에 따른 주요 정책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상당 부분 그대로 승계되었다.

임시정부가 추구했던 가치는 국권회복과 민주공화제였다. 국권이 회복되고 74주년, 아직 도 우리는 분단이라는 상태를 면치 못한 현실이고, 선열들이 꿈꾸던 민주공화제도 아직 완 벽하지 못한 상태이다. 4·19혁명, 6월항쟁, 촛불혁명 등을 통해 민주주의는 지켜냈지만, 공 화주의는 준비단계가 아닌가 싶다.

2019년 2월 21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특별전에서 시민들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태극기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

2019년 3월 7일 중국 상하이시 푸칭리(普慶里 ·보경리)에 위치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관 입구에서 한국 관광객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

김 삼 웅 김 삼 웅
前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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