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산책

길 끝에 이어지는 또 다른 길
평화누리길 도보 여행

경기도 김포부터 강원도 연천까지 189㎞를 잇는 평화누리길은 접경지역 4개 시군(김포, 파주, 고양, 연천)에 걸쳐 12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북한과 가장 인접해 있다는 경기도 김포시 조강철책길(2코스)을 걷기로 했다. 문수산성 남문에서 시작해 애기봉 입구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조강철책길의 시작, 문수산성

평화누리길 2코스 조강철책길은 김포시 문수산성 남문에서 시작한다. 서울 2호선 합정역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리면 인천 강화도로 진입할 수 있는 강화대교가 나오는데, 강화대교를 건너기 바로 전 정류장인 성동검문소가 바로 2코스의 시작점 문수산성 남문이다. 조강철책길은 총 8㎞로 다른 코스에 비하면 비교적 짧은 거리지만 2코스 초반의 문수산은 가파른 등산로와 자갈길이 많아 등산복과 등산화를 갖추는 것이 좋다. 각 코스의 시작지점에는 빨간 우체통이 있는데, 이곳에 평화누리길 패스포트와 인증스탬프가 들어있다. 평화누리길을 모두 걸으며 스탬프를 찍고 인증샷을 남겨 패스포트에 적힌 주소로 보내면 인증서와 기념품을 받을 수 있다.
본격적으로 걷기 전 패스포트를 살펴보는데 지켜보던 등산객이 말을 걸어왔다. 12개 코스를 모두 완주했다는 그는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힘들어도 재밌다”고 웃으며 꼭 완주하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길을 나섰다.
높이 376m의 문수산은 김포에서는 가장 높은 산으로 조선시대에는 강화의 갑곶진과 함께 한강 하구를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예전에는 외세의 침입을 막고 한양 일대를 지키기 위해 숙종 20년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2014년 고려문화재연구원의 발굴조사에서 7~9세기에 흙으로 만들어진 유물이 성곽주변에서 발견되며 삼국시대에 이미 산성이 세워졌음이 밝혀졌다.
쉬엄쉬엄 산을 오르다보면 문수산의 아문(亞門)인 홍예문을 만날 수 있다. 아문은 암문(暗門)이라고도 하는데,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설치하여 적의 눈을 피해 사람과 가축이 통과하고 양식 등을 나르는 문으로 활용되었다. 현재 동서남북에 설치된 4개의 아문 가운데 남(南)아문인 이곳 홍예문과 동(東)아문만 남아있다. 원래 코스대로라면 홍예문을 지나 산 아래 마을로 내려가야 하지만 등산로를 따라 문수산 정상까지 올라가기로 했다.

1. 문수산 등산로를 걷는 등산객들

2. 평화누리길 2코스 시작점인 문수산성 남문

3. 평화누리길 패스포트

할아버지의 강에서 구출된 평화의 소

홍예문에서 약 30분 가량 더 오르면 드디어 문수산 정상이다. 해발 376m. 높지는 않지만 끝까지 오르면 제법 숨이 찬 이곳에서는 저 멀리 북측 땅이 넓게 펼쳐져 있다. 정해진 코스를 벗어나 정상까지 오른 이유다. 정상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데 북쪽을 바라보는 등산객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날이 좋을 때에는 저 멀리 개성까지 보인다”
“저기가 북한이다”
연천과 강화가 고향이라는 등산객 둘은 북쪽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서로의 고향 이야기를 했다. 문수산 정상에서 북쪽을 바라보고 있자니 분단국가라는 사실이 매섭게 다가온다. 멀리서 보기만 해야 하는 땅. TV나 인터넷으로만 봤던 북한이 이렇게나 가까이, 이곳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눈앞에 있었다.
문수산 정상에 서면 서쪽으로는 염하강과 강화도가, 남쪽으로는 김포가, 북쪽으로는 임진강과 한강, 예성강,서해가 만나는 조강이 보인다. 할아버지의 강, 조상의 강이라 하여 ‘조강(祖江)’이라고 불리는 이곳에는 유도라는 작은 섬이 하나 있는데, 이 섬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1996년 8월, 경기 북부에 내린 집중호우로 황소 한 마리가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 왔다. 유도에 표류한 황소를 이곳을 감시하던 초병이 발견했지만 중립수역이라 자칫 발생할 수 있는 군사적 충돌을 우려해 황소를 구출하지 못하고 시간은 흘러갔다. 발에 상처를 입은 채 유도에 고립된 황소는 점차 야위어 갔고, 보다 못한 국방부와 해군장병들이 함께 황소구출작전에 나섰다. 표류된 지 5개월 만이었다. 극적으로 구출된 황소는 ‘평화의 소’라는 이름으로 제주도에 정착해 16살까지 후손을 퍼트리며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바로 앞의 땅을 밟지 못하고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애타는 마음은 소나 사람이나 마찬가지일 터. 남북한 왕래가 자유로웠다면, 애초에 분단이 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며 문수산 정상을 내려왔다.

해마다 번화하던 항구는 철책으로 막혀

홍예문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가파르지 않은 길이 이어져 있어 비교적 쉽게 걸을 수 있다. 여기서부터는 등산객은커녕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한적한 풍경이 이어지는데, 이 길을 따라 조강철책까지 걸으면 2코스의 반 이상을 걸은 셈이다.
문수산을 내려오면 만나는 마을이 바로 조강리다. 한강의 끝자락이자 수도 한양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조강 포구는 과거 물류와 교통의 중심지였다. 얼마나 번성했던지 17세기 학자 신유한(申維翰)은 자신의 시에서 조강나루가 흥하던 시절을 노래하기도 했다.

조강은 일명 ‘삼기하’라 하니 세 강이 바다로 함께 조회하기 때문이지요. 남으론 호남, 서쪽으론 낙랑(평양)으로 통하여 잇닿은 배들이 베틀의 북과 같았고 고기·소금·과일·베·쌀이 산같이 쌓일 땐 하루에도 이천척이 오갔다오.
(중략)
달 지고 조수 불어나면 배 위에 사람들 두런거리고봄빛은 강가 버드나무에 물씬 일렁였구요. 해마다 이 항구는 번화하여 북녘 길손도 평양 자랑을 못했다오.
신유한 『조강행(祖江行)』 (출처 : 김포문화재단)

현재 김포시 조강과 마주하고 있는 북쪽에도 ‘조강’이라는 지역이 있다. 풍덕군 임한면(현 개풍군)의 조강이다. 강을 따라 설치된 철책 옆을 걸으며 이 강이 사람과 배로 가득했던 그때를 상상해본다. 지금은 남과 북으로 나뉘어 더 이상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이 되었지만, 언젠가는 이 강에서 물자를 산더미처럼 쌓은 배들이 오고 갈 날을 기약해 본다.
조강철책부터 애기봉까지 마지막 남은 길을 걷기 위해 다시 발을 옮긴다. 2코스의 마지막 지점인 애기봉은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슬픈 역사가 서린 곳이다.

병자호란 때 평안감사가 자신의 애첩 ‘애기’를 데리고 한양을 향해 피난길에 올랐다. 그러나 감사는 강을 건너기 전 개풍군에서 청나라오랑캐에게 잡혀 끌려가고 애기만 한강을 건너게 된다. 애기는 월곶면에 머물며 매일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감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결국 병들어 죽어가면서 “‘임’이 잘 보이는 산 정상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마을 사람들은 애기를 산 정상에 묻고 그 산을 애기봉(愛妓峰)이라 불렀다. (출처 : 김포시청)

오지 않는 임을 그리워하는 애기와 북쪽의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실향민이 겹친다. 이제는 철책에 가로막혀 가지 못하는 고향을 TV 뉴스 화면으로 보고 울었다던 실향민의 말이 떠올랐다. 감히 그 마음을 전부 헤아릴 수 있겠냐마는 북쪽이 가장 잘 보이는 산 위에 올라 고향을 그리던 이들의 마음이 언젠가는 위로받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애기봉 정상 전망대에서는 망원경으로 북한의 선전마을과 송악산 등을 볼 수 있다. 크리스마스와 석가탄신일이 되면 북쪽을 향한 예배와 법회 등 각종 행사가 열려 실향민들이 마음을 위로받기 위해 자주 찾는 망향의 동산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애기봉 전망대는 공원 조성사업으로 출입이 통제됐다. 올 연말까지 김포시가 이곳에 공연장, 무대 등을 설치해 다시 개장한다고 하니, 조만간 북녘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야외 공연예술장이 만들어질 것으로 보인다.
평화누리길 2코스는 애기봉 입구에서 끝나 다시 3코스, 한강철책길로 이어진다. 시간과 체력의 여유가 있다면 다음 코스를 더 여행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길이 다른 길로 이어지듯, 남과 북의 길도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바라본다.

4. 문수산 정상에서 바라본 북녘 땅. 정면에 도고개와 하조강리가 보인다.

5. 1997년 1월 17일 해병대 청룡부대 장병들이 김포군 월곶면 보구곶리 해안에서 북쪽으로 5백 여 미터 떨어진 유도에서 황소를 구출, 보트에 싣고 우리측 지역으로 데려오고 있다. ©연합

6. 조강을 따라 설치된 철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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