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반도 정세의 흐름은 분단과 전쟁, 적대적 상호의존의 남북관계, 그리고 한미동맹과 북·중동맹을 축으로 하는 강대국 정치의 축소판이었다. 세계적 차원의 냉전 종식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정세는 여전히 냉전적 국제 정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북한의 핵정치, 전략경쟁과 세력 전이라는 미국과 중국의 동북아 강대국 정치는 냉전의 한반도 국제정치가 지속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토양과 동력을 제공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평화를 향한 대장정의 시작, 판문점 선언
그러나 2018년 새해 벽두부터 한반도 대전환의 기운이 강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북한의 국가 핵무력 완성 선언과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최대 압박, 군사적 선제공격 조짐으로 전쟁의 먹구 름이 한반도 전역을 휘감고 돌았던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전개되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조성된 한반도 대전환 국면은 전쟁의 먹구름을 일거에 해소하고 한반도 전역에 평화의 햇살을 서서히 비추기 시작 했다. 바야흐로 전쟁을 뒤로하고 평화를 향한 대장정의 막이 오른 것이다. 냉전의 한반도 국제정치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한반도 평화 체제를 열어나 가기 위한 대전환의 장도가 열린 것이다.
그 출발과 중심은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선언이었다. 판문점 선언을 통해 남과 북은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었음을 8천만 우리 겨레와 전 세계에 엄숙히 천명”하고 분단과 전쟁, 적대적 상호의존으로 점철되어 왔던 냉전의 한반도를 해체하고 새로운 한반도 평화시대를 여는 대장정의 이정표를 제시하였다.
남북 평화 공존·공영을 위한 두 개의 관문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공영할 수 있는 새로운 한반도 평화시대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남북한 평화협력 프로세스와 북·미 비핵화 프로세스라는 두 개의 관문을 반드시 통과해야 만 한다. 판문점 선언 이후 평화협력 프로세스와 비핵화 프로세스는 ‘따로 또 같이’ 작동하면서 한반도 대장정의 길을 열어왔다.
먼저, 남북한 평화협력 프로세스의 궤적이다. 판문점 선언 이후 지난 시기 전쟁과 대립을 극복하고 평화와 협력의 새로운 질서를 열어나가기 위한 남북한 평화협력 프로세스는 2018 년 9월 19일 평양공동선언의 군사분야 합의를 만들어냈다. 남북이 합의한 군사분야의 다 양한 조항들은 전쟁과 대립을 전제로 한 억지에 바탕을 둔 기존의 국가안보 대신 남북한 평 화와 협력을 전제로 한 안보의 상호의존과 협력의 정신을 강조하는 공동안보의 사고를 반 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군사분야의 주요 합의 내용은 전통적인 안보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비군사적 차원의 안보문제도 포함하고 있다. 남북한 군사분야 합의로 구체화된 남북 한 평화협력 프로세스는 평화와 안보의 선순환구조를 통해 새로운 한반도 평화와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이 가능하다는 사고의 전환과 새로운 인식의 첫발을 내딛었다.
다음으로 북·미 비핵화 프로세스이다. 새로운 한반도 평화시대를 열기 위한 또 다른 중요한 관문인 북·미 비핵화 프로세스는 남북한 평화협력 프로세스와 같이 작동하면서 2018년 6월 역사적인 제1차 북·미 정상회담을 만들어냈다. 제1차 정상회담에서 북·미 양 국은 공동성명을 통해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과 한반도에 항구적이고 안정적인 평화체제 구축 및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해 나갈 것을 약속하였다. 2018년 제1차 북· 미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는 앞에 놓인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2019년 2 월 제2차 북·미 정상회담 개최까지 도달했다. 예상과 달리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은 어떠한 합의문이나 공동성명도 없이 종료되었지만, 이것이 북·미 비핵화 프로세스의 종료를 의미 하는 것은 아니다.
비핵화 프로세스를 바라보는 북·미의 셈법
새로운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북·미 비핵화 프로세스 가 원활하게 작동해 나가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주기적으로 목격했듯이 비핵화 프로세스가 생각보다 더디게 작동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비핵화 프로세스를 구성하고 있는 3가지 핵심 요인에 대한 북·미의 셈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3가지 핵심요인은 다름 아닌 상황요인, 정책요인, 그리고 시간요인이다.
먼저, 비핵화 프로세스의 상황요인이다. 상황요인은 북·미 비핵화 협상이나 과정이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서 전개되고 있는가를 뜻하는 것으로 비핵화 접근방법이라 할 수 있는 정책요인이 전개되는 전략적 공간을 의미한다. 즉, 북한은 핵무력 완성 선언을 통한 핵보유국이라 는 입장에서, 미국은 그 어느 때 보다도 강력한 대북 제재를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그리고 보다 더 큰 틀에서는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미·중 영향력 경쟁이 격화되고 있는 현실이 비핵화 프로세스의 전략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 한 상황요인은 과거 북한의 비핵화 과정과는 완전히 다른 국면이자 북·미의 전략적 불신과 맞물리면서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주기적인 상호 기싸움과 신경전을 야기하는 주된 배경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요인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비핵화 프로세스의 정책요인은 비핵화 협상에 대한 북·미의 접근방법이자 비핵화 협상을 통해 북·미 양국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기 위한 전략적 프레임이다. 북한은 비핵화 프레임으로 핵 폐기와 체제안전보장의 단계적·동시적 이 행이라는 입장을 초지일관 유지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보이고는 있지만 과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선 비핵 화 후 체제안전보장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상황요인과 맞물려 작동하는 북·미 양국 의 정책요인은 비핵화 협상의 교착국면을 초래할 수 있는 핵심적 요소다. 따라서 비핵화 프로세스에 대한 북·미의 전략적 프레임이 바뀌거나 상호 간에 부분적 혹은 일괄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비핵화 프로세스는 험난한 국면에 직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어떠한 합의도 없이 끝나게 된 궁극적 원인도 비핵화 협상의 전략적 프레임인 북·미의 상이한 정책요인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시간요인은 비핵화 협상에서 북·미 양국의 대내외적 정치일정에 따라 상황요인과 정책요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종의 매개변수라 할 수 있다. 북·미의 상황요인을 고려했을 경우, 시간요인이 북·미 어느 쪽에 보다 유리하게 작용할 것인가를 판단하기는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최근 북·미 양 정상은 시간변수와 관련된 발언을 하였다. 먼저, 김정은 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14기 제1차 회의(4월 11~12일) 시정연설을 통해 “올해 말까지는 인내심을 갖 고 미국의 용단을 기다려 볼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비핵화 협상의 마지노선을 제시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4월 11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서두르지 않으면서 단계적으로 비 핵화 협상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북·미의 입장을 반영한 시간요인이 비핵 화 프로세스의 상황요인과 정책요인, 그리고 북·미 양국에게 미치는 효과는 비핵화 프로세 스의 원활한 작동여부와 관계없이 올 하반기와 내년 상반기 초에 접어들수록 보다 명료하 게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숨 고르기 들어간 한반도, 재충전의 기회로 삼아야
판문점 선언 1년을 즈음한 현재 한반도 평화를 향한 대장정은 숨 고르기 상태에 접어든 양상을 보이고 있다. 현상적으로는 북·미 비핵 화 프로세스가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으면서 남북한 평화협력 프로세스의 속도도 늦춰지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북·미 비핵화 프로세스의 진척 여부에 따라 남북한 평화협력 프로세스의 속도와 폭이 좌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말의 우려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 리는 숨 고르기 상태에 접어든 지금 이 순간을 한반도 평화시대를 열 어나가기 위한 재충전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숨 가쁘게 달려 온 지난 1년, 평화와 번영을 향한 한반도 대장정의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판문점 선언의 내용과 정신 이 되돌릴 수 없는 시대의 흐름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만 한다. 판문점 선언 1 년을 맞이한 시점에서 우리는 새로운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질서를 열어가는데 풀어야만 하는 다양한 전략 과제들을 점검하고 하나하나의 맞춤형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
현재의 상황은 비핵화 프로세스와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는 과제들과는 별개로 남북한 평화협력 프로세스를 힘차게 작동시킬 수 있는 과제들에 대한 실행력을 높여가야 할 시점 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남북이 군사분야 합의서 내용을 보다 철저하게 이행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정치·군사적 차원의 남북한 평화협력 프로세스를 가동하여 평화와 번영의 새로운 한반도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마중물 역할을 해 나가야 한다.
새로운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평화협력 프로세스와 비핵화 프로세스가 선순환 구도를 형성해 나가는 것이 최적이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경우 평화협력 프로세스가 비핵화 프로세스를 추동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남과 북, 그리고 8천만 우리 겨레는 판문점 선언이 한반도 평화의 대장정에 던져주는 함의를 재성찰해야 할 것이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