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의 길을 묻다

“북한이 세계화 흐름에 동참하도록 우리가 도와야 합니다””

우리나라 통일정책의 기초를 닦은 이홍구 전 국무총리. 학자로서, 정치가로서, 관료로서 그의 삶을 관통하는 주제는 통일이다. 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우리사회 원로로서 국제적 흐름을 진단하며 남북이 가야할 길을 꾸준히 제안해 왔다. 1934년에 태어나 격동의 역사를 고스란히 살아온 이홍구 전 총리. 중요하게 생각되는 일들이 명확해지면서,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하는 것을 경계하고자 최근에는 집필활동도 자제하고 있다고 했다. 온화한 미소와 함께 조용하게 인터뷰를 이어갔지만, 그의 진단은 예리했고, 그가 전해주는 배움은 컸다.

Q.. 작년 한 해 한반도에 나타난 변화들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새 정부 들어서 상당히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간 대화의 물꼬가 트이고 평화가 진전되면서 국민들이 전쟁의 위협을 덜 느끼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올해가 3·1절 100주년 인데, 독립선언서를 보면 한국의 독립 못지않게 ‘동양평화’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 기원은 안중근 의사가 1909년 뤼순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며 쓴 『동양평화 론』입니다. 당시 일본, 러시아, 중국이라는 강대국이 서 로 각축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남아 야 하는가가 큰 문제였어요. 당시 안중근 의사의 말씀은 ‘조선의 독립은 동양평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동양평화 역시 조선의 독립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동양평화와 한국의 독립은 서로 필요조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는 전쟁을 막고 평화로운 통일로 가자는 데까지는 성공했습니다. 이제는 일본, 중국, 러시아에 더해 미국까지 포함된 주변국과의 관계에 따라 한반도의 평화가 결정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으로 한반도 문제가 꼬이면 이들 강대국의 관계도 꼬이고 엉망이 됩니다. 결국 동양평화 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이냐는 문제와 한반도 평화통일을 어떻게 이룰 것이냐는 문제가 함께 포괄적으로 해결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풀어야 할 핵심 과제입니다.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남북문제의 답을 찾자

Q.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우선적으로 풀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북한이 먼저 ‘풍계리와 동창리 핵시설을 해체하겠다’ 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전 세계 사람들이 동창리가 어디고 풍계리가 어디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외국인은 고사하고 남한 사람들도 몰라요. 그렇기 때문에 잘 와닿지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북한이 2003년에 핵확산금지조약(NPT) 에서 탈퇴했는데, 김정은 위원장이 비핵화 선언을 한 만큼 NPT 체제로 들어가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겁니다. 이를 위해 한국이 돕고 미국도 환영한다는 이야기를 해야 전 세계 사람들이 ‘김정은이 정말 뭔가를 하려는구나’라고 느낄 겁니다.

더불어, 남북이 함께 세계화로 가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미국과 소련이 주도했던 1차 냉전이 끝날 무렵 본격적으로 세계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개발도상국이었던 중국은 30년 만에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도 세계화를 통해 많은 이득을 봤습니다. 북한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민족으로 부지런하고 머리도 좋고 개발도 잘 하기 때문에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북한이 세 계화의 흐름에 동참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야합니다.

북한 입장에서도 국제사회에 나올 수 있는 기회입니다.

남과 북이 갈라진 지 74년이고, 우리 역사상 최대의 전 쟁인 6·25전쟁을 겪은 지도 7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남 북 간 전쟁에는 승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남과 북의 국제 적인 위상, 특히 경제적인 실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 로 격차가 커졌습니다. 우리는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세 계화의 선두에 서겠다고 뛰어들었지만, 북한은 단호하게 ‘우리식’으로 하겠다고 한 것이 지금의 차이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과학과 통신이 발전할수록 세계는 좁아지고 서로 연결되기 때문에 무조건 ‘우리식’으로 한다고 해서는 세계화, 국제화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지난 70년의 역사에서 제가 본 것은 ‘우리식’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 같이 뛰어들어야 해요. 다만 그 과정은 평화적이어야 합니다.

핵보다 경제를 택한 북한, 역사적 결단 필요

Q. 앞으로 북한의 행보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김정은 위원장이 권력을 잡고 지난 6~7년 동안 진행 한 것이 병진노선입니다. 핵 강국도 되고 경제대국도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상황으로 볼 때 확실한 것은 핵 강국이 되는 것은 어렵다는 겁니다. 얼마 전 독 일 외무장관이 북한에 다녀와서 “북한의 핵무기 개발 은 외부로부터의 정권 교체 시도에 대항하기 위한 ‘생명 보험’과 같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러나 저는 김정은 위원장이 핵과 경제 둘 중에서 핵을 버리고 경제를 택했다고 봅니다. 북한은 아주 특수한 전체주의 국가입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인민의 지지를 받는 성공적인 정치가가 되고 싶어 해요. 그렇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에게 ‘남북 이 군사경쟁 할 필요 없고 우리도 경제대국이 되고 잘 사 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면 북한 주민의 다수는 김정은 위원장을 따라갈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런 결정을 칭찬하고 응원해서 그 방향으로 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 나 결국은 김정은 위원장의 역사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Q. 한반도 냉전을 해체하는 문제는 동아시아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는 작업과도 연관됩니다. 동아시아의 협력과 평화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재작년부터 중국과 미국 사이에 2차 냉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강대국들의 관계를 봐야 하는데, 아시아를 보면 우리나라, 일본, 동남아, 그리고 호주까지 모든 나라가 아 시아의 유일한 핵 강국은 중국이라는 것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북한이 자신들도 핵 강국이 되겠다고 한 것입니다. 조금 더 확대해 보면 러시아까지 동아시아에서 3개의 나라가 핵 강국이 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중국과 러시아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이 핵 강국이 되는 것을 놔둔다는 것은 북한이나 동아시아를 NPT에서 예외로 만든다는 이야기입니다. 강대국은 작은 나라가 전체 판을 흔드는 것을 절대 놔두지 않습니다. 북한은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새로운 길 로 들어서야 합니다. 그러한 정치력이 김정은 위원장에 게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아직 젊기 때문에 뭐든 해보자고 할 수도 있어요. 우리가 그러한 의지를 잘 북돋아서 좋은 방향으로 풀어 나갔으면 하는 것이 제 바람입니다.

만장일치로 합의된 통일방안, 정부가 먼저 손 내밀어야

Q. 국토통일원 장관을 하시면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을 만드는 데 중심 역할을 하셨습니다. 여야가 합의하는 대북·통일정책은 어떻게 추진해 나갈 수 있을까요?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1989년 9월 11일에 만들어 져서 올해가 딱 30주년인데, 사실 기본 구상은 간단합니다. ‘우리나라는 하나의 민족이다. 여러 사정 때문에 두 개의 정부로 나뉘어 있지만 몇 년이 걸리든 두 정부가 협조해서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잘 키워가는 노력을 하 고 어느 시점에는 하나의 정부로 합쳐야 한다’는 것이 기본 논리입니다.

당시 여소야대 국회라 야3당의 표가 더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만장일치로 합의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베를 린 장벽이 무너지고 다음해에 독일이 통일되는 등 세계정세도 도왔어요. 분위기가 그렇게 되니까 북한이 먼저 우리에게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에 대해 논의해보자고 제안해서 89년 말부터 여섯 번에 걸쳐 총리 회담을 했습니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남북기본합의서입니다. 두 정부가 합의한 조 약을 통해 남과 북은 외교관계가 아니라 분단으로 인한 특수관계라고 못을 박았어요. 그래서 여섯 개의 공동위원회를 만들고 분야에 따라서 협력한다고 합의했습니다. 두 번째는 유엔 동시가입입니다. 세계 각국이 유엔 에 가입해 있는데 한국만 대표성이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도 의석 두 개를 달라고 했더니 유엔에서도 만장일치로 통과되어서 동시가입을 했습니다. 세 번째는 비핵화 공동선언입니다. 한반도에서는 어떤 이유로든 핵 과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것인데, 1945년 에 일본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인한 사상자 15만 명 중 20%가 한국인이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으로 우리 민족이 안전하려면 핵 위험이 없어야 한다는 데 합의를 한 것입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지금 우리는 북한과 합의할 능력도 있고 함께 합의했던 경험도 있습니다. 그러니 무조건 부 정적으로 보지 말고, 우리가 주도성을 가지고 통일문제 를 풀어 나갔으면 합니다.

Q. 그동안 북한, 통일 문제가 정쟁화되기도 했습니다.

통일방안이 만들어지던 당시에는 민주적인 절차를 잘 밟았습니다. 1988년 13대 국회에서 약 두 달에 걸쳐 긴 공청회를 열고 통일 관련 단체들이 모두 모여서 자신들이 원하는 안이 무엇인지 발표할 기회를 줬습니다. 또 국회 통일특위 4당 간사들도 아주 열심히 했었고, 더 중요한 것은 야3당 총재들이 아무리 바빠도 통일방안 때문에 상의드릴 것이 있다고 하면 시간을 내주고 열심히 듣고 충분히 토의했습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도 본인 목소리를 내기보다 전적으로 저에게 일을 맡겼어요. 다 만 조건은 세 명의 총재가 모두 합의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부가 오히려 야3당과 같이 가겠다고 한 것이죠. 네 사람이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통일방안이 만장일치로 합의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Q. 지금은 대북정책에 대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다보니 합의점을 찾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풀어나가는 데 민주평통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합의를 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정부가 모범을 보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부가 먼저 손을 내밀면서 소통하고, 남북대화의 역사를 잘 검토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민주평통은 제가 1993년에 수석부의장을 했기에 중요성을 잘 알고 애정이 깊은 조직입니다. 민주평통은 정 책을 결정하는 곳이 아니고 건의하는 기관이기 때문에 각 지역이나 단체에서 말하는 평화통일 문제에 대한 의 견들을 모아서 정부와 국회에 전달하는 역할을 잘 해야 합니다. 정부와 국회는 그 의견을 참고해서 정책을 만들어야 하고요. 그 과정에서 국민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아 주고 합의를 이끌어 내면서, 민주적인 통일 과정을 만드는 것이 민주평통의 큰 역할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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