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2019년 6월의 광장
분열 아닌 공존·화합의 마당 되기를

6월 하면 뭐가 떠오를까? 여름이 본격화되는 계절이자 호국보훈의 달, 비극의 6·25전쟁이 있었던 달이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기리는 현충일(6월 6일)도 있다. 전쟁의 비극을 넘어 화해와 평화의 새 길을 열고자 했던 6·15 남북공동선언도 6월의 한복판에 있었다.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 세대에게는 6월 하면 무엇보다 ‘6월 항쟁’ 이 떠오를 것이다. 전쟁과 화해, 민주주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사건들이 6월의 역사에 자리하고 있다.

민주와 평화 ·번영의 역사가 담긴 한국의 6월

매년 6월 25일에는 6·25전쟁의 교훈을 되새기며 국가를 위한 희생과 헌신을 기린다. 그러나 6·25전쟁은 여전히 휴전 상태이다. 전쟁은 끝났지 만, 종전 선언과 평화 협정을 하지 못한 채 66년이 흘렀다. 지난해 남·북·미 간의 협상에서 종전 선언이 화두가 됐다 . 종전 선언이 비핵화 협상의 가장 1차적인 상응조치가 될 수 있는 것처럼 거론됐고, 9·19 평양 선언 이후 문재인 대통령은 대국민보고에서 종전 선언에 대한 가시적인 기대감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아직까지 갈 길이 멀어보인다. 종전 선언이 정치적 선언 이상의 구체적 조치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비롯된 것 같다. 이는 비핵화 협상의 진전과 맞물려 풀 수밖에 없어 보인다.

지난 2018 년은 한반도 분단의 역사에서 새로운 전환의 시기였다. 물론 최근 상황이 지난해 도보다리의 감동이나 백두산의 합창 당시의 기대에 못 미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가을이 왔다’ 는 답방 약속은 이행되지 못한 채 ‘판문점의 봄’ 1 주년을 보냈다. 하노이 회담 합의 결렬 이후 북·미협상은 지지부진하다. 냉정한 상황 인식이 필요하다는 사람도 있다. 상황 인식을 정비해 볼 필요는 있다. 그러나 2017년 말의 핵미사일 위기 상황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한반도 정세가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여정에서 2018년의 감동과 합창의 역사적 의미는 이후의 성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상대 국가들의 선택도 있을 것이다. 동북아 질서를 둘러싼 주변 국가들의 이해관계도 걸려 있다. 외교적 과제들이다. 이런 외교적 과제 못지않게 우리 내부의 공감과 공존 방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남북문제는 정권의 성격에 따라 좌우되는 1회성 정책이 되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민족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남북 화해의 진전에 비해 오히려 양극화되는 우리 내부의 분열과 대립은 극복해야 할 당면 과제이다.

과거 서독도 ‘동서독기본조약’을 둘러싸고 내부적으로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헌재 결정이 합의를 이끈 이후 서독은 통일이 될 때까지 동독에 대한 정책을 합의 속에서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었다. 동방정책을 내세운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수상의 주도로 체 결된 기본조약에 대해 보수 기민당은 헌법소원까지 제기했다. 이에 연방헌법재판소는 기본조 약을 합헌으로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동독의 인권 문제에 대한 상호주의를 강조하는 보수 진영의 요구를 보완하는 내용을 결정문에 담았다. 당시 동독 정책에 대한 ‘합의의 판결’이란 보도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동방정책의 취지를 살리면서 보수 세력이 우려하는 바를 향후 협상의 원칙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내부의 합의 속에 일관되게 추진된 서독의 동독정책은 소수당 소속의 겐셔(Hans-Dietrich Genscher)가 통일독일 때까지 18년 동안 외무장관을 했던 사실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여기에는 외교장관으로서 겐셔 개인의 역량도 바탕이 되었다. 겐셔는 독일의 소수당인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사민당과의 연정에 참여하면서 1974년 외무장관에 취임한 후 자유민주당이 연정에 참여하지 않은 소수 야당일 때도 외무장관을 계속했고 통일 독일의 초대 장관까지 지냈다. 2006년 은퇴 이후 본(Bonn)의 자택에서 지내던 그를 면담한 바 있다. 그는 주변 국가들에 대한 신뢰와 국내 세력 간의 타협을 자신의 외교 역량의 배경이라고 말했다.

내부의 분열과 대립은 극복해야 할

문재인 정부 들어 한반도 평화와 공동번영의 새로운 전기를 만들고 있지만, 이에 대한 국내의 시각 차이는 여전하다. 북한문제는 가장 양극화된 정파적 쟁점이 돼 있다. 사실 그동안 우리 사회 이념문제도 북한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전쟁의 당사자였던 북한과 화해를 모색하고 있는데, 우리 내부의 이런 상황은 역설이다. 물론 내부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용인할 수 있는 갈등으로 볼 수도 있다. 문제는 이를 위한 타협과 화해의 해법이 모색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포용정책인 햇볕정책뿐 아니라 국내 정치에서도 화해와 합의의 포용정치를 시도했다. 물론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 대한 현실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이견도 있지만 국내 정치에서 포용과 합의를 모색했던 점은 주목할 만하다. 보수-진보 이념 갈등의 핵심 쟁점인 대북정책을 담당하는 통일부장관과 국정원장에 과거 보수 정부에서 일했던 인사들을 임명했고 국내의 합의를 시도하면서 남북 정상회담도 성사시켰다. DJP연합정권으로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든 본래의 철학이었든 새겨볼 만한 통합과 합의의 리더십이었다. 그의 합의와 통합의 리더십은 소수 정치인으로서의 역정에서 체화된 전략이자 철학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대북정책과 맞물린 이런 합의와 통합의 국정 리더십은 계속되지 못했다. 정권 중 후반 DJP연합이 붕괴되면서 대북정책에 대한 이념적 논란이 조금씩 불거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차기 정부로 이어지면서 국내정치에서 이념갈등이 증폭됐고, 이는 북한문제에 대한 인식과도 상호작용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와 대북 정책에서 화해와 대화를 통한 공동 번영을 모색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국내 정치에서는 취임 당시의 협치 약속과는 거리가 먼 양극화의 정치가 되고 있다.

6월 항쟁이 남긴 과제, 평화와 공존

6월을 상징하는 6월 항쟁이 남긴 과제도 사실 더불어 사는 공존의 원리로서 민주주의 양식이었다. 6월 항쟁 때까지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는 군부독재 정권을 끌어내리고, 국민이 대통 령을 직접 선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민주주의가 이뤄지는 것이 아님은 모두 알고 있는 바였다. 독재정권 타도는 당면한 과제였을 뿐이다. 6월 항쟁 이후 한국사회는 본격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민주주의는 흔히 시민의 뜻에 따르는 정치원리로 정의된다. 그런데 시민은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서로 다른 다양한 개인과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는 지난한 과제가 된다. 서로 다른 견해와 이해관계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의견을 수렴하는 방식에 따라 각 나라의 민주주의 방식이 다양하게 제도화되고 정착돼 왔다. 단순 다수결 국가도 있고, 합의제 국가도 있다. 민주적인 통합에 실패해 나라가 깨지기도 했다. 다양성을 민주적으로 수렴하는 체제가 아니라 강제로 통합하는 독재가 되기도 했다.

우리의 근대정치 역사에서 ‘민주주의’라고 하면, 국민의 뜻이라는 추상적인 개념과 다수결 원칙이 떠오르는 정도이다.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근대국가 수립기에 민족 내부의 공존 방식보다 민족독립이 강조됐던 역사적 배경도 작용했다. 이후의 분단체제 또한 역설적으로 민족 개념을 계속 강조하게 만들었다. 민주주의를 말하면서 내적으로는 전체주의적 속성이 우리의 풍토에 있다. 요즘도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나의 의견만이 옳고, 다른 쪽은 다른 게 아니고 틀렸다고 하는 부류이다.

6월 항쟁이 만든 87년 체제의 제도적 기반은 이런 공존의 양식을 담지 못했다. 군부독재 청산과 재발 방지에 초점을 둔 제도화였다. 그렇기에 87년 체제는 다양성이 공존하는 방향으로의 개편이 요구된다. 선거제 개편이 그렇고, 개헌도 그렇다. 요즘 갈등의 증폭은 독선과 결합한 민주주의론이 진영 상호 간에 상승작용하면서 나타나고 있다. 민주주의는 도식적인 가치가 아니라, 시민주권 시대에 더불어 살아가는 공존의 방식이라는 점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생물도 진화할수록 다양화되고 다원화되듯이, 민주주의 발전의 정도도 다양성을 포용하는 정도에 비례한다.

6월 항쟁의 민주화 요구는 광장의 시대를 열었다. 6월 항쟁의 넥타이 부대는 이후 2002년 6월 월드컵의 광장 응원과 효순·미선이 촛불집회로 이어졌다. 이런 광장의 힘은 2016~2017년 탄핵 촛불집회로 타올랐다. 우리 사회의 에너지를 모으는 광장이었고, 민심의 촛불이었다. 세부적으로는 서로 달라도 ‘이게 나라냐’고 할 때는 하나의 촛불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요즘은 그런 광장마저도 분열과 갈등의 무대가 되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한 노력이 우리 사회 내부의 합의와 공존에 대한 고민과 함께 하길 주문해본다. 2019년 6월 광장은 분열의 무대가 아니라 화해와 공존을 위한 공동체의 한마당이 되길 희망한다.

김 만 흠 김 만 흠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

카카오톡 아이콘 페이스북 아이콘 트위터 아이콘 카카오스토리 아이콘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