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2018년 4월 20일 당 제7기 제3차 전원회의를 개최하고 당과 국가의 사업 전반에서 경제를 우선시하는 ‘새로운 전략적 노선’을 선포했다. 이와 동시에 경제 총력 건설에 대한 새로운 전략 노선의 실천 방안 중 하나로 ‘과학기술 중시’ 정책을 제시했다. 금융 부문에도 이러한 변화가 그대로 투영돼, 은행결제 및 회계업무의 안전성을 철저히 담보할 것 등이 강조됐다. 이와 관련해 최근 북한의 금융결제 시스템에서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가 바로 전자화폐의 도입이다. 현재 북한에서는 평양을 중심으로 나래카드, 고려카드 등의 보급이 상당 부분 이루어졌으며 일부 지방에도 도입되기 시작했다.
북한 주민이 사용하는 전자화폐는 과연 어떤 종류일까? 북한의 저명한 경제 학술지 『경제연구』에 의하면 북한에는 크게 은행카드, 예불카드, 전자현금 등 3종류가 있다. 은행카드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신용카드 또는 직불카드와 유사하다. 다시 말하면 카드 사용자는 은행에 본인 명의의 통장을 보유해야만 한다. 반면에 예불카드는 ‘T머니카드’와 같이 개별 통장이 필요 없는 현금 충전식 카드다. 북한에서 현재 사용되는 전자카드는 후자에 더 가깝다.
평양을 중심으로 북한에서 카드 사용이 증대되는 이유 중 하나는 현금을 충전해 사용하는 방식이 신분이나 소득의 노출을 방지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이유는 현금을 소지하지 않아도 되고, 거스름돈을 정확히 돌려받을 수 있다는 편리성과 정확성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에서 주민들이 내화보다는 외화를 선호한다고 하지만 외화는 어디까지나 가치 저장의 수단이다. 외화가 내화와 같이 통용되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단위까지도 유통되어야 하는데 북한에서는 작은 외화까지 통용될 만큼 외화가 충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가계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쌀을 비롯한 먹거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화로 환산해 상품을 구입할 경우 잔돈을 돌려받지 못하는 상황이 빈번히 발생했다. 그러나 카드의 등장으로 소비자는 거스름돈을 정확히 돌려받을 수 있고, 잔돈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카드가 보급된 또 다른 이유는 택시의 보급이다. 평양에는 22개 이상의 대학이 있는데, 학생들은 택시를 자주 이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북한에서는 1호 행사, 2호 행사 등 갑자기 주최되는 빈번한 행사에 대학생이 긴급히 투입돼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이 전철로 이동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대극장 앞에 1시까지 모이라고 하면 택시를 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킬로당 0.5불인 택시요금이 4불 정도 나와 10불을 건네주면 잔돈이 없는 운전수는 거스름돈을 줄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잔돈을 정확히 돌려받을 수 있는 카드 사용이 대학생들 사이에 퍼지게 됐다. 이뿐만 아니다. 북한에서 핸드폰의 기본 서비스 요금은 북한 돈으로 2,850원이지만 이 한도를 초과하면 외화로 카드를 추가 구입해 충전해서 사용해야 한다. 이 휴대전화 카드가 장당 10유로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로화를 소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외환카드로 구입한다.
그뿐 아니라 북한에는 현재 전국적으로 400~500개에 달하는 종합시장이 있는데, 그에 못지않은 규모로대형마트와 상점이 증설되고 있다. 서장상점, 락원백화점, 광복거리상업중심, 평양제1백화점 등은 모두 카드 사용이 가능하다. 특히 마트를 이용한 소비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지고 있다. 마트는 시장보다 유통 단계를 단축시킴으로써 대량의 공산품을 값싸게 구입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상인뿐만 아니라 대학생을 포함한 성인들 사이에 카드가 통용되면서 북한 사회에 카드 보급이 확산된 것이다.
내화전용 전자결제 카드도 등장
북한에 카드가 보급되고 있다는 사실은, 북한이 서로 신뢰하는 ‘신용’ 사회로 나아가고 있음을 뒷받침한다. 주목할 점은 2015년도 조선중앙은행에서 내화전용 전자결제 카드인 ‘전성카드’를 출시했다는 사실이다. 북한 당국은 전성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가맹점을 늘리고 있다. 현재 전성카드는 광복거리 상업중심이나 광복백화점 등에서 사용 가능하며 기능도 나래카드나 고려카드와 같다. 사실 북한 주민이 내화를 사용하기 꺼려했던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부피가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내화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많은 돈을 들고 다녀야 해 사용이 불편했다. 내화카드의 등장은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는 계기가 됐다. 따라서 북한이 외화카드뿐만 아니라 전성카드 사용을 확대시키고 있다는 점은 김정은 정권 시대에 들어서며 북한 당국이 금융거래에 대한 신용 확대를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향후 이를 기반으로 내수 확대를 위한 금융정책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통일연구원 부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