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문재인 대통령은 3·1절 100주년 기념사에서 새로운 100년의 과제로 신한반도체제 구축을 설정했다. 신한반도체제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와 동북아 플러스 책임공동체, 동북아 평화 플랫폼을 종합하는 의미로, 한반도가 전쟁과 대립의 무대에서 평화와 협력의 무대로 변화해 만들어내는 새로운 질서다. 이를 위해 동북아 전쟁의 논리를 강요하는 ‘두 개의 전후’를 극복해야 한다. ‘냉전’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되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와 ‘정전’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되는 6·25전쟁 전후가 중첩되어 전쟁의 위기를 고조시켰던 것, 그것이 2017년 위기의 본질이다.
‘두 개의 전후’로부터의 탈각은 동아시아 평화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데 한일관계가 중심이 되는 역사적·지정학적 근거다. 나아가 동북아 플러스 책임공동체를 구체화하기 위한 세 가지 구상, 즉 신북방정책과 신남방정책,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은 한일관계를 중심축으로 설정할 때 보다 현실성을 띌 수 있다. 그것은 남북한과 일본으로 구성되는 동북아 평화의 핵심 삼각형을 중심으로 위로는 유라시아, 아래로는 동남아시아를 연결하여 ‘종축 아시아 평화지대’ 창출로 이어질 수 있다.
두 가지 전후의 극복과 신한반도체제 구축
2018년은 ‘두 개의 전후’ 체제가 해체되기 시작한 해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진행되는 가운데 냉전체제 위에 성립한 한일 간 1965년 체제의 해체 움직임이 시작됐다. 4월 판문점회담과 10월 대법원 판결은 불가분의 하나이다. 신한반도체제에 조응하는 한일관계 구축이 과제로 부상했다. 동북아 냉전과 한반도 정전을 보증하는 한·미·일 3각 안보협력의 하위동맹으로 존재하던 한일관계는 신한반도체제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다. 신한반도체제 시대의 한일관계는 동북아 냉전과 한반도 정전을 극복하는 남·북·일 3각 평화협력의 밑변으로 재구축된 것이어야 한다. 1998년 채택한 한일 공동선언은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하고 한국이 미래지향의 관계 발전을 확인하는 내용이다. 중요한 것은 과거에서 미래로 시점을 옮기는 데 현재 이룩한 성과를 서로 높이 평가하고 있는 부분이다. 일본은 한국이 이룩한 민주화의 성과를, 한국은 전후 일본의 평화적 발전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이 평화헌법하에서 전수방위와 비핵3원칙을 견지하며 국제사회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한국과 일본은 서로 민주주의와 평화의 가치를 공유하는 관계임을 확인했다. 공동선언 후반부에는 한일 양국이 군축과 대량살상무기 비확산을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확인하고 있어 이때의 평화는 비핵평화의 가치임을 알 수 있다.
1998년 한일 공동선언으로부터 2000년 남북 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 2002년 북·일 정상회담과 평양 공동선언이 발원했다. 이들 세 가지 공동선언은 동북아시아 평화의 세 가지 기초가 되었다. 2018년 4월 판문점선언은 6·15 공동선언을 발전적으로 계승해 1998년에서 2002년으로 이어진 동아시아 평화구축 프로세스를 재개했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이면에서 2018년 한일관계는 위기를 맞이했다. 한국은 전쟁의 위기를 고조시켜온 한반도 정전협정체제를 종식시키려 했고, 일본은 한반도 정전협정체제를 전제로 성립한 동북아시아의 전략적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이것이 한일 사이에 지정학적 전선을 형성했고, 정전과 냉전을 해석하는 역사적 층위가 어긋나면서 상호 불신을 증폭시키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2019년 여름 일본의 수출규제 위기가 고조되는 배경이 됐다.
2019년 8월 2일 한국의 외교 노력과 미국의 중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다. 군사력을 동원하지 않았을 뿐 일방주의 외교의 전형이다. 주장하는 외교에서 행동하는 외교로 나선 것이다. 일본도 ‘전후’와 결별을 선택했다.
이러한 일본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2017년 9월 「제언, 미일동맹을 재구축한다」라는 제목으로 나온 전략보고서가 아베의 대외정책을 가늠하게 한다. 한국과 관련된 그 결론은 충격적이다. 문재인 정부에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이행을 지속적으로 요구할 것이며, 그 때문에 한일관계가 냉각되더라도 상관없다는 것이 하나요, 문재인 정부가 지나치게 대북 화해에 나설 경우 일본이 미국과 함께 견제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의 결론이다. 이번 수출규제를 통한 무역전쟁 도발에 아베 총리와 그 주변이 공유하는 인식이 거칠게 반영돼 있다.
북한 비핵화에서 동북아 비핵평화지대조약으로
이런 일본을 상대로 신한반도체제를 어떻게 구상하고 실천할 것인가? 여기에서 다시 큰 전략과 궁극의 목표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현재의 당면 과제를 풀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미래 구축을 위한 한일협력은 한반도 비핵화 문제에서 일본의 역할을 견인해내는 것을 첫 번째 과제로 설정해볼 수 있다. 북한 핵미사일 개발의 역사적 연원은 1988년 7·7 선언에 있다. 북한에 있어 핵과 미사일은 한소, 한중 국교정상화로 만들어진 불리한 국제환경을 시정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게끔 유도하려면 북·미 협상을 진전시키고 동시에 북·일 국교를 정상화시키는 것이 관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을 건너뛰려는 일본을 상대로 우리는 북·일 사이에 자리를 잡고 이들의 국교정상화를 동북아 평화체제의 공공재로 삼는 노력을 전개해야 한다.
이는 동북아 비핵무기지대조약의 창출이라는, 동아시아 미래 구축을 위한 두 번째 과제로 이어지는 고리가 될 수 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지속가능성은 동아시아에 다자적 안보협력체를 건설하는 것에서 마련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핵 없는 북한’, ‘핵 없는 한반도’, ‘핵 없는 동북아’를 연계해 기회의 상승구조를 창출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동북아에는 비핵무기지대조약을 만들기 위한 기초가 마련돼 있다.
지난해 남북은 판문점선언을 통해 한반도 비핵지대화에 대한 인식을 공유했다. 1998년 한일공동선언에서는 한국이 일본의 비핵3원칙을 평가함으로써 양국은 비핵평화의 가치를 공유했다. 2002년 북·일 공동선언에서는 북한 핵문제를 국제법에 따라 해결한다는 원칙을 공유함으로써 북·일 역시 비핵평화의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세 변의 양자 사이에서 확인된 비핵평화주의를 남·북·일 공동의 인식으로 엮어내는 것으로 동북아시아에 비핵무기지대를 창출해 낼 수 있다. 비핵평화는 아베조차도 쉽게 부인하지 못하는 일본의 국시이며, 일본 시민사회가 가장 중시하는 가치다. 개헌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한 일본에서 반전 비핵평화의 가치를 중심으로 시민사회가 재조직되는 조짐이 보인다. 이들과의 협력을 어떻게 이끌어낼지 고민이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사 청산을 위한 한일협력이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래 최악의 한일관계의 원인은 다름 아닌 ‘1965년 체제’ 그 자체이다. 1965년 체제란 그 해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을 체결해 국교를 정상화했음에도, 이들 조약과 협정에 대한 해석의 불일치 때문에 그 기초가 흔들리던 것을 표현하는 용어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 문제다. 우리 정부는 한일기본조약을 해석할 때 식민지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 데 반해, 일본은 식민지지배가 합법이었다는 해석에 입각해 있다. 그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오랜 교섭 끝에 한국과 일본은 ‘합의할 수 없음에 합의’하는 형태로 이 문제를 접었다. 이후 양국은 역사문제를 둘러싸고 한일관계의 기초가 흔들릴 때마다 이를 관리하는 것으로 문제를 봉합해왔다. 그러나 지난해 대법원판결이 나온 이상 한일관계가 같은 상태로 봉합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제는 봉합이 아니라 근본적인 원인 치료를 할 때가 됐다.
양자주의와 다자주의의 동기화, 역사와 평화의 연동
이제 1965년 조약과 협정에 대한 양국의 해석을 일치시키는 일에 나서야 한다. 1965년 체제의 한계에 주목하면 비관적일 수 있다. 그러나 1965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해온 역사에 주목하면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 희망의 물꼬를 튼 것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조직된 우리 시민사회였다. 민주화의 토대에서 조직화한 시민사회가 우리 정부를 움직여 일본에 문제를 제기했고, 일본의 역사 인식은 조금씩 진보했다. 1993년 고노 담화,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거쳐,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에서 일본은 한국 국민을 구체적으로 지칭해 식민지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표명했다. 그리고 2010년 간 나오토 담화에 이르러서는 식민지지배가 한국 국민의 의사에 반한 것이었음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식민지지배의 불법성을 확인할 논거가 될 만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식민지지배의 불법성을 문서 화해 한국과 일본이 공유하는 일이다.
나아가 이를 징검다리 삼아 북·일이 식민지지배의 불법성을 기본 인식으로 공유한다면, 2002년 북·일 공동선언에서 일본이 약속한 경제협력은 배상의 명목으로 전환돼 북·일 국교정상화의 기초를 이룰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삼자가 이 인식을 공유하고 남·북·일 공동선언으로 엮어 낼 수 있다면 한반도와 일본의 과거사를 총괄해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1998년 한일 공동선언은 1988년 7·7 선언에서 북한을 민족사의 동반자로 재규정한 이래 진행된 한반도 화해와 1993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역사 인식 진전을 배경으로 한 한일 역사 화해라는 두 가지 과정이 겹친 결과였다. 나아가 1998년 한일 공동선언은 같은 해 중·일 파트너십 선언을 이끌어내, 한일, 중·일 공동선언으로 동아시아와 일본의 역사 화해를 이뤘다. 이로써 한·중·일의 협력관계가 확인되어 아세안+3으로 기능할 수 있게 됐다. 1998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은 하노이에서 개최된 아세안+3에서 ‘동아시아 경제협력 비전’을 발표하여, 아세안을 무게추로 한 동아시아 공동체의 길을 열었다. 여기에서 한일, 남북, 북·일의 양자관계 진전과 동아시아 다자주의의 발전이 동아시아 평화와 번영의 기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98년 ‘양자주의’와 ‘다자주의’가 동기화됐다.
1998년 한일 공동선언은 2000년 남북 공동선언과 2002년 북·일 공동선언을 이끌어내는 발원지가 됐다. 이 세 가지 공동선언을 기초로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동아시아는 ‘평화구축으로서의 역사 화해’의 과정을 겪었다. 1998년은 한일 공동성명을 계기로 한일 역사 화해와 동아시아 평화구축의 이중주가 시작된 해다. 그런 의미에서 한일관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국제정치에서도 획기적인 해였다. 1998년 ‘역사’와 ‘평화’가 연동됐다. 북·일 국교정상화는 북·일 공동선언에 각인되어 있듯이 역사 화해의 정신에 기초해서 평화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또한 그것은 남북을 포괄한 한반도와 일본의 역사 화해를 이루고, 이를 남북 평화프로세스에 연결해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구축하는 일이다. 나아가 서울과 평양, 도쿄 등 세 꼭짓점을 잇는 세 가지 양자주의의 복합으로 동북아시아 비핵지대화 조약에 기초한 새로운 다자주의의 신안보질서를 창출하는 출발점이 된다. 그로부터 동북아시아의 ‘두 개의 전후’를 끝내는 길이 열린다.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