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

‘동아시아 51년 체제’의 재편과 한국의 전략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됐다.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 51년 체제’의
재편과 한국의 전략

1951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미국 주도의 연합국과 패전국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서 일본은 국가 지위를 회복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어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체제(The San Francisco System, 이하 ‘동아시아 51년 체제’)를 구축했다. 이러한 동아시아 질서의 메커니즘은 미·일동맹을 중심축으로 역내 국가들 간에 맺은 쌍무적 비대칭 동맹 체제가 핵심이다.

‘동아시아 51년 체제’는 지난 70여 년 동안 역내 평화와 안정의 발판 역할을 담당하면 서 동아시아 질서의 근간으로 작동해왔다. 이후 동아시아 국제정치는 1970년대 미·중·소의 전략적 삼각관계 구축, 냉전 종식 이후 개편된 동아시아 역내 국가들의 외교관계, 북한의 핵정치 등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동아시아 51년 체제’의 근본적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냉전 체제가 해체되는 국제정치 환경의 구조적 변화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질서는 상대적으로 지속성을 유지해왔다. 국제환경의 변화 속에서 ‘동아시아 51년 체제’가 어느 정도 예측성과 안정성을 담보해 온 것은 놀라운 일이다.

새로운 질서 재편의 길로 접어든 동아시아 체제

그러나 최근 동아시아 질서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동아시아 51년 체제’의 구조가 본격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 국제정치적 파장이 커지고 있다. 지난 수 년 동안 미·중 갈등은 간헐적으로 표출되어 왔다. 최근 미국의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파기를 계기로 미·중 갈등은 무역전쟁을 넘어 새로운 군비경쟁으로 확산될 조짐이다. 일본의 잘못된 역사인식에서 발로한 한·일 갈등 역시 또 다른 파장을 뿜어내고 있다. 일본은 대한(對韓) 무역 보복 조치를 단행했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종료를 선언했다. ‘동아시아 51년 체제’의 구조적 변화의 비근한 예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이 구축하고자 했던 한·미·일 삼각안보협력구도를 흔들고 있다. 다른 측면에서는 비록 북·미 협상이 지체 되고는 있지만 비핵화 협상 동력이 작동하면서 협상결과에 따라 북·미관계가 적대적 관계에서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될 가능성도 여전히 관측된다. 전통적으로 동북아 역학구도는 한·미·일 대 북·중·러 혹은 해양세력 대 대륙세력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러한 구도는 지금 중대한 변화를 맞고 있고 ‘동아시아 51년 체제’는 새로운 질서 재편을 향한 변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동아시아 질서는 당분간 그 어느 지역보다도 격랑에 휩싸일 가능성이 높다. ‘동아시아 51년 체제’가 구조적 변화를 겪고 있고 여기서 뿜어 나오는 파장으로 역내 주요 국가들은 대외 정책 방향을 잡기가 매우 힘든 국면이다. ‘동아시아 51년 체제’의 구조적 변화는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국의 등장과 관련 있다. 그 배경과 이유는 명백하다. 21세기 들어서 힘의 전환과 분산화가 한층 가속화하고 있으며, 중국의 부상은 이러한 현상과 맞물려 진행되고 있다. 이는 동아시아 국제정치에 엄청난 파장을 미치면서 연쇄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의 급속한 부상과 강대국화는 어느 나라가 동아시아를 주도하는 국가인지를 불명확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동아시아 질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움직여 왔다. 그러나 중국이 부상함으로써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는 구심력이 약해지고 있다. 즉, 기존 동맹의 결속력이 약화되고 역내 국가들 간 상호불신이 증대한 것이다. 또한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중국의 등장은 동아시아 국제정치에 민감성과 취약성, 탈위계성과 유동성 문제를 부각시키면서 ‘동아시아 51년 체제’의 구조적 변화를 추동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목격할 수 있는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복잡하고 비대칭적인 협력과 갈등의 이중주는 주요 현안 문제에 대한 이해당사국 간의 단순한 입장 차이에 기인하지 않는다. 동아시아 갈등의 파장은 이미 부지불식간에 표출되고 있다. 역내 국가들은 ‘동아시아 51년체제’ 변화 이후 나타날 새로운 질서에서 각자의 국가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유리한 구도를 만들어내기 위해 상이한 전략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동아시아 갈등의 파장은 바로 이러한 국가 전략의 충돌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동아시아 51년 체제’의 변화는 구조적이며 중장기적인 과정을 겪으면서 질서를 흔들 것이다.

동아시아 질서를 둘러싼 각축전

현실주의 국제정치 시각에서 볼 때, 중국의 국가목표는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변경하여 중국 친화적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다. 중국은 국가 전략 차원에서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일대일로(一帶一路)’를 활용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이러한 움직임을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장을 통한 중국판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과 동아시아판 핀란드화(Finlandization)를 구축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미국은 이러한 중국의 국가목표를 좌절시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우방국과 동맹국의 협력을 기반으로 하는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도 이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동아시아 질서 재편을 둘러싼 중국과 미국의 전략적 경쟁은 도전과 응전 전략으로 표출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동아시아 주변 국가들을 자신의 지원세력으로 만들기 위해서 일종의 ‘주변국 견인 정책’을 경쟁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 정책이 지역 안보 딜레마를 확산·심화시키고 역내 국가들에게 해결하기 어려운 전략적 난제를 부과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문제다. 미·중의 주변국 견인 정책은 역내 주변 국가들에 상대방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자국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주변 국가들에 전략적 선택을 강요할 수도 있다.

‘동아시아 51년 체제’의 변화와 미·중의 주변국 견인 정책에 대한 러시아와 일본, 한국의 국가목표와 대응 전략은 상이하다. 러시아는 중국과 전략적 제휴를 강화하고 있다. 2014년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사태로 미국과 유럽연합의 제재를 받고 있고 나토와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러시아는 이를 극복하려는 전략적 입장을 세우며 동시에 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 확장을 기도하고 있다.

지난 9월 24일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 뉴욕 유엔 총회장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

중국이 부상함으로써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는 구심력이 약해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 6월 29일 일본 오사카 G20 정상회의에서 만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연합

일본은 국제협조주의에 입각한 적극적 평화주의를 내세우면서 군사력을 강화하고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변신하는 것을 국가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일본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을 적극 활용하면서도 중국에 대한 명확하고 직접적인 균형 정책은 피하고 있다. 한국은 지난 70여 년 동안 지속되어왔던 남북한의 적대적 상호 경쟁이라는 역사적 악순환을 끊고 남북한 평화공존과 분단 극복을 국가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을 핵심 정책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한국 중심의 확고한 의지와 안보 정체성 필요

한국과 동아시아 주변 국가들의 목표는 ‘동아시아 51년 체제’의 변화와 맞물려 작동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서도 한국이 미·중 주변국 견인 정책으로부터 가장 곤란한 상황에 직면 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구조적으로 분단국가이자 동맹국가이다. 한국의 국가목표와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은 미·중의 주변국 견인 정책에 매우 취약한 구조다. 반면 러시아와 일본은 미·중의 주변국 견인 정책과 국가목표 간의 부조화를 최소화시킬 수 있는 전략적 공간이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다.

그렇다면 한국은 ‘동아시아 51년 체제’의 변화 과정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동시에 미·중의 주변국 견인 정책으로부터 파생하는 전략적 딜레마를 돌파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또 ‘동아시아 51년 체제’의 구조적 변화가 뿜어내는 파장으로부터 국가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떠한 전략을 취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한국이 주체성을 갖고 분단과 동맹이라는 구조적 정체성이 국가목표 달성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즉, 한반도의 운명은 한국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자기결정의 원칙으로 중추의 안보 정체성을 확립해 남북 평화공존의 지속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동아시아 51년 체제’의 구조적 변화의 파장을 극복하기 위한 동맹공조와 국제공조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안보 정체성이 충족된 동맹 강화와 국제공조,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하겠다는 ‘한국 중심’의 확고한 의지 없이는 한국이 미·중의 주변국 견인 정책의 파장으로부터 헤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수형 이수형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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