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과거 담화 계승이 한일관계 복원의 첫 걸음 지난 8월 3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아베규탄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역사왜곡, 경제침략, 평화위협 아베정권 규탄 3차 촛불문화제’에 참가한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 과거 담화 계승이
한일관계 복원의 첫 걸음

“우리 일본인은 세대를 넘어 과거 역사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합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과 거를 계승하고 미래로 넘겨줄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20세기 전시 하에 수많은 여성들의 존엄과 명예가 크게 손상된 과거를 우리 가 슴에 계속 새기겠습니다. 그렇기에 바로 일본은 이런 여성들의 마음에 늘 다가가는 나라가 되려고 합니다.”

“우리는 경제 블록화가 분쟁의 싹을 키운 과거를 우리 가슴에 계속 새기겠습니다. 그렇기에 바로 일본은 어떠한 나라의 자의에도 좌우되지 않는 자유롭고 공정하며 열린 국제경제 시스템을 발전시키고, 개도국 지원을 강화하며, 세계의 더 큰 번영을 견인해 나가겠습니다. 번영이야말로 평화의 초석입니다.”

누구의 이야기일까? 2015년 8월 14일 발표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담화이다. 이 담화에서 아베 총리는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과거 역사에서 한국 침탈과 식민 지배를 의도적으로 제외시켰다. 일본의 책임보다는 경제 블록화를 탓했다. 일본 내부에서조차 한국을 너무 ‘냉대’했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2019년 현재 시점에서 보면, 아베 총리에게 본인이 발표한 담화라도 충실히 이행하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애당초 아베 총리의 담화에서 진전된 역사인식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나마 기대할 것은 자유무역질서를 발전시키겠다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아베 정권은 지난 7월 1일 한국 대법원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로 수출규제 강화를 꺼내 들었다. 일본 경제산업성과 아베 총리는 “한일 간 신뢰 관계가 현저히 훼손되어 적절한 수출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규제 이유로 들었다.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임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한일관계

상대방을 위협하는 ‘경제 무기화’는 치졸한 수법으로 자유무역질서의 토대를 무너트린다. 아베 총리 자신도 담화를 통해 ‘자유롭고 공정한 열린 국제경제시스템을 발전시킨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더 가깝게는 2019년 6월 28~29일 개최된 오사카 G20 정상회의에서 아베 정권이 자유, 공정, 무차별 원칙에 기반을 둔 자유무역을 강조한 것을 뒤집는 것이다. 구체적 증거 제시 없이, 한국이 북한과 밀거래해 첨단물질을 팔아넘긴다는 식의 주장은 유치하다. 자국의 안전 보장을 근거로 화이트리스트(무역 우대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면서 지소미아(GSOMIA, 한일 군사정 보보호협정) 연장을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아베 정권은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이 일제의 강제동원에 기인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재판에서 패소한 일본 기업을 피해자로 인식하고 있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는 다 해결됐으며, 한국 대법원의 판결은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한국 정부에 외교 해법을 제시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된 기막힌 현실이다.

2018년 10월 30일 강제동원 배상 판결이 나자 일본 언론은 이를 모두 1면에 대서특필 했다. 산케이 신문은 “한국 대법원 판결은 국민 정서를 이유로 국제 상식과 법의 틀을 깨려는 도전”이라고 비난했다. 일본 우익은 한국의 과거사 반성 요구를 ‘응석’이라고 폄하하고, 대법원 판결을 ‘반일의 산물’로 치부한다. 미디어는 이러한 오해와 편견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 모든 갈등의 출발점은 바로 식민지배에 대한 인식에 있다. 한일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위한 협상에서도 식민지배에 대한 양국의 역사인식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일본 정부는 일제의 식민지배가 합법적인 것이었고, 조선의 발전에 도움이 됐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발언으로 협상이 중단되기도 했 다. 조약 체결부터 불법이고 무효라는 한국의 주장과, 한국이 독립한 후에 무효가 되었다는 일본의 주장을 ‘이미 무효’라는 단어를 가져와 봉합했다. 서로의 인식 차이를 좁히지 못 한 채 뒤로 미뤄 둔 것이다. 하지만 1965년 한국을 방문한 시이나 에쓰사부로(椎名悦三郎)외상은 “양국 간의 긴 역사 중에 불행한 기간이 있었던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며 깊이 반성한다”고 발언했다. 불법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부당했다는 점은 인정한 것이다.

고노, 무라야마 담화 계승한다면서 일본 정부의 책임은 부정

1980년대로 접어들며 식민지배와 침략에 대한 일본 총리의 사죄와 반성의 발언이 늘어났다. 이를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인 총리담화 형식으로 발표한 사람은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다. 그는 1995년 8월 15일 아래와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우리나라는 머지않은 과거의 한 시기에 국책을 그르쳐서 전쟁의 길을 걸어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리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의해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제국의 사람들에 대하여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저는 미래에 잘못이 다시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이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여기에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심정을 표명합니다.”

2014년 2월 11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오른쪽)가 국회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작품전을 찾아 강일출 할머니와 인사하고 있다. ⓒ연합

총리담화는 내각의 만장일치로 결정된다. 당시 연립정권이었던 무라야마 정권에는 자민당 각료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이들도 모두 담화에 찬성했다. 즉, 무라야마 총리담화는 사회당만의 담화가 아니라 자민당 등 보수파의 의견도 포함한 대표성을 지닌 담화였던 것이다. 이 담화는 국제사회를 향한 일본의 약속이기도 했다. 무라야마 담화 발표 이후 모든 총리들은 이 담화 문구를 인용하거나 계승한다고 표명해 왔다. 역사수정주의자라고 비판받는 아베 총리 역시 공식적으로는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역사인식은 2010년 8월 10일 발표된 민주당의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 담화를 통해 한 단계 더 발전했다. 간 담화는 “3·1 독립운동 등의 격렬한 저항에도 나타나 있듯이 정치적 군사적 배경 아래 당시의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하여 이루어진 식민지 지배에 의해 나라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라고 구체적으로 식민지 피해를 명기했다. 그리고 “저는 스스로의 잘못을 솔직하게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아픔을 준 쪽은 잊기 쉽고, 받은 쪽은 이를 쉽게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러한 식민지 지배가 가져다 준 많은 손해와 고통에 대해 다시 한 번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의 심정을 표명합니다”라고 사죄를 표명했다. 역대 정권의 역사 인식 가운데 가장 진전된 내용이다. 간 담화는 무라야마 담화보다 진전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정권이 단명한 탓에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그 의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아베 총리는 간 담화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을 정도로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아베 총리의 역사 인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간 담화는 국무회의 의결까지 거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이므로 아베 총리가 당연히 계승할 의무가 있음에도,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의 한일관계 주요 문서 가운데 유독 간 담화만 빠져있다.

구체적인 일제 피해를 조사하고 발표한 것으로는 1993년 8월 4일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의 담화가 있다. 고노 관방장관 은 담화를 통해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와 군이 위안소 설치와 관리, ‘위안부’ 모집과 이송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사실과 피해자가 감언·강압 등에 의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를 표명했다. 이후 담화에서 역사적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더 발굴됐다. 하지만 아베 총리를 비롯하여 스가(菅) 관방장관, 고노 다로(河野太.) 전 외무상은 모두 국제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가 성노예가 아니었으며 강제성을 띠는 동원도 없었다고 주장한다.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나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부정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고노 담화와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다고 하면서도 실질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일관계, 기존 담화에서부터 출발해야

아베 정권은 국가 간의 약속은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 간 신뢰에 손상을 입는다는 것이다. 아베 정권 스스로 일본이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지 성찰해 보길 바란다.

아베 총리는 과거 일본 정부가 한 약속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아베 총리가 직접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간 담화’를 모두 인정한다고 밝혀야 한다. 그것이 한일관계를 복원 하는 첫걸음이다. 현재 한일 간 갈등의 근원은 역사인식 문제에 있다. 현재의 상황을 고려하면, 역사 인식의 차이를 당장 좁히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긴 안목으로 양국 간 역사 인식의 차이를 줄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서로의 노력으로 만들어 온 기본적인 역사 인식에서 후퇴해서는 안 된다. 아베 총리에게 새로운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발표된 담화에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고 국제사회에 대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2015년 담화에서 “(일본은) 역사의 교훈을 깊이 가슴에 새겨 보다 나은 미래를 열어 나가며, 아시아 그리고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온 힘을 다할 큰 책임이 있습니다”라고 약속했다. 이제 그 약속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조윤수 조윤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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