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포커스

북한의 미래비전,
과학기술

현재 인류 문명에서 ‘과학기술’은 거의 절대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자연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라는 추상적인 수준을 넘어, 경제활동에서 핵심 요소가 되었고, 일상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힘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 만큼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과학기술을 중심에 놓고 정책과 미래비전을 마련하고 있다.

북한도 역시 마찬가지다. 경제의 효율성을 위해, 또 군사력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과학기술을 중시한다. 그런데 북한과 과학기술을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 낯설어 하는 것을 넘어,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마 북한은 시대에 뒤떨어진 곳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종의 ‘북맹(北盲)’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과학기술 정책을 상당히 중요하게 취급했고 과학기술자들에게 특별한 우대 정책을 펼쳐왔다. 김정은 시대 들어서 과학기술을 특히 강조하게 된 것이 아니라 김일성, 김정일 시대를 관통하는 중요한 정책 중 하나로 과학기술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강력한 경제봉쇄 속에서 자립경제를 지향하는 북한으로서는 과학기술을 통한 경제발전 전략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자본, 인력, 자원 등 생산의 핵심 요소들을 외부로부터 끌어올 수 없는 환경이기 때문에 ‘과학기술을 통한 혁신’은 경제발전 전략에서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해야만 한다. 같은 수준의 생산요소들을 가지고 재화를 더 많이, 더 빨리 생산하기 위해서는 신기술 개발과 효율성 제고 등 과학 기술의 뒷받침이 필수적인 것이다.

터닝포인트는 2017년 11월 화성-15형

김정은 시대에 들어 북한이 과학기술에 좀 더 주목하게 된 까닭은 유례없는 첨단 무기의 시연 때문이기도 하다. 로켓 기술의 평화적 이용이라고 할 수 있는 우주발사체 시험만 하다가 미사일을 직접, 대거 공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미사일 기술의 최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연이어 공개했다. 이 미사일을 자력으로 만들 수 있는 나라가 지구상에 10여 개 정도뿐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 수준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이 기술이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넘어왔을 것이라고 추정하면서 폄하하기도 하는데, 기술력은 누가 개발하였느냐보다 자체적으로 보유하였느냐의 여부가 더 중요한 것이므로 그들의 수준을 순순히 인정해야만 그 다음 단계가 제대로 보일 것이다.

북한의 첨단무기 시연은 2017년 11월 29일에 일단락되었다. 6차에 걸친 핵실험을 통해 핵분열탄을 넘어 수소탄이라고도 불리는 핵융합탄과 이를 운용할 시스템까지 갖춘 상태에서 ‘화성-15형’이라는 이름의 ICBM을 성공적으로 시험 발사했다. 그 직전까지는 미국과 핵단추 논쟁을 벌이면서 군사적 긴장감을 높이다가, 시험 발사 이후 평창올림픽에 참가하는 등 평화 프로세스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2018년 4월 전원회의에서는 2013년에 채택한 ‘경제-핵’ 병진노선을 ‘경제 총력 집중’ 노선으로 변경했다. 그리고 경제 총력 집중 노선의 핵심은 ‘과학기술교육’의 강화로 결정됐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과학기술’은 2017년 11월 핵무력 완성 이전의 ‘과학기술’과 다른 의미를 가진다. 핵무력 완성 이전의 국방 과학기술은 일상생활의 과학기술과 확연히 구분되어 있었는데, 이제 두 영역의 칸막이가 열리면서 국방 관련 과학기술까지 모두 민수영역에서 활용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즉 ‘총력 집중’은 이제 민수/군수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집중하자는 뜻이 됐다.

북한은 첨단 과학기술을 민수로 전환하여 기술혁신을 꾀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9월 9일 평양 거리에 걸린 과학기술 중시 선전화. ⓒ연합

과학기술 통한 경제발전 전략의 핵심, 스핀오프

과학기술에는 좌우 구분이 없다. 민수와 군수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어느 영역에서 먼저 개발되느냐에 대한 법칙은 없지만 현대 문명을 구성하는 첨단기술 중에서 군수용으로 개발되었다가 이후 민수용으로 활용된 경우가 상당히 많다(이를 ‘spinoff’ 혹은 ‘spin-over’라고 한다). 물론 북한도 이러한 발전 전략을 1990년대 후반부터 마련하고 있었다. 극심한 경제난을 벗어난 직후, 무너진 경제를 재건하는 것을 넘어 경제강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전략으로 ‘국방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자는 전략이 ‘선군경제노선’이라는 이름으로 수립되었던 것이다. 국방공업을 앞세워 전쟁의 위험을 방지하고, 동시에 여기서 획득한 첨단 과학기술을 민수(경공업, 농업)로 이전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이 전략에서 ‘화성 -15형’은 핵무력의 완성을 뜻함과 동시에 스핀오프의 본격화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난 9월 3일 국제첨단 기술상품전람회가 평양국제영화 회관에서 개막했다. 전람회에는 최신 과학기술을 도입해 생산한 인공지능제품, 전자, 건재, 경공업제품, 가정용품 등이 출품됐다. ⓒ연합/조선중앙통신

북한의 스핀오프 전략은 단순한 과학기술의 이전만 뜻하는 게 아니다. 군수 영역에서 확보한 고급 과학기술자(인력)와 설비, 자원, 자금 등을 이전하는 것까지 포괄한다. 극심한 경제봉쇄 때문에 생산에 필요한 핵심요소를 외부에서 공급받지 못하던 북한에 스핀오프는 일종의 ‘요소 투입 효과’도 가져올 수 있는 전략이다. 특히 자원의 상당 부분을 국방 부문에서 보유하고 있는 북한의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스핀오프의 효과는 기대 이상이 될 수 있다. 북한이 공개한 예산 편성안을 보면 2000년대 이후 국방비 비중은 15%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공개되지 않은 부분까지 고려하면 군수부문이 최소 30%에서 최대 90%까지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국방 부문에 투입된 역량을 10% 가량 줄여 민수 부문으로 돌리면 최대 역량이 90% 이상 증가하는 효과가 나게 된다. 민간 경제 영역이 거의 2배로 급증하게 되는 셈이다. 화교 자본을 이용한 중국식 모델이나 미국 등 외부 자본을 이용한 베트남식 모델과 다른, 국방 부문의 자본을 이용하는 ‘북한식 모델’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의 핵무력이 최소 조건에서 갖추어진 것은 2006년 즈음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우주 발사체이지만 ICBM을 만들 수 있는 로켓 기술을 보유하였음을 증명한 시기는 ‘광명성 1호’를 시험발사한 1998년이고 핵물질 추출, 가공에 이어 핵탄두까지 만들어 운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 시점이 2006년이었다. 따라서 이즈음부터 ‘스핀오프 정책’이 조금씩 실행됐다고 볼 수 있다. 스핀오프 정책이 대대적으로 공개 시행되기 시작한 것은 2009년부터였다. 6자회담의 결과로 북·미가 합의한 핵무력화 3단계 중 2단계가 2008년까지 진행되었다가 미국의 변심으로 합의를 폐기한 것이 계기였다. 2009년 8월부터 미사일을 비롯한 각종 첨단 기계 제품을 만드는 핵심 기술인 CNC(Computerized Numerical Control)를 앞세워 ‘첨단 돌파 전략’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국방 부문에서 확보한 첨단 기술을 민수로 전환하면서 독자적으로 경제 발전을 추진한다는 선언이었다.

북한의 변화 이끄는 CNC 기술

CNC는 기계제작기술과 IT가 결합한 것으로 생산현장의 현대화, 자동화, 무인화에 필요한 핵심 기술이다. 2009년 이후부터 생산현장이 눈에 띄게 변화하며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부문별로 본보기 공장, 표준 공장들이 통합생산체계를 도입하면서 수작업을 최소화하고 컴퓨터 자동 조종 설비로 교체됐다. 심지어 무인화 공장까지 생겨났다. 이런 변화는 국방 부문과 가까운 기계, 부품, 공구 공장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점차 식료품 공장을 비롯한 생필품 공장까지 번져갔다. 2018년 9월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확인한 북한의 변화는 이런 정책이 10여 년간 집행된 결과였다.

이 당시 변화 중에 군수 부문이 주도하거나 지원한 흔적은 상당히 많다. 그중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시를 내린 사례가 명확하게 2건 확인되었다. 그중 하나는 2015년 처음으로 개최된 ‘군수공업 부문 생활필수품 품평회’이다. 군수공업 부문에서 첨단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기에 생활필수품도 훨씬 잘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김정은 위원장의 직접적인 지시 아래 그 가능성을 점검하기 위해 진행된 행사였다. 품평회는 좋은 평가를 받아 2년마다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올해 9월에 3번째 품평회가 열렸는데, 여기에 출품된 제품들은 미래과학자거리에 있는 창광상점에서 판매된다.

또 다른 사례는 지난 8월 31일 확인된 평안남도 양덕군 온천관광지구 스키장 설비를 군수 공장들이 맡아서 제작한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주요 군수 공장에 스키장에서 쓸 각종 기계설비의 제작을 맡겼다고 직접 이야기 했다. 2014년 개장한 마식령스키장을 만들 때에는 대부분 수입제품으로 설비를 마련했다고 알려졌는데, 당시 북한 기술력이 낮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양덕군 온천관광지구 사례까지 고려해보면, 2014년까지는 기술력보다 군수/민수를 구분하던 정책 때문에 스키 설비를 수입할 수밖에 없었지만 2019년부터는 군수 공장들이 자체 보유 기술력을 가지고 민수제품까지 직접 제작하게 되어 ‘국산화’가 가능해졌다고 평가할 만하다. 기술력보다 칸막이의 문제였던 것이다.

새로운 남북교류협력은 혁신체계 구축과 과학기술 교육 중심으로

역사상 핵무기를 가진 나라는 침략 전쟁을 당한 사례가 없다. 핵무기의 위력이 지구를 통째로 파괴할 수준을 능가하는 것이므로 핵무기를 이용한 전쟁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핵무력 완성 이후 재래식 군비 축소와 민간 이전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흐름이다. 인류 첫 핵무기 제조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예산의 90% 가량은 핵물질 추출 설비를 만드는 데 쓰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미 핵물질 추출 설비를 만드는 수준을 넘어 유지·보수만 하면 되는 상태에 접어든 북한의 입장에서는 핵무력 유지에 드는 비용은 이미 지출되었고 이제는 최소 비용만으로 막대한 국방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총력 집중’은 스핀오프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속화’를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19년 들어서면서 북한 지도부는 경제 총력 집중 전략을 교육부문까지 포괄하는 장기전략으로 계속 강화하고 있다.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한 경제발전 전략, 특히 군수 부문에서 보유하고 있던 첨단 과학기술을 민수로 적극 전환하여 기술혁신을 일으키는 전략을 심화시키고 있다. 현재의 과학기술 인재들만 쓰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인재들이 과학기술 능력을 지니게 한다는 복안이다. 전 국민이 대학 졸업생 수준의 과학기술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는 ‘전민 과학기술인재화’가 목표로 더욱 부각되었다.

최근 북한의 정책 방향은 첨단 과학기술을 이용한 ‘혁신체계 구축’과 ‘과학기술 교육’으로 향하고 있다. 이제 타국의 인도적 지원이나 자국의 노동력 위주의 경제활동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남북 교류협력도 이전과 달라져야 한다. 고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주도 산업’이나 정치적 부담이 적은 ‘과학기술 교육’이 중심에 놓여야 한다. 그래야 교류협력을 통해 남북이 서로의 미래비전까지 공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강호제 강호제
북한과학기술 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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