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여성, 민간인 최초로 분단선을 넘다
1991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에 남한과 북한, 일본의 여성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1990년 8월 15일 도쿄에서 개최된 ‘평화회의’에 참석한 당시 교회여성연합회 이우정 대표가 남북여성교류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일본부인회 시미즈 스미꼬 회장이 일본을 방문한 북한 대표에게 교류를 제안하여 성사된 것이다. 이후 2차 회의는 서울, 3차 회의는 평양, 4차 회의는 도쿄에서 진행되었고, 남북한 여성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만남을 가졌다.
최초의 남북여성교류였던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는 이후 남북여성교류를 추진하는 기반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토론회 이후 남한에서는 ‘(사)평화를만드는여성회’를 창립하여 남북여성교류를 지속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여성평화운동을 활성화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아세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는 분단 이래 남북한 여성이 최초로 교류를 가졌다는 점뿐만 아니라 최초로 남북 민간인이 서로의 땅을 밟았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또한 당시 상황에서 제3국의 도움이 불가피했을지라도, 여성의 국제적 연대를 통해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초국가적 여성평화운동의 성격을 띤다.
남북여성교류가 본격화된 것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였다. 민간단체들이 남북한 공동행사를 추진해 개최하기 시작했고, 여성들도 부문별 상봉모임이나 여성들만의 자체 행사를 추진했다. 2001년부터는 민족공동행사추진본부 내에 여성위원회를 구성했고, 남북민족공동행사에 참여한 여성대표들이 부문별 모임에서 만남을 가졌다. 2002년에는 금강산에서 3박 4일 동안 남북한 여성의 독자적 행사가 ‘남북여성통일대회’라는 이름으로 처음 이루어졌다. 2005년에는 평양에서 4박 5일 간 ‘남북여성통일행사’를 진행했고, 2006년부터 2008년까지 6·15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남북여성대표자회의가 개최됐다. 본격화된 남북여성 연대와 공동행동남북여성교류에서 중요한 의제 중 하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였다. 이는 남북교류 및 국제적 차원에서여성들의 연대와 공동 행동을 이룬 의제이기도 하다. 2000년대 들어 시작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국제적 움직임에 북한 여성들도 동참했기 때문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전시 성폭력의 문제로 남북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의 폭력 피해 여성과의 연대가 중요한 사안이었고 남북여성들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2007년 제8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아시아연대회의 ⓒ연합
2007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8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아시아 연대회의에는 북한 대표단이 참가해 남한 여성과 함께 대일공동성명서를 채택했다. 그러나 2010년 5·24 조치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며 만남과 교류는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2007년 이후 6년 만인 2013년에야 중국 선양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실무대표단 회의가 개최되며 남북여성의 만남이 재개됐다. 2014년 3월에는 중국 선양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해외여성토론회가 개최됐고, 2015년 12월에는 개성에서 남북여성공동문화행사를 개최하여 남북한 여성 100여 명이 만남을 가졌다.
이와 함께 남북여성 간 학술교류도 추진됐다. 중국 연변 지역을 중심으로 남북한 여성 연구자들이 학술회의를 개최한 것이다. 2000년 처음으로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과 연변대 여성연구중심, 김일성종합대학의 여성교수들이 모인 학술회의가 개최됐다. 이 학술회의는 2002년, 2007년, 2014년, 2015년까지 이어지다 남북관계가 악화되며 잠시 중단되었다가, 올해 9월 다시 한국여성정책연구원과 연변대 여성연구중심, 김일성종합대학 여성 연구자들이 두만강포럼 여성분과 회의에서 함께 모였다.
2005년 평양 묘향산에서 열린 남북여성통일행사에 참가한 남측 대표들
민간 차원에서 이뤄지는 여성교류는 한반도 평화정착 과정에서 여성의 역할을 제고하고 여성교류의 필요성을 확인하는 데 기여했다는 의의가 있다. 하지만 남북여성교류는 다른 사회문화교류와 마찬가지로 남북관계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다양한 의제와 주체 간 교류가 추진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남북여성교류, 새로운 국면 맞다 2018년 4·27 판문점선언으로 남북여성교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우선 과거 남북여성이 교류하던 경험과 역사를 복원하고 재추진하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10·4 선언 1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회’, ‘판문점선언과 9월 평양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민화협연대 및 상봉대회’, ‘남북선언 이행을 위한 2019년 새해맞이연대모임’ 등에 여성계가 참석하여 여성 부문 모임을 구성하거나 ‘2019 새해맞이 남북여성연대모임’을 개최했고, 앞으로의 남북여성교류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남측은 ‘민족의 화해와 단합,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해외여성대회(가칭)’ 평양 개최, 남북여성교류의 정례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과 올바른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해외여성토론회 평양 개최를 제안했다.
2005년 평양 묘향산에서 열린 남북여성통일행사에 참가한 남측 대표들
과거 남북여성교류를 추진해왔던 남북 여성 중심으로 다시 본격적인 남북여성교류를 준비하는 것과 함께, 남한 사회에서는 새로운 세대의 여성들이 한반도 평화에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8년 6월 남북여성교류 추진 및 한반도 평화 과정에서 성평등 실현을 위한 실천을 해나갈 여성들의 협의체로 ‘여성평화네트워크’가 발족했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의 여성분과 역시 여성교류를 활성화하고 한반도 평화경제 실현 과정에서 여성의 역할을 제고하기 위한 노력을 다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여성들의 움직임은 한반도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국제적 차원으로도 확장되고 있다. UN 차원에서, 또 국제여성평화운동 차원에서 남북여성 간 만남의 자리를 만들고 여성평화운동네트워크를 조직하여 한반도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해 여성들이 힘을 모으고 있다. 이처럼 여성들은 국내에서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여성들의 노력과 실천을 대중화, 담론화하고 국제적으로는 민간 공공외교의 창구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2014년 일본군 성노예 문제해결을 위한 남북해외여성 토론회
한반도 평화를 위한 남북여성교류의 과제
남북여성교류는 여성의 입장에서 한반도 평화를 만들어가기 위한 실천이면서 한반도에서 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동안 남북교류협력 과정에서 여성의 참여를 제고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다면, 이제는 그와 더불어 성평등 의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어야 할 때이다. 여성 참여도 성평등 실현에서 중요한 과제이지만, 이제는 남북여성교류의 의제나 접근에서 성평등에 대한 적극적인 고민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남북여성교류를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어야 한다. 남북여성교류를 추진하기 위해 남북한 여성 당국자 간 회담을 추진하고, 여성교류 추진을 위한 기구를 설치 해야 한다. 그리고 당국자 간 협의를 통해 ‘남북한 여성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칭)를 체결하여 남북여성교류를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남북여성교류 추진 주체를 다양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민간 차원의교류는 확대하고, 다양한 세대가 함께할 수 있도록 여성교류의 형식과 내용을 고민해야 한다. 또한 정부나 국회 차원의 여성 참여가 이뤄질 수 있도록 여성 정치인 간 교류, 여성 당국자 간 회담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방안을 탐색해야 한다.
2015년 12월 개성에서 열린 남북여성들의 모임
이와 함께 최근 남북한 사회에서 현안이 되고 있는 주요 성평등 의제를 교류의 내용으로 삼으면서 남북한의 사회 격차를 줄여나가는 것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남북여성의 노동, 건강, 저출생 등과 같은 현안에 대한 공동조사를 추진하거나 남북여성경제인 간 교류 협력 및 북한여성의 경제적 역량 강화를 위한 사업 추진을 고려해볼 만하다. 그리고 여성·평화·안보 의제와 관련하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지속적으로 협력하고, UN안보리결의안 1325호 국가행동계획 수립에 대해 남북여성이 소통해야 한다.
남북여성교류와 한반도 성평등 실현은 남북한 사회에 현존하고 있는 차별과 폭력을 해소하는 것과 연동되어야 가능하다. 남북여성교류의 역사적·경험적 성과를 이어받으면서 앞으로는 더욱 적극적으로 여성주의적, 평화주의적 의제를 발굴하고 실천함으로써 남북한 여성의 연대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남북한 사회와 그 구성원 모두가 평등하고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어나가기를 기대한다.
2019년 2월 2019 새해맞이 연대모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