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꿈꾸다 │ 또 다른 시선

영화 통해 이산가족의 아픔, 세계인들에게 알리고 싶어 영화 ‘Steh Auf’감독 정승현

독일 아헨(Aachen)에서 태어나고 자란 당시15세 한인교포 소년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동독에서 차와 사람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고, 서독인들은 손을 흔들거나 울고 얼싸안으며 서로를 반겼다. 마치 ‘농담’처럼 믿겨지지 않았던 이 장면은 오래도록 그의 기억속에 남아있었다. 24년 뒤, 잠시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이산가족 상봉장면을 TV에서 보고, 다시 한 번 큰 충격을 받았다. 까까머리 소년이던 형제가 60~70년 만에 백발이 되어 재회하는 모습에서 격한 감동이 밀려왔다. 실향민이자 이산가족의 한을 품은 채, 1년 전 작고하신 할아버지의 삶이 갑자기 그의 안으로 들어왔다.

단편영화 ‘Steh Auf’로 주목받은 김나지움 교사

‘Steh Auf’감독 정승현 정승현 감독을 처음 본 건 문화예술인들에게 후원인을 찾아주는 소셜펀딩 플랫폼 ‘펀딩21’에서였다. ‘펀딩21’의 소개 영상에서, 그는 이산가족을 주제로 한 영화 ‘가족’을 촬영하게 된 이유를 영어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 전에 정승현 감독은 단편영화 ‘일어나(Steh Auf!)’의 감독으로 국내외에 얼굴을 알렸다. 이 영화는 한국 미장센 단편영화제에서 상영됐으며, 독일, 터키, 미국,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다수의 영화제 본선에 오르거나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독일교포 2세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담은 이 영화에서 그는 작가와 감독, 배우 등 1인 3역을 맡았다.

‘Steh Auf’감독 정승현 정승현 감독의 직업은 교사다. 쾰른대학을 졸업한 뒤 독일 레어암트 과정 및 국가시험을 통해 공무원자격을 지닌 교사가 됐고, 뒤셀도르프의 김나지움에 재직중이다. 교사가 되기 전 1999년 한국에 들어와 2년간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에 다녔으며, ‘고양이를 부탁해’, ‘닌자 어쎄신’, ‘클라우드 아틀라스’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 2년간 독일 직장을 휴직하고 국내 한 국제고등학교에서 체육, 종교, 라틴어 등을 가르치면서, 단편영화 ‘가족’ 촬영을 준비하고 있다. 오는 11월에 있을 그의 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 마침 가족들 모두 한국에 와 있어, 정승현 감독, 아버지 정부남 씨(파독 광부)를 함께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Steh Auf’감독 정승현

'상봉' 못하고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가족' 영화 기획

정승현 감독은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보면서, 2년 전 잠시 한국에 들어왔을 때 할아버지와 나눈 대화들이 떠올랐다고 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와 나눈 긴 대화였다.
“할아버지 가족도 이북에 계시는데 결국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만약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고, 상봉행사에 초청됐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재회 직전 마지막 며칠을 어떤 기분으로 보내셨을까? 헤어진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 그 가방 안엔 어떤 선물을 준비하셨을까? 등의 질문에 대한 답을 영화에 담고 싶었어요.
외국에서는 이산가족 문제를 잘 모르거든요. 영화로 만든다면 다른 나라 사람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Steh Auf’감독 정승현

펀딩21에서 볼 수 있었던 소개 영상은 당시 할아버지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서 그냥 녹화해둔 필름이라고 한다. 할아버지는 끝내 이북의 가족들과 재회하지 못하고 2년 전 96세에 돌아가셨다.
정승현 감독의 할아버지는 지금 세상에 안계시지만, 영화 속 할아버지는 여전히 가족을 기다린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기운 없이 지내시다가 어릴 적 감자밭에서 헤어진 형과 상봉할 수 있다는 편지를 받은 뒤부터, 생활에 활기가 넘치기 시작했다. 기대에 부풀어 상봉을 기다리는 동안,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들과도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북의 가족에게 줄 선물도 준비한다. 꿈만 같던 상봉 당일…. 스토리 전부를 공개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정 감독은 새드 엔딩을 준비하고 있는 듯 했다.

영화를 위해 정승현 감독은 지난 2월, 속초에 가서 가족을 상봉하는 어르신들을 만나 인터뷰도 하고 현장분위기도 취재했다. 시나리오는 어느 정도 완성됐고, 11월부터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다.

“펀딩21의 목표 금액은 채우지 못했지만, 회사나 단체, 개인적으로도 후원하실 수 있어요. 영화가 완성되면 ‘일어나(Steh Auf!)’처럼 여러 외국영화제 등에 출품해보려고 해요.”

“통일 이루려면 어느 정도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정승현 감독과 그의 아버지 정부남 씨가 기억하는 독일의 통일 이야기도 들었다. 정부남 씨는 “당시 서독은 돈도 많고 경제가 발전해 있었으니까, 억눌려있던 동독 주민들이 통일되자마자 그냥 막 물밀듯이 왔다”며 “독일은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다”고 말했다. ‘한국도 독일처럼 통일을 이룰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이북 주민들은 남한의 경제가 발전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까… 3대 동안 그렇게 군인들이 꽉 잡고 있으니까…”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4살 때 아버지의 무등을 타고 남한으로 피란을 왔다.

‘Steh Auf’감독 정승현 정승현 감독은 15년 동안 독일이 분단된 나라라고 알고 자랐기 때문에 처음에는 통일이 됐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나중에 대학에서 동독 친구들을 만나게 됐고 그들이 동독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듣고 난 뒤에야 비로소 통일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서는 비슷하지만, 환경이 다른 곳에서 살았으니까 이질감이 느껴지더라고요. 편견 같은 것도 남아있고요. 여기에 오신 분들(북한이탈주민)과도 비슷한 것 같아요. 겉모습은 남한 사람들과 비슷한데 말투 등은 차이가 있잖아요.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금방 익숙해졌어요.”

아버지 정부남 아버지 정부남 씨는 요즘 남한의 젊은 사람들이 전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북한에 대해 관심도 없으며, 완전히 딴 나라처럼 얘기하는 것이 속상하단다.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해요. 이산가족 어르신들이 점차 없어지니까 마음도 안 좋아요. 통일이 되려면 어느 정도 희생과 지식,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한국문화 VS 독일문화 이렇게 달라요

1년 뒤, 정승현 감독은 다시 독일 학교로 복귀해야 한다. 1999년부터 2년여간, 그리고 지난 1년간 한국에서 머물며 경험한 한국사람, 한국문화에 대한 느낌을 물어봤다.
“첨엔 학생 때 왔으니까 밤늦게 놀 수 있고 먹거리도 많아서 좋았어요. 독일 가게는 대부분 문을 일찍 닫거든요. 그런데 좀 복잡하다는 생각도 했어요. 같은 서울이라도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면 한 시간 이상 가야하는 데다, 전철 안도 빽빽하고… 아주머니들이 지하철문만 열리면 막 달려서 재빨리 빈자리에 앉는 것도 재미있었고요.”
다만 번데기와 산낙지도 먹는 식습관에는 ‘기겁(?)’을 했고, 지금은 거의 없지만 당시 택시 승차거부와 합승, 바가지 등은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다.

‘Steh Auf’감독 정승현 무엇보다 한국에서는 독일과 달리 ‘정감’ 같은 게 ‘물씬’ 느껴진다고 했다.
“정서적으로 독일은 딱 자르는 게 있어요. 좋게 말하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데 좀 이기적이고 냉정하다는 느낌이 들지요. 한국친구들은 잘 챙겨주고 다정다감해요.”
아버지 정부남 씨는 거꾸로 한국인이 느끼는 독일 문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느 날 독일에서 지인들과 함께 술집을 갔는데 맥주 한 잔, 생수 한 통도 각자 먹은 만큼 계산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정은 좀 없지만 각자 내니까 ‘부담은 없어 좋더라’며 웃었다.

정승현 감독은 전작 ‘일어나(Steh Auf!)’에서 보여준 것처럼 태어난 곳도, 자라난 곳도 독일이지만 간혹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교포2세들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고 했다. 이런 혼란이 올 때 자신을 받쳐주는 것은 바로 자신감이고, 그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는 스스로 실력을 쌓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 “교포2세로서 자신의 뿌리인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알고 한국어를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한 것 같다”고 했다.

그의 두 번째 단편영화 ‘가족’이 하루빨리 완성돼, 남북분단의 아픔과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 해외에 두루 알리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 서울 가톨릭영화제에서 10월 30일과 11월 2일에 그의 영화 ‘Steh Auf’가 상영될 예정이다.

<글/사진. 기자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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