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대북정책의 상대이자 통일정책의 대상이다. 이러한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불신구조를 신뢰구조로 전환하고 대북정책과 통일정책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보장해야 한다. 남북관계 구조전환의 과정에서 일방성은 금물이다. 오히려 불신구조를 고착시킬 뿐이다. 쌍방이 자주 만나 진정성있는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공통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점차 신뢰가 축적된다. 만남과 대화는 남북한 신뢰형성의 필수조건인 셈이다. 문제는 만났으나 진솔한 대화가 없고 대화를 했으나 기약이 없고 약속은 했으나 지켜지지 않는 현상들이 남북관계 역사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는 점이다. 만남→대화→약속→이행의 사이클이 악순환하고 파행→답보→교착→역행의 사이클이 선순환하는 역설이다. 여러 전문가들은 이러한 문제점의 원인을 남북관계에서 대화와 합의 이행 제도화의 미흡에서 찾는다.
제도화는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갖는다. 첫째, 상대방의 태도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증진시킨다. 상대방이 약속된 규칙(제도)이 정한대로 행동할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해진다. 둘째, 예측 가능성의 증진은 쌍방 간의 신뢰성을 확장시킨다. 상대방에 대한 오해와 오판으로 인한 관계의 파행을 막게 된다. 셋째, 신뢰성의 확장은 관계의 지속성을 보장한다. 신뢰가 관계진전의 관성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역시 제도화를 통한 신뢰구축을 지향하고 있다.
관계의 퇴행과 가역성이 상존하는 불신구조 속에서 비정부 차원의 대화보다는 책임있는 당국자간의 대화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당국자간의 대화가 사안에 따라 단발로 끝날 것이 아니라 지속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당국자간 대화의 제도화는 순조로운 합의 이행과 직결된다. 합의 도출에 이르더라도 합의가 불이행될 경우 대화가 단절된다. 10.4선언이 그랬고 북·미간 2.29합의가 그랬다. 반면, 합의 이행이 순조로울 경우, 대화는 탄력을 받는다. 관계 진전에 따라 새로운 합의가 필요한 사업들이 추가되기 때문이다. 6.15선언과 9.19 공동성명 초기이행단계(2.13합의)가 그랬다.
지난 10월초 김정은 정권의 핵심실세 3명이 인천을 다녀가면서 2차 남북고위급접촉 개최를 약속하였다. 지난 8월 11일 남북고위급접촉 남측 수석대표 명의의 접촉 제의에 대한 화답이었다. 후속조치로 남측은 10월 30일 고위급접촉 개최를 제의(10.13)했으나 북측이 전단지 살포 중단을 중심으로 하는 남측의 태도변화(전단지 살포 중단)와 연계하고 있어 사실상 무산된 셈이다. 이런 상황과 조건에서 남북관계의 제도화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약속과 이행의 중간 사이에 다양한 파행 변수들과 요인들이 상시적으로 존재하고 돌발적으로 등장한다. 고위급회담의 정례화와 같은 남북관계의 제도화는 바로 이러한 파행 변수들과 요인들을 통제함으로써 남북관계를 예측 가능하고 신뢰할 만하며 지속 가능한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첩경이다. 아울러 고위급회담의 정례화와 같은 만남과 대화의 제도화는 그 자체로서 의미도 심장하지만 순조로운 합의 이행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합의 이행 자체가 새로운 대화의 필요성을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동시에 정례적으로 만나 대화를 하다보면 신뢰가 쌓이고 오해를 줄이며 상대방의 애로를 이해하게 되어 결국 합의 이행의 장애물들을 치우는 데 도움이 된다.
남북관계 제도화는 대북정책만이 아니라 통일정책 측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우선 대북정책을 통해 축적된 남북관계 제도화는 향후 제도적 차원에서의 통일기반 구축에 기여할 것이 확실하다. 예를 들어, 고위급회담 정례화는 남북연합단계에서 남북정상회담, 남북총리회담, 그리고 남북국회회담 정례화의 단초가 될 것이다. 다음으로 남북관계 제도화는 통일비용 감소효과를 창출할 것이다. 특히, 통일 과정과 통일 이후에 국내외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거래비용을 감소시킬 것이다. 예컨대, 남북관계발전기본법과 같은 법제 정비는 통일과정에서 한국의 당사자 지위 인정 논란이 벌어질 경우 우리에게 유리한 근거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금년 1월 6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통일대박론을 밝혔다. 통일은 한반도 경제의 대도약 기회임을 천명함으로써 통일비용에 대한 국민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하였다. 이어서 박 대통령은 3월 28일 통일대박론의 초기 이행조치로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구상’(드레스덴 구상)을 밝혔다. 그리고 박 대통령의 통일구상을 실현하고 뒷받침할 목적으로 통일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발족하였다. 박 대통령의 통일 구상은 남북관계의 정상적 개선 및 진전과 함께 실천할 수 있다. 이러한 실천의 방향이 남북관계 제도화에 맞춰지고, 그것이 통일기반 조성의 밑거름이 되길 기대해 본다.
<사진제공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