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윤석열 정부 통일·대북정책 중점 추진과제 분석
상호 존중에 기반한 남북관계 정상화
비난 자제, 남북 모두에 이익 되는
협력 사업 개발 필요
윤석열 정부 통일·대북정책 비전은 ‘비핵·평화·번영의 한반도’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두 번째 중점 추진과제 ‘상호 존중에 기반한 남북관계 정상화’에 대해 집중 분석했다.
19세기 영국 정치가 파머스턴 경은 국제관계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30년 전쟁 이후 형성된 이른바 베스트팔렌 체제의 특성을 설명한 것이다.
종교나 제국이 정당성의 근원이던 30년 전쟁 이전의 질서와 다른 베스트팔렌 체제의 특징은 주권 평등과 내정불간섭의 원칙 아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세력균형은 베스트팔렌 조약이후 근대 유럽 질서를 구축하는 원칙이 됐는데, 진정한 세력균형이 가능하려면 언제든 적과 동지를 바꿀 수 있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파머스턴 경의 언급은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이후 유럽 국제질서를 압축해 보여준다. 이후 수백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이 조약의 원칙은 국가들의 사회 즉 국제사회를 만들었고, 파머스턴 경의 언급은 여전히 유효한 측면이 있다.
‘최대 위협’이자 ‘같은 민족’인 남북관계의 특수성
그렇다면 남북관계는 어떤가? 남북관계는 일반적 국제관계와 공통점과 차이점이 병존한다. 우선 남북한은 서로 상대 존재를 부인하며 탄생했다. 그 결과 남북한은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문제는
6·25전쟁이 일방의 승리로 끝나지 않고 정전(停戰)으로 마무리됐다는 점이다. 전쟁은 남북 모두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는데, 서로에 대한 공포와 분노, 불신 등이 그것이다. 이 상처는
21세기에 접어든 현재까지도 치유되지 않은 게 현실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남북 간에 화해·협력 분위기가 형성됐다가도 쉽사리 적대적 관계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인다. 법적으로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라는 한반도의 구조적 속성이 여전히 작용하는 것이다. 여기에 전쟁이 종결되는 과정에서 생성된 정전체제가 여전히 한반도 질서를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이 정전체제가 냉전의
유산이며, 그 결과 한반도에는 냉전적 갈등 요소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또한 남북한의 서로에 대한 인식 역시 이중적이다. 남한 입장에서 보면 북한은 안보의 최대 위협이자 같은 민족이다. 1991년 체결한 남북기본합의서에서 남북한은 서로의 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 관계’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기본합의서 체결 직전 남북한은 각각 유엔에 가입해 별개의 유엔 회원국이 됐다. 즉, 남북은
국제사회에서 별개의 국가이면서 서로 통일을 지향하는 국가라고 선언한 셈이다. 이와 같은 남북관계의 복합적 속성을 고려할 때, 남북관계를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헌법에 명기한 ‘평화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우호적 측면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2018년 대화 국면에서 북측 대표단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동생이라는 신분에서부터 사업 실무자로서의 역할까지
모든 것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며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한반도 상황이 경색되면서 김여정 부부장의 담화가 거칠어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한때 자신의 협상 파트너였던 남측을 향해 욕설에 가까운 표현을 쏟아내는 것이 일상이 됐다. 고약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때 미국과 북한 최고지도자 간에도 험악한 표현을 담은 이른바 말 폭탄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또 북한 담화의 표현 수위가 높은 것은 오래된 일이니, 이 같은 일이 새롭지는 않다. 하지만
거친 언사는 불필요하게 상대방을 자극하고 부정적 감정이 쌓이게 만든다.
남북 간 부침의 역사에서 말 폭탄보다 더 큰 문제는 합의의 신뢰성 부재다. 남북 간에 그동안 수많은 합의서가 만들어졌다. 남북 정상도 수차례 정상회담과 합의를 했다. 물론 이 가운데
상당수가 이행됐지만, 이행되지 않은 것도 많은 게 사실이다.
2018년 2월 평창 겨울올림픽 당시 한국을 방문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왼쪽)이 이희범 평창올림픽 조직위원장과 악수를 나누는 모습.
이후 한반도 상황이 경색되면서 김여정 부부장은 남쪽을 향해 거친 담화를 쏟아내고 있다. (뉴스1)
물론 국가 간 합의가 항상 이행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합의는 깨지기도 하고, 그 이행을 강제할 수단이 없는 것이 국제사회이기도 하다. 하지만 합의는 약속이고, 약속의 이행은 신뢰의
시작이다. 신뢰는 관계의 반복 속에서 만들어지는데, 약속이 이행되지 않는 관계가 반복된다면 신뢰는 생길 수 없다.
2023년 한반도 정세는 매우 긴장돼 있고, 상호 존중이나 신뢰 관계라고 보기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6차 전원회의에서 북한은 남한을 ‘명백한 적’으로
규정했으며, 남한 역시 새롭게 발간된 국방백서에서 북한을 상대로 ‘주적’이라는 표현을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남북한 정부 공식문서에서 서로를 적으로 규정한 셈이다. 한때 관계가 개선돼도
쉽사리 적대적 관계로 회귀하는 남북관계의 근본적 한계를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격화된 남북관계를 상호 존중의 관계로 변화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앞서 언급한대로 상대에 대한 비난을 중단하고 기존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정치군사적 긴장관계를 초래하고 악화시키고 있는 좀 더 근본적인 요인의 완화다. 이것은 분단 이후 수십 년간 해결하지 못한 어려운 과제임이
분명하다. 특히 핵무기를 포함한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현실화한 국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다층복합적 남북관계 추진 전략
우선은 한·미·일 vs 북·중·러 갈등 구조가 고착화되지 않도록 관리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현재의 국제관계를 이른바 신냉전이라고 규정하고, 북·중 및 북·러관계 강화를 통해 미국과
국제사회의 압력을 극복하려 시도하고 있다. 북핵으로 상징되는 한반도 문제의 국제적 속성상, 국제적 갈등 구조가 남북 갈등과 겹치면 갈등을 크게 증폭시키는 요인이 된다. 따라서 한반도
주변에 냉전적 갈등 구조가 심화하지 않도록 관리할 필요가 있다.
냉전 시기와 달리 현재 한국은 중국, 러시아와 수교한 국가다. 한·중 및 한·러 간에는 막대한 교역을 비롯해 상당히 상호의존적인 관계가 형성돼 있다. 그렇다면 과거와 달리 크게 성장한
한국의 국력과 외교적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북한의 이른바 ‘신냉전 활용론’을 약화시킬 수 있다면, 이는 북한의 전략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첫
단추가 될 것이다. 물론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중국과 러시아가 한반도 문제에 있어 중립적일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라도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서 북한이 보기에 한국의
국제적 무게가 느껴져야 할 것이다.
또 남북관계에 있어서는 핵문제 외 다른 영역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검토하고 준비할 필요가 있다. 핵문제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문제 해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기간 동안 남북관계를 관리할 전략이 있어야 한다. 핵문제의 정책적 우선순위를 낮추라는 것이 아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이슈와 주체를 포괄하는 다층복합적 남북관계 관리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3월 26일 주민들이 봄을 맞아 파종하는 모습을 소개했다.
한반도에 정치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농업, 환경, 보건 등 정치 외 분야 협력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정치군사적 긴장이 고조된 국면에서 정부가 직접 나서기 어렵다면 민간단체나 NGO, 국제기구 등 비정부주체를 활용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선 집중해야 하는 영역은 남북 간
기존 합의와 관련된 부문이 돼야 할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기존 약속을 이행하는 것은 상호 신뢰 구축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아직 북한은 환경, 보건 등에서의 협력을 ‘비본질적’이라고 무시하지만, 만성적 식량부족 국가이자 자연재해 취약국가인 북한의 특성상 이러한 문제를 마냥 비본질적인 것으로 남겨두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남북 모두에 이익이 되는 영역에서의 남북협력 사업을 적극 개발해야 한다. 남북 간에 존재하는 현실적 국력 격차를 고려할 때, 향후에도 한동안 남측이 북측을 돕고 지원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일방적 지원만으로는 우리 국민의 지지와 사업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특히 남북관계 같이 쉽사리 갈등 국면으로 후퇴하는 속성을 가진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매번은 아니어도 때때로 남측 주민들도 남북관계에서 이익이 발생한다는 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과거 접경지역에서 실시했던 공동방역·방제 사업 등이 대표적 사례다. 국경을 넘어
영향을 미치는 초국경 질병이나 병충해에 대한 대처는 양국의 협력이 필수적이며, 그 결과는 양국 모두에 이익이 된다. 이와 같은 사업 영역을 정책적으로 발굴해 적극 추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작더라도 공동의 이익 영역을 개척하고, 그러한 영역에서 성공적 협력의 경험을 축적해나가야 한다. 그러한 성공의 경험이 쌓여서 미래에 대한 긍정적 기대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좀
더 용이하게 상호 존중 관계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상대방에 대한 거친 표현이나 불필요한 비난 메시지를 자제하는 것은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다. 특히 북한이 발표하는 담화의 감정적 표현을 완화하는 문제는 북한 체제의 개방성 증대와
관련이 있다. 국가가 공식 발표하는 성명, 담화의 격이 국격을 의미한다는 것을 북한 당국자들이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와 관련해 쉬운 일이 없지만, 이 역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최 용 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