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평화
남북 출신 예술인이 함께 만든 연극 ‘벤 다이어그램’
북한 여자와 남한 남자의
별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찬 바람이 매섭게 불던 지난해 11월, 남남북녀의 혁명적인 동거 전투기를 담은 연극 ‘벤 다이어그램’이 서울 대학로 무대에 올랐다. 필자가 대표인 남북한 출신 전문예술인 집단 ‘문화잇수다’가 기획한 이 작품은, 북한에서 온 여자 수련이 평범한 남한 남자 도하를 만나 사랑을 나누며 발생하는 해프닝을 그렸다. 통일부 남북하나재단과 남북통합문화센터의 통합문화콘텐츠 창작지원 공모 선정작이다.
수제비를 좋아하는 수련, 크루아상을 좋아하는 도하
수련과 도하는 스물한 살 때 만나 사귀다 가슴 아프게 헤어진 뒤 15년 만에 재회한 사이다. 서로를 향한 사랑이 변함없음을 깨닫고 함께 여행을 다녀온 두 사람은 일사천리 동거를 시작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거대한 이데올로기 아래서 각각 자란 이들의 동거가 평탄할 리 없다.
도하는 자신이 선물한 명품 가방에 시래기를 주워 담는 수련을 이해할 수 없다. 수련은 어떤 문제든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도하를 이해하지 못한다. 북한 핵실험 뉴스가 나올 때마다 도하는 남한의 군사력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신나서 떠들고, 수련은 북한에 있는 가족을 걱정하며 홀로 두려움에 떤다.
그럼에도 두 사람을 이어주는 요소가 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어린 시절 먹던 음식에 대한 추억이다. 도하는 엄마가 해주던 크루아상을, 수련은 엄마가 해주던 수제비를 그리워한다. 언제든 엄마를 만나러 갈 수 있는 도하는, 자신과 달리 북한에 두고 온 엄마를 만나지 못하는 수련에 대해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수련 몰래 브로커와 접촉하는 등, 수련 엄마를 찾아주려 백방으로 노력하기도 한다.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씩 받아들이며, 이제는 도하가 수련보다 북한 말을 더 잘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수련은 일찍 퇴근해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게 되고, 도하를 깜짝 놀라게 하려고 몰래 숨어 있다 우연히 도하와 브로커가 통화하는 내용을 엿듣는다. 브로커는 수련의 어머니가 얼마 전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도하는 충격에 숨을 고르다 수련을 발견하고, 수련은 슬픔을 억누르며 기쁜 얼굴로 임신 테스트기를 도하에게 건넨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는 사이 무대 조명이 꺼지고, 잠시 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뱃속 아기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며 연극은 끝난다.
너와 나의 교집합 ‘벤 다이어그램’
벤 다이어그램은 서로 다른 속성을 가진 두 그룹의 공통 부분을 표시하는 도식이다. 필자는 극작·연출을 하면서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남북 간 문화 충돌에 주목했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는 과정을 통해 ‘차이를 넘어 사람을 만나는’ 모습을 그려내고자 했다.
필자는 북한이탈주민으로 남한 출신 배우자와 결혼해 아이를 낳고 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느낀 점을 이 작품에 상당 부분 반영했다. 또 현재 남한 출신 배우자와 살고 있는 북한이탈주민을 만나 여러 차례 인터뷰도 했다. 인터뷰에 응한 북한이탈주민과 그들의 배우자는 대부분 언어와 문화, 생각 차이를 느낀다며, 특히 문화 차이를 극복하는 데는 참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필자는 이 부분을 최대한 작품에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연극 ‘벤 다이어그램’에 참여하는 배우들과 3개월에 걸쳐 연습을 하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우리는 재치 있는 언어와 가벼운 상황을 통해 한 개인이 짊어지기엔 너무나도 크고 벅찬 분단국가의 이면을 조금씩 드러내 보이고자 장면 구성과 호흡을 지속적으로 연구했다. 이 작품 속에 ‘웃을 수 없는데 웃긴 상황’이 자주 묘사되는 건 그 덕분이다.
지난해 겨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추운 날씨로 인해 나들이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3일 공연 기간 동안 200명 넘는 관객이 극장을 찾았다. 남북한 출신 관객들이 작품 관람 후 들려준 이야기들은 아직도 필자 기억에 소중하게 남아 있다.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남과 북이라는 색깔이 만나 전혀 다른 제3의 색깔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우리 북한이탈주민이 겪는 작은 고통들을 담담하게 잘 그려냈다.” “한반도에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데 저녁밥을 더 고민하는 아이러니함이 참 기가 막힌다고 생각했다.” “이산가족인 우리 부모님이 연극 속에 나오는 것 같아 가슴이 먹먹했다.”
많은 말씀을 들으며, 작품 기획부터 공연까지 약 2년에 걸친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거대한 분단의 벽 앞에서 한없이 작은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삶을 살아내는 것뿐일지 모른다. 필자는 남북한에서 예술을 공부한 예술가로서 서로의 과거를 껴안고 이해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작품 속 인물들을 통해 남북한 평화와 관계 극복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싶었다.
정치적·이념적 갈등으로 점철된 남북관계 속에서 하루하루 문화 차이를 극복하며 평화로써 개인의 삶을 써내려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그들이 그려나가는 ‘벤 다이어그램’으로 인해 이제 걸음마를 떼는 필자의 아이가 언젠가는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김 봄 희
문화잇수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