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사랑채
편견 없는 이해와
평화의 시작,음식과 문화에서부터
나는 2020년 5월 한반도 음식을 전 세계에 소개한다는 비전을 가지고 주식회사 제시키친을 세웠다. 한국에 정착하고 6년 만의 일이다. 그리고 창업 1년 5개월이 지난 지금, 5명의 팀이 70평 규모의 자체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할 정도로 성장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에는 할머니가 해주신 음식이 있다.
음식에 담아 내어주던 할머니의 사랑
  나는 백두산 아래 국경 도시 혜산에서 나고 자라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향에서는 가족이 함께 무탈하게 지내는 것 역시 특권이다. 특히 나는 할머니의 사랑을 많이받고 자랐다. 손녀를 끔찍이 아꼈던 할머니는 언제나 당신보다 손녀를 더 먼저 챙겨주셨다. 무엇이든 부족했던 그 시절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할머니의 사랑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쌀로 만든 음식을 특히 좋아했다. 그런 내가 하필 쌀이 아주 귀할 때 떡을 먹고 싶다고 떼를쓰면, 할머니는 감자로라도 떡을 빚어 주셨다. 추운 겨울날, 할머니가 해주신 맛있는 감자떡을 먹고 있노라면 세상에 부러운 게 없었다. 또 유난히 소화 기능이 약했던 내가 배가 아플 때마다 소화가 잘되라고 삭힌 밥으로 감주를 만들어 주셨다. 나는 감자떡을 먹고 감주를 마시며 자라면서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에는 천 마디 말보다 더 큰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것을 배웠다. 할머니는 헌신, 보살핌, 사랑 말고도 내게 요리에 대한 즐거움과 음식의 힘에 대해서 알려주신 것이다. 할머니가 해주셨던 음식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제시키친은 없다. 나는 지금도 배가 아프면 기어이 감주를 만들어 먹고 나서야 속이 좀 괜찮아진다.
무력감 속에서 찾아낸 평화
  나와 같은 사람이 가장 괴로워하는 점을 꼽자면 단연‘무력감’이다. 분단이라는 거대한 역사에 내 개인이 휘말린 무력감. 고향을 떠나 새로운 사회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무력감.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고,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 정착 초기에는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맛이 없는 시간이 얼마간 이어졌다. 즐거운 일을 해도 늘 마음 한구석에는 고향에 있는 가족과 할머니 산소가 있었다. 하지만 정착을 잘하는 것이, 내가 잘 사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나는 이를 악물고 살았다. 학교도 가고 아르바이트도 닥치는 대로 했다. 나를 괴롭히는 무력감을이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적어도 초기에는 그랬다.
  어느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이 두 동강 난 한반도에서 아버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이 노랗다는 말을 그때 이해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 서울에서 혜산까지의 물리적인 거리만큼 깊은 상처가 내 가슴에 났다. 나는 얼마간 아무도 만날 수 없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력감이 나를 잠식했다. 이것은 분명 나 개인의 상실이었으나, 나는 모든 고향 사람들의 상실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고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상실의 무게까지도. 우리는 평화롭게 살 자격이 있다. 그리고 내가 겪었던 것과 같이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가족의 생사 앞에서 만나러 갈 수도 없는 비극은 없어져야 한다. 나에겐 그것이 평화다.
  나는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서도 남한의 청년들이 비슷한 무력감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나와 같은 고향 사람들을 만났을 때 자꾸 ‘통일’, ‘평화’ 같이 거대한 이야기만 하다 보면 대화는 똑같은 자리를 맴돌 뿐이다. 그리고 그 무력감은 변화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해야 한다. 북한 사람들이 북한 사람이라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들 말고, 북한 사람이기에 기여할 수 있는 점에 집중해 함께 살아야 한다.
제시키친의 대표 메뉴 곤드레 두부밥
‘가지고 와야’하는 평화, 용기가 되어준 고향 음식
  나는 정말 운이 좋게도 나의 일부인 고향 음식을 전 세계에 소개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동안 아무 말을 할 수 없을 때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요리다. 상처받았지만 나의 안부를 물어봐 주는 사람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무엇보다 무력감과 싸우고 이겨가는 과정을 요리를 통해서만 보여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고향 음식을 먹으면 친구들은 내가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나를, 내 인생을, 내 고향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두부밥은 나에게 참 고마운 음식이다. 세상 사람들이 편견 없이 나를 이해하고, 내 마음에 무기력이 아니라 평화를 가져다주었으니까.
  평화는 폭력과 전쟁의 반대말이 아니라, 모두가 매일 끊임없이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동적인 상태다. 북한 음식을 전 세계에 소개하고, 그 소식이 내 고향 혜산에까지 들리게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사회의 평화에 기여하는 방식이다. 그리하여 종국에 전 세계 사람들에게 우리가 무력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북한에 있는 친구들에게는 문화의 힘으로 우리가 편견 없이 이해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알려주고 싶다.
  평화는 용기를 먹고 자란다. 생전 처음 보는 두부밥을 주문해 먹어보고 북한 출신 여성 CEO 기업을 응원하고 지지해 주는 것, 그리고 종국에 편견 없는 이해를 하는 것 역시 용기의 영역이다. 나는 한반도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만 평화는 제 발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와야’하는 것임을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할 뿐. 서로의 음식과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이 평화의 시작일 수 있다고 믿는다. 이에 제시키친의 제품들이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제시킴
㈜제시키친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