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체제적 경쟁과 동아시아 정세, 그리고 한국의 책략
자유민주주의와 권위주의 격돌,
현실 반영한 전략적 나침반 필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중국·러시아가 연대한 권위주의 세력 간 대결 전선이 형성되면서 글로벌 질서 재편을 둘러싼 체제적 경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분단국가이자 통상국가인 한국이 어떤 전략을 가져야 할지 짚어봤다.
3월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규칙에 근거한 질서에 반대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국제관계 건설을 추진하겠다는 점을 명확히 한 성명이었다. 이번 모스크바 정상회담을 계기로 중러 양국은 자유주의적 국제규범과 관습, 보편적 가치인 인권 존중, 규칙 기반의 국제질서는 미국과 유럽 등 서방세계에 유리하지만, 자신들과 비서구권 국가에는 불공정한 질서라는 점을 부각하면서 좀 더 공정한 국제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자신들의 의견을 공표했다.
바야흐로 글로벌 질서 재편을 둘러싼 체제적 경쟁이 본격화됐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중국과 러시아가 연대한 권위주의 세력 간의 대결 전선이 형성됐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경쟁이나 패권 경쟁, 신냉전 혹은 진영 대결로도 일컬어지는 체제적 경쟁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혼돈 상태에 빠진 국제사회를 더욱 나락으로 몰고 가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국제 지형을 만들어내고 있다.
진영 구도 강화와 초(超)진영 실용 외교의 공존
첫째, 글로벌 질서 재편의 체제적 경쟁은 갈등과 대립, 그리고 전쟁의 먹구름을 몰고 다니는 지정학 정치를 소환하고 있다. 물론 근대 이래 강대국 중심의 지정학 정치가 국제정치의 예외적 현상은 아니다. 멀리는 19세기 유럽의 국제관계에서 목격됐고 가까이는 20세기 1·2차 세계대전의 원인과 냉전에서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나타나고 있는 지정학 정치는 지역과 지역의 안보적 연결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유럽-대서양 지역 안보는 인도-태평양 지역 안보와 연동돼 있고,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 안보는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 지역 안보와 연결돼 있는 점이 강조된다. 이러한 체제적 경쟁의 지정학 정치는 따로 떨어져 있는 개별 지역을 하나의 느슨한 진영 판으로 묶어내면서 군비통제가 작동하지 않는 군비경쟁을 촉진하고 이의 지역적 확대를 추동하는 여건을 제공하고 있다.
둘째, 미국과 중국을 주축으로 전개되는 체제적 경쟁은 냉전시대처럼 탄탄한 진영 구도를 형성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역 주요 국가의 지원과 협력이 필요한 국제 지형을 만들어내고 있다. 즉 힘의 전환과 분산으로 기존 패권국 미국이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중국 모두 확실한 국제적 지도 국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함으로써 지역의 주요 국가인 소위 지역적 중추국가의 부상과 체제적 경쟁 과정에 미치는 이들의 영향력이 더욱 중시되고 중요해졌다. 예를 들면 인도와 튀르키예,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브라질 등 지역적 중추국가들은 체제적 경쟁 구도에서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경도되지 않으면서 국익을 챙기는 실용 외교를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나아가 지역적 중추국가의 실용 외교는 체제적 경쟁에 따른 진영 구도를 느슨하게 만들면서 강대국 중심 지정학 정치의 진영 구도를 희석하는 완충 구실도 하고 있다.
3월 20일 중국 인민일보 1면(위). 오른쪽 상단에 ‘러시아와 중국: 미래 동반자 관계’란 제목의 푸틴 대통령 기고문이 실렸다. 아래는 같은 날 러시아 국영 리아노보스티 홈페이지에 올라온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기고문으로, 제목은 ‘중 러 우호의 새로운 전망을 향해 분연히 나아가자’이다.(출처 런민일보·리아노보스티 홈페이지)
이처럼 글로벌 질서 재편의 체제적 경쟁은 한편으로는 각자 우군 확보를 위한 진영 구도의 공고화를 재촉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 중추국가가 자신의 국익을 최대화하는 실용 외교를 펼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즉 체제적 경쟁은 진영 구도의 강화와 초(超)진영 실용 외교라는 역설적 국제 지형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역설적 현상이 가능한 것은 체제적 경쟁의 본질이 지난 냉전시대처럼 이데올로기나 가치를 강요하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 경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20세기 국제 환경과 근본적으로 다른 21세기 국제 환경에서 펼쳐지는 체제적 경쟁은 외형적으로는 이데올로기적 가치 경쟁 양상을 보이나 그 내면에는 자국 우선주의 논리에 기초한 국익 챙기기라는 실용 정신이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글로벌 질서 재편의 체제적 경쟁의 본질은 이데올로기적 가치의 절대성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국 우선주의에 바탕을 둔 국익 창출 여부가 국가 관계 형성의 잣대로 작용하고 있다. 지정학 정치의 소환에 따른 진영 구도 강화에도 불구하고 전략적 취사선택에 따른 국가 관계의 합종연횡이 가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진영 구도의 강화와 진영을 넘나드는 실용 외교의 전개라는 역설적 국제 지형에서 동아시아 정세는 지정학 정치의 위세가 강하게 몰아치고 있다. 우선 체제적 경쟁의 일방인 중국이 위치한 동아시아는 21세기 들어 국제정치의 중심 무대로 조명받고 있다. 체제적 경쟁의 전조로서 중국의 도전에 대한 미국의 응전은 이미 오바마 행정부 시기부터 시작됐다. 즉 오바마 행정부의 재균형 정책, 트럼프 행정부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이를 계승·발전한 바이든 행정부 대중(對中) 전략의 근저에는 체제적 경쟁의 소용돌이가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좀 더 격화되고 확대될 체제적 경쟁에 대비하기 위해 미국과 중국은 각자 우군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3월 20일 중국 인민일보 1면(위). 오른쪽 상단에 ‘러시아와 중국: 미래 동반자 관계’란 제목의 푸틴 대통령 기고문이 실렸다. 아래는 같은 날 러시아 국영 리아노보스티 홈페이지에 올라온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기고문으로, 제목은 ‘중 러 우호의 새로운 전망을 향해 분연히 나아가자’이다.(출처 런민일보·리아노보스티 홈페이지)
미국은 유럽연합과 더불어 인도-태평양 전략을 기반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과의 안보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나토(NATO), 미국·인도·일본·호주로 구성된 쿼드(QUAD), 미국·영국·호주의 안보협력체 오커스(AUKUS), 그리고 한미동맹과 미일동맹을 기반으로 하는 한·미·일 안보협력을 우군으로 삼고 있다. 이에 맞서 비서구적 권위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중국은 러시아와의 무제한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북·중·러 안보협력 강화, 그리고 인도와 중국, 중국과 중앙아시아, 중앙아시아와 러시아를 연결하는 상하이협력기구(SCO)의 위상 강화와 회원국 확대를 모색하면서 우군 확보에 나서는 한편 지역적 중추국가와의 협력도 강화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우군 확보 경쟁이 격화되면서 동아시아 정세는 그 어느 지역보다도 체제적 경쟁의 파고가 높고 지정학적 진영 구도의 강도가 상대적으로 강하다.
분단, 동맹, 반도, 통상국가인 한국적 현실
동아시아 지역에서 강하게 작동하는 체제적 경쟁의 소용돌이는 한국의 정치, 경제, 안보 분야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다양한 난제를 부과하고 있다. 이러한 국면 전개가 우리의 대외정책 추진에 가장 힘든 도전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점차 강화되고 있는 체제적 경쟁의 진영 구도에서 한국민의 안전을 지키고 지속적인 경제성장 동력을 마련하며 또한 추진해나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객관적 현실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먼저 한국은 남북관계의 안정적 관리와 평화 증진을 통해 분단을 관리하고 통일을 지향해야 하는 분단국가다. 둘째, 한국은 미국과 동맹국이다. 예나 지금이나 한미동맹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 그리고 동아시아의 안정과 세계평화에 이바지해왔다. 셋째,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전략적 이익이 교차하는 반도 국가다. 평화와 안보에 대한 한국의 역량과 의지가 부족하면 한반도는 언제든 주변 국가의 권력투쟁 무대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은 지역적·국제적으로 다양한 국가들과 복합적이면서도 다층적 경제 교류를 해야만 하는 세계적 통상국가다. 이러한 한국의 객관적 현실을 고려했을 때, 미국과 중국이 중심이 돼 다투는 글로벌 질서 재편의 체제적 경쟁은 한국을 양자택일의 소용돌이로 몰아갈 수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가운데),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왼쪽), 리시 수낵 영국 총리가 3월 13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오커스(AUKUS) 정상 회담 후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샌디에이고=AP/뉴시스)
한국의 국가 정체성과 국민 정서, 그리고 한미관계의 역사성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한국 외교정책의 방향은 동맹국 미국과 흐름을 같이하는 것에 재론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한국이 중국과 글로벌 질서 재편의 체제적 경쟁을 펼치는 미국 대외정책에 어느 선까지 참여 혹은 밀착하느냐에 있다. 즉 한미관계에서 우리가 풀어야 하는 전략적 난제는 미국과의 정책 방향과 흐름, 그리고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의 내용과 깊이에서의 공유 문제로, 한국의 객관적 현실에서 파생하는 연루의 딜레마를 어떻게 관리해나갈 것인가이다.
한편 한중관계 발전은 한국에 새로운 난제를 부과하고 있다. 중국은 지리적으로 아주 인접한 이웃 국가이자 한반도 평화와 안정, 그리고 남북관계의 발전과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변수다. 더구나 경제력에 기반을 둔 중국의 부상과 강대국화로 한국은 국가이익 관점에서 중국과의 관계 발전을 모색해나갈 수밖에 없다. 국가 정체성과 체제, 가치와 규범이 다른 중국과 협력할 때, 어느 영역과 분야, 그리고 어느 정도의 강도와 깊이로 추진해나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전략적 과제다.
1월 10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샤를 미셸 유럽연합(EU) 이사회 상임의장, 옌스 스톨텐베르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왼쪽부터)이 나토 · 유럽연합 협력 공동선언문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브뤼셀=AP/뉴시스)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체제적 경쟁으로부터 파생되는 전략적 난제를 해결하고 한국이 추구하는 대외정책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객관적 현실을 반영한 전략적 나침반을 마련해야 한다. 글로벌 질서 재편의 체제적 경쟁 구도에서 한국이 이분법적 양자택일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으려면 대외정책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종합적인 국가전략을 마련해 상황과 여건에 따라 명분과 실리의 시소게임이 진행될 수 있는 전략적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우리의 국가 정체성에 부합하는 자유주의적 국제질서, 보편적 가치와 규범을 강조하고 미국 주도의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속하더라도 우리는 상황과 여건에 따라 한국 우선주의에 입각한 국익 창출의 대외정책과 실용 외교를 전개할 수 있는 정책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설사 우리와 다른 진영의 일원이라도 어느 한쪽을 완전히 배제하는 대외정책을 추진하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 긴 호흡을 갖고 종합적인 국가전략을 마련하고 분야별 세부 전략을 그리는 것이 체제적 경쟁의 소용돌이를 헤쳐나갈 수 있는 튼튼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이 수 형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