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992023.05.

강원도 철원군 승일공원에 설치된 태봉구문(泰封九門).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9개의 문을 통과하면 머지않아 통일한국의 문이 열릴 것이라는 내용의 안내문이 붙어 있다.

걸어서 155마일


④ 강원도 철원

질곡의 역사,
전쟁 상흔 극복한 청정 생명의 땅

겨울은 어느새 그림자만 남기고 총총히 떠나갔다. 아침이면 제법 따뜻한 햇살이 고개를 내민다. 들녘에는 초록빛이 물들었다. 봄의 중턱에서 길을 떠났다.

한강변을 따라 달리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을 지나 연천군 도로를 굽이굽이 달려 닿은 곳은 강원도 철원군 대마1리. 6·25전쟁으로 지뢰밭이 된 민간인통제선(민통선) 구역에 국방력 강화를 목적으로 1967년 개척한 마을이다. 이름하여 ‘두루미평화마을’. 철원을 상징하는 새 ‘두루미’와 ‘평화’를 염원하는 대마리 주민들의 바람을 이어 만든 명칭이다.

군 검문소 앞 대마리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大馬理(대마리) 백마고지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라는 표지석이 외지인을 맞는다. 이곳에선 모퉁이를 돌 때마다 군사시설이 나타나고, ‘지뢰 조심’ 표지판이 주렁주렁 매달린 철조망도 눈에 띈다.

대마리는 광복 직후 북한 땅이었다. 6·25전쟁 뒤 수복돼 70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도 곳곳에 당시 기억을 상처처럼 간직한 고장이다.

1968년 8월 30일 정부가 재건촌 건립 계획을 세운 뒤 반공정신이 투철한 재향군인과 그 가족이 군용천막으로 입주하면서 마을이 조성됐다. 그래서 초기엔 ‘향군마을’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주민들은 지금도 당시 개척정신을 기리고자 매년 8월 30일 대마리 입주 기념행사를 연다.
지뢰밭을 농경지로 만든 대마리 주민들
현재 이 마을 주민 수는 500여 명. 주민 대부분은 정착 2세대이고, 입주 초기부터 마을을 이끌어오던 1세대는 25명밖에 남지 않았다. 최춘석(53) 대마1리 이장은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이 지역으로 이주한 1.5세대다. 2018년부터 6년째 마을 이장을 맡고 있다. 그가 기억하는 대마리 이주 초기 풍경은 이렇다.

“아버지가 ‘휴전선 근처 대마리로 이주하는 사람에겐 집과 땅을 무료로 제공한다’는 모집공고를 보신 모양이에요. 새집에 가면 따뜻하고 눈이나 비가 새는 일도 없을 거잖아요. 게다가 우리 땅이 생기면 쌀밥을 먹을 수 있을 테고. 아버지를 포함한 초기 입주자 150명은 이런 꿈을 갖고 옮겨왔죠. 초기엔 군인들과 같이 마을을 일궜어요. 낮에는 목책을 세우고 밤엔 북한군을 막아내며 열악한 천막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대마리는 전쟁으로 버려진 땅이라 돌과 지뢰만 있는 황무지였어요.”

마을 사람들의 피땀 어린 개척정신은 대마리를 현재의 활력 넘치는 농촌 마을로 바꿔놓았다. 최 이장은 “우리는 온종일 북한 방송이 쏟아내는 소음과 보안대원들의 감시 속에 땅을 일궜다. 지뢰밭을 최고의 농경지로 만든 것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백마고지 전적비 앞에 조성된 산책로.
길 양쪽에 나란히 게양된 태극기가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다.

두루미평화마을 중심부에 있는 역사문화관 ‘세모발자국’에는
대마리 주민들의 삶과 역사가 기록돼 있다.

대마리의 주요 작물은 쌀, 사과, 곡물류다. 마을 이름에 걸맞게 겨울이면 두루미를 비롯해 독수리, 청둥오리 등 다양한 철새가 날아와 관광객들의 발길을 이끈다. 계절별로 백마고지 오대쌀 재배 체험, 황무지 지뢰 찾기 체험, 천막 체험, 병영 체험 등 안보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해 방문객의 호응을 얻고 있다. 이 마을에서 숙박을 할 경우 노동당사를 본떠 세운 두루미평화관에 머무르며 색다른 경험도 즐길 수 있다. 최 이장은 “마을 전체가 천혜의 자연 환경에 둘러싸여 있다. 피라미, 쉬리, 쏘가리 등 청정수역에 사는 어종과 노루·너구리 등 동물, 참나무·당귀·질경이 등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다양한 식물도 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대마리 일대의 토지 소유권 분쟁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대마리에서 처음 토지 소유권 문제가 대두된 것은 1972년 5월. 한 지주가 6·25전쟁 발발 직전까지 자기 논이 있던 자리라며 대마리에 들어와 땅에 줄을 쳤다. 해당 지주가 의정부지방법원에 토지 사용금지 가처분 신청까지 내자 마을 주민들은 “개간한 땅을 빼앗길 수 없다”며 “이주자의 권리를 보장해달라”고 군과 정부를 향해 요구했다. 이 사건은 지주가 벌금형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를 계기로 마을 주민들은 땅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고자 지금도 다각적 노력을 이어나가고 있다.
장병들 투혼으로 ‘철의 삼각지대’ 확보
최근 대마리는 마을 발전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주민 과반수는 마을 발전 방향을 청정농업에서 찾고, 복합영농이나 관광농업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 이장은 “민간인 출입 통제가 해제된 지 20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군 당국이 주민 이동을 불편하게 하고 지역 발전에도 지장을 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기업이 들어서야 지역 경제가 활성화되지 않겠나. 지금은 일자리가 없으니 다들 고향을 떠난다”고 토로했다.

두루미평화마을을 나와 대마사거리를 따라 600m 정도 달려 백마고지 전적지에 닿았다. 6·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휴전선에서 불과 2km 남짓 떨어져 있다.

“조국의 자유와 평화통일을 위해 장렬히 산화하신 용사들의 숭고한 애국 충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백마고지 위령비.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진 것은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국군 9사단과 중공군 38군은 이날 철원군 산명리 뒷산에서 마주쳤다. 그로부터 10일간 양측이 밀고 밀리며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벌이는 동안 고지 주인이 무려 24회나 바뀌었다. 고작 395m짜리 동산에 포탄 27만4954발이 쏟아졌다. 양측 사상자가 1만7800여 명(적군 1만4300명, 아군 3500여 명)에 달한다. 당시 중공군은 병사들 손목을 쇠사슬로 기관총에 묶어 탈주를 막고 전투를 독려했다. 국군은 더한 투혼으로 맞섰다. 10차 전투 때 강승우 소위 등 9사단 용사 3명은 수류탄을 뽑아들고 산 정상에 있는 중공군 기관총 진지에 뛰어들어 적과 함께 장렬히 산화하기도 했다. 장병들의 헌신 덕에 국군은 끝내 백마고지를 지켜내 철원-김화-평강을 잇는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를 확보할 수 있었다.

철원평야 수복에 결정적 기여를 한 이 전투를 기리고자 군은 민통선 바깥쪽 묘장초등학교 뒤 언덕에 위령비와 전적비, 기념관을 건립했다. 위령패 앞 비석에 전사자 844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 너머로 두 손 모아 통일을 기원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전적비가 서 있다. 높이가 무려 22.5m에 달한다.
가혹한 역사 뚫고 생명의 땅으로 발전
오후 봄 햇살이 전적비 그림자를 백마고지 쪽으로 드리웠다. 전쟁 발발 전 이름조차 없던 고지는 빗발친 포탄 세례로 산 전체가 깊이 1m가량의 모래밭으로 변했다. 참혹한 모습이 마치 백마가 널브러진 것 같다고 해 백마고지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앞에서 보고 있노라면 그 형상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백마고지 전적지 안내원 설명에 따르면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말 모양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곳에서 들리는 건 놀랍게도 한가롭게 지저귀는 새소리뿐이다. 백마고지에서 내려다보는 두루미평화마을 풍경은 이름처럼 평화롭기만 하다.

백마고지 서쪽으로 3km 지점에는 해발 281m 화살머리고지가 있다. 이곳엔 ‘철원 DMZ 평화의 길’이 조성돼 있다. 민간인 통제구역 안에 있는 남방한계선과 군사분계선을 따라 조성된 둘레길이다. 철원 DMZ 평화의 길은 6·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백마고지와 남북을 경유해 흐르는 역곡천, 주변 평야가 어우러진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다. 2019년 6월부터 추첨을 통해 선발된 일반인도 현장에 방문할 수 있게 됐다. 신청은 한국관광공사 ‘평화의 길’ 홈페이지(dmzwalk.com)에서 하면 된다.

철원역사문화공원에서 매주 금~일요일 열리는 장터 풍경. 철원지역 특산물과 공예품 등을 판매한다.
백마고지 전적지를 나오면 노동당사에 닿는다. 이곳 맞은편 철원역사문화공원에서는 4월부터 11월까지 매주 금~일요일 장터가 열린다. 철원군 농가와 소상공인, 주민들이 모여 운영하며 철원지역 특산물인 오대쌀, 느타리버섯, 오이, 삼지구엽초, 벌꿀, 곡물류 등 농산물과 먹거리, 공예품 등을 판매한다.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로 재배한 철원사과 한 알 먹고 가라”는 어르신의 넉넉한 표정 너머로 “잊을라구 해두 자꾸 철원사과 생각이 나잖소~”로 시작하는 철원군 안내방송이 울린다. 가혹한 역사를 딛고 철원은 생명의 땅으로 발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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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일교
길이 120m, 높이 35m의 남북 합작 다리. 승일교 공사는 1948년 광복 후 철원이 북한 땅이었을 때 북한에서 시작했다가 6·25전쟁으로 중단했다. 휴전 후 철원이 한국에 속하게 되자 1958년 12월 정부에서 승일교를 마저 완성했다. 결과적으로 기초 공사와 교각 공사는 북쪽이, 상판 및 마무리 공사는 남쪽이 마무리한 셈이다. 현재 승일교는 사람만 통행할 수 있다. 자동차는 옆에 있는 한탄대교를 이용해야 한다.
노동당사
1946년 건립된 지상 3층 러시아식 건축물로, 철원 민간인통제선 바로 아래 있다. 6·25전쟁 발발 직전까지 북한 노동당사로 이용됐으며 당시 철원과 포천, 연천 일대를 관리했다. 6·25전쟁 때 큰 피해를 입어 건물 전체가 검게 그을리고 골조 벽면과 외벽에는 총탄과 포탄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건물은 가수 서태지와 아이들의 ‘발해를 꿈꾸며’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쓰였고, 2002년 5월 국가등록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됐다.
승리전망대
휴전선 155마일 정중앙에 위치한 전망대다. 당초 북측 동향을 살필 목적으로 세웠으나 지금은 안보 관광지가 됐다. 북한군 이동 모습, 금강산 철길은 물론 경원선 철도, 광삼평야 등 북한 지역이 곳곳이 잘 보인다. 승리전망대에서 북방한계선까지 거리는 약 1.8km, 북한 감시초소(GP)와 남한 GP 사이 간격은 660m에 불과하다. 2016년 북한 제4차 핵실험 직후 잠시 폐쇄되는 등 남북관계 변화에 따라 개방과 폐쇄가 반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