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2102024.7·8

2019년 11월 9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의 장벽 기념관에서 시민들이 장벽 붕괴 3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AP/뉴시스)

특집

동독 ‘2민족론 선언’과
서독의 대응이 주는 교훈

동독 실패 전철 밟는 북한
‘북한 방송’ 개방해 남북 이질화 대비해야

김정은은 2023년 12월 30일 당 중앙위 8기 9차 전원회의에서 남북관계를 더 이상 동족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관계’로 규정했다. 동독이 1970년 서독에 대해 ‘2민족론(2국가론)’을 주장했다가 실패한 역사를 남북관계에서 다시 소환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동독의 2민족론이 나오게 된 배경과 당시 서독의 대응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1953년 6월 17일 동독에서 노동자 봉기가 발생했고 소련군이 탱크로 이를 저지하면서, 동독은 정권 수립 4년 만에 정당성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동독에게는 체제 유지가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가 됐다.

발터 울브리히트(W. Ulbricht) 동독 공산당(SED, 공식 명칭은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이지만 여기서는 동독 공산당으로 칭함) 제1서기는 1953년 9월 당 중앙위 16차 회의에서 독일 영토 위에 2개 국가가 존재한다고 주장했고,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1955년 7월 26일 동독을 방문해 동·서독 간 두 개 국가 이론을 제시했다. 또 울브리히트 제1서기는 1956년 12월 30일 통일에 도달하기 이전 단계로 동·서독 두 개 국가 간 ‘국가연합제(Konföderation)’를 제안했다

이와 같이 동독은 체제 존립의 취약성으로 말미암아 1949년 10월 자신의 헌법 1조에서 규정한 ‘독일은 하나의 분리할 수 없는 민주공화국’이라는 궤도에서 이미 벗어나고 있었다.

동독 ‘통일’ ‘민족’ 헌법에서 삭제
반면 서독은 1949년 9월 국가 수립 이후 ‘독일제국(Deutsches Reich)’의 권리 계승자임을 주장하면서 서독이 독일의 이익을 단독 대표한다고 했다. 아울러 1955년부터는 할슈타인 독트린(Hallstein Doktrin)에 의거해 서독과 외교 관계를 맺은 나라가 동독과 외교 관계를 맺을 경우(동독의 국제법적인 승인) 서독은 그 나라와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1969년 10월 서독 총리로 취임한 빌리 브란트(W. Brandt)는 10월 28일 정부 성명을 통해 “비록 독일 영토 위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서로 외국은 아니다”며 서독이 그동안 주장해왔던 할슈타인 독트린에 의한 단독 대표권을 공식적으로 폐기하고 ‘사실상’의 1민족 2국가를 인정하면서도 “(서독의) 동독에 대한 국제법적 국가 승인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브란트 총리는 이처럼 동독을 사실상의 국가로 인정하면서도 통일에 대비해서 민족의 단일성 유지를 최대의 과제로 삼았다. 브란트 총리는 이듬해 1월 14일 ‘민족 상황에 관한 보고(Bericht zur Lage der Nation)’에서 민족의 단일성 유지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에 대해 동독의 울브리히트는 1월 19일 기자회견에서 “여전히 독일 민족이 단일 민족이라는 주장은 허구이며,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 그리고 독점 재벌과 노동자 사이에 하나의 민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박하며 동독을 사회주의 독일 민족(sozialistischer deutscher Nationalstaat)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1960년 국가협의회 의장(국가 원수)에 올라 1971년 5월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기 전까지 동독을 통치했다.

올해 1월 21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의 의사당 앞에서 독일대안당(AfD)과 극우주의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휴대전화 불빛을 밝히고 있다. (AP/뉴시스)
뒤를 이어 동독의 새로운 당 제1서기 겸 국가평의회 의장에 오른 에리히 호네커(E. Honecker)는 그해 6월 제8차 당 대회에서 “부르주아 민족이 존속하고 있고 민족 문제가 부르주아와 노동자 대중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계급 모순을 통해 결정되는 서독과 달리 동독에서는 사회주의 독일국가, 사회주의 민족이 발전됐다”고 강조했다.

동독은 후속 조치로 ‘Deutsch’와 ‘Deutschland’라는 단어를 지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서독은 ‘Bundesrepublik Deutschland(BRD)’, 동독은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DDR)’으로 모두 국가 명칭에 Deutsch 또는 Deutschland를 사용해왔다. 이는 1871~1945년까지 법적으로 존속한 ‘독일제국’의 법적 정통성을 가진 후계자라는 의미였으나, 동독은 2민족론을 주장하면서 이를 스스로 부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독 정권은 이러한 2민족론을 공식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1974년 10월 헌법을 개정하면서 헌법 1조의 ‘독일민주공화국은 독일 민족의 사회주의 국가’라는 조항을 ‘독일민주공화국은 노동자와 농민의 사회주의 국가’라는 조항으로 대체했고 이전 헌법에 존재하던 ‘통일’이나 ‘민족’이라는 단어를 헌법에서 모두 지워버렸다. 이처럼 동독이 2민족론을 선언하면서 동·서독의 통일을 부정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서독과의 체제 경쟁에서 밀려났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사회주의에 기반한 전 독일의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한 결과다.

서독 최우선 과제는 ‘민족 단일성 유지’
결론적으로 서독은 동독의 두 개 국가론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한 대로 브란트 총리의 1969년 10월 정부 성명에서 부분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동독이 1970년부터 주장하면서 요구한 서독에 의한 ‘동독의 국제법적 승인’과 ‘2민족론’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브란트 총리는 당시 성명에서 ‘독일 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하면서 독일 민족의 결속과 단일성 유지를 정부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고, 이를 위해 동·서독 기본 조약 체결을 추진했다. 서독은 1970년 동독과 두 차례 정상회담을 개최했으나 동독의 국제법적 승인 요구로 진전이 없었다. 서독은 소련과 폴란드와 먼저 협상해 우호조약을 체결했고, 우여곡절 속에 같은 해 11월 서독의 에곤 바(E, Bahr)와 동독의 미하엘 콜(M. Kohl)이 동·서독 기본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을 다시 시작했다.

1972년 12월에는 동·서독 간 기본 조약을 체결했는데, 동독의 입장을 받아들여 조약에 통일 또는 민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독은 조약 체결과 동시에 동독 정부에 에곤 바 명의로 “기본 조약의 체결이 독일 민족의 자유로운 자결권 행사를 통해 통일을 이룩하는 것에 반하지 않는다”는 서한을 보냈다.

서독은 동독의 Deutsch와 Deutschland 지우기에도 대응했다. 그동안 일상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서독의 약자인 ‘BRD’를 사용했으나, 1974년 5월 연방과 주정부가 합의해 공식적으로 ‘Bundesrepublik Deutschland’만 사용하기로 했고, 유럽공동체(EG)에도 서류와 서한 등에 BRD 사용을 금하는 업무지시를 요청해 관철시켰다. 또한 주 정부의 문화교육부 장관들은 학생들의 교과서에 BRD 약자 사용을 금지하기로 합의했다.

1989~90년 동독의 변혁과 통일 과정에서 동독이라는 국가를 개혁하자는 주장은 있었으나 사회주의 민족인 동독을 유지하자는 주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통일에 반대하는 논리로 사용된 동독의 2민족론은 실패했고 동독이라는 국가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렇다면 반세기 가까이 존재했던 동독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 것일까? 그렇지 않다. 동독이 40년 넘게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사상 교육을 통해 만들어놓은 실패한 세계관이 사회적으로 유전되면서 통일된 독일에서 내적 통합 등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통일부와 독일 총리실 신연방주특임관실이 올해 4월에 개최한 13차 한·독 통일자문위에서 카스텐 슈나이더 신연방주특임관 겸 국무장관은 독일의 내적 통합에 대해 “10년 전보다 상황이 오히려 더 악화됐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예는 2024년 6월 9일의 유럽의회 선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선거 결과를 보면 동·서독 지역 간 차이가 극명하다. 독일의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인 독일대안당(AfD)은 독일 전체에서 15.9%의 지지를 받아서 기민당(30%)보다는 적지만 사민당(13.9%)보다는 많은 득표로 2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지역별 득표율을 보면 AfD는 구동독 지역(27.5~31.8%)에서 구서독 지역(8~15.7%)에 비해 적게는 두 배에서 많게는 네 배의 지지를 획득했다. 이러한 결과는 과거 동독이 남겨놓은 전체주의 유산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설명할 수 없다. 통일 과정에서 정책의 부작용도 원인으로 지적된다.

북한 방송 개방, 통일 대비 능력 높일 것
한반도가 통일이 되면 남북 간 이질화는 동·서독보다 더 오랜 분단, 남북 간 제한적 교류·협력 그리고 북한의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억압된 체제로 말미암아 큰 문제로 대두될 것이다. 이에 대비하는 것은 북한 주민이 외부 세계의 정보를 더 많이 획득하고, 우리가 북한을 좀 더 잘 이해하는 것이다. 가장 효율적 방법은 남북 간 교류·협력의 발전이지만, 문제는 동독의 실패 사례를 통해 학습한 북한이 이를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단독으로라도 민족의 이질성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하나는 우리의 학교 교육에서 남북 동질성 교육을 강화하고 북한을 이해할 수 있는 교과목을 개발해 도입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북한 주민이 제한적으로 남한 정보를 접하는 상황에서, 우리라도 북한 정보를 접할 수 있게 해 북한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든다면 그것이 곧 통일에 대비하는 방법이다. 우선 우리 공영방송에서 북한 프로그램을 활성화하면서 현 정부 초기에 추진했던 북한 방송 개방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우리의 통일 대비 능력을 높일 수 있는 대안이 될 수도 있다. 통일은 민족의 염원인 분단의 극복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예측 가능한 문제가 있다면 미리 대비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이 곧 통일 준비이다. 통일 이후 대처하는 것은 너무 늦다.

이 봉 기 통일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