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8·15 경축사로 본 한반도 평화
북한 비핵화에 따라
경제와 민생 획기적으로 개선할 것
통상적으로 광복절 경축사는 호국 선열에 대한 감 사와 현 정부의 역사의식과 철학, 북한 및 일본과의 관계를 비롯해서 국정 운영의 철학과 미래 방향 등이 포함된다. 언제부터인가 8·15 대통령 경축사에 한일관계보다는 대북 및 통일정책 등이 더 큰 비중으로 포함됐다. 한일관계의 올바른 정립도 중요하지만 분단 극복을 통해서 한반도의 완전한 평화통일을 이루는 것이 진정한 대한민국의 독립이라는 함의가 있기 때문이다.
북한 비핵화 조치에 상응한 ‘담대한 구상’ 제안
윤석열 대통령은 제77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하고 실질적인 비핵화로 전환한다면 그 단계에 맞춰 북한의 경제와 민생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담대한 구상을 제안한다”고 말했다. ‘담대한 구상(Audacious Initiative)’은 윤 대통령이 취임사 때부터 밝힌 북한 비핵화 로드맵을 보다 구체화한 것으로, 비핵화 조치에 상응해 단계적으로 안정보장·경제협력 조치를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담대한 구상’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인프라 구축, 민생 개선, 경제 발전 등 3대 분야에서 5대 사업을 우선 추진한다. 5대 사업은 ▲발전·송배전 인프라 지원 ▲항만·공항 현대화 사업 ▲대규모 식량 공급과 농업기술 지원 ▲병원·의료 인프라 현대화 ▲국제투자 및 금융지원 프로그램 실시 등이다.
경제의 전 분야에 걸친 종합선물 세트에 가까운 경제협력이다. 한 예로 ‘한반도 자원·식량 교환 프로그램(Resources - Food Exchange Program, R-FEP)’은 제재 대상인 희토류 등 광물자원의 수출을 일정한도 내에서 허용하고, 동 대금을 활용해 식량·비료·의약품 등 생필품을 구입토록 하는 메커니즘이다. ‘북한 민생개선 시범사업’도 가능하다. 보건의료에서는 병원 현대화, 식수 위생을 위한 정·배수장 설치, 산림녹화를 위한 양묘장 현대화 사업 등 거점지역 중심의 시범사업을 추진한 후 비핵화 단계에 맞춰 사업 확대 여부를 검토해 볼 수 있다.
세부내용을 살펴보면 1단계로 북한의 비핵화 대화 복귀를 유도하는 여건 조성에 주력한다. ‘북한 핵위협 억지(deterrence)’와 ‘제재·압박’ 등으로 북한의 핵 개발 의지를 단념시키는 대화와 외교를 추진한다. 과감한 초기 조치와 포괄적 합의 도출로 비핵화 시기를 최대한 앞당길 복안이다. 비핵화 전반을 아우르는 포괄적 합의(로드맵) 도출 과정에서 초기 조치에 선제적으로 착수한다. 이후 2단계에서 부분적·단계적 합의 후 다음 단계를 논의하는 대신 비핵화 전체 과정을 포괄적으로 먼저 합의한다. 비핵화 이행은 단계적으로 추진하되 이행단계를 최소화해 신속한 비핵화를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포괄적 비핵화 합의 도출 시 ‘남북공동경제발전위원회’를 설립 가동한다. 정부는 비핵화 조치, 경제지원·협력, 군사적 신뢰구축 등을 포괄하는 단계별 추진 계획과 최종상태까지 아우르는 종합적 계획은 향후 북한의 반응을 보아가며 공개 여부를 검토할 방침이다.
과감한 제안에도 북한의 호응은 미지수
당초 ‘담대한 구상’에 담길 북한 비핵화 상응조처는 ‘경제’와 ‘안보’의 두 축으로 구성될 것으로 예상됐다.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7월 대통령 업무보고 후 브리핑에서 “담대한 계획안에 북한이 제기한 안보 우려와 요구사항을 포함해 경제적·안보적·종합적 차원의 상호단계 조치를 포괄적으로 담는 방안을 보고했다”고 밝혔다. 통일부가 발표한 계획은 북한이 우려하는 안보 불안감을 해소하고 고질적인 경제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수준이자 더 이상 핵을 개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담대한 내용을 내민다는 구상이었다. 북한의 안보 불안감 해소와 관련해서는 북미관계 정상화와 군사적 신뢰 구축, 군비통제 등까지 거론됐다. 하지만 이번 경축사에서는 기존 정부와 차이점으로 거론해 온 ‘북한 안전 보장’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은 언급되지 않았다.
정부는 ‘담대한 구상’과 관련해 외교부, 통일부, 국방부 등 관계부처 협의를 통해 구체화 작업을 진행 중이며 미국과도 협의를 하면서 안전보장에 관한 내용이 포함될 계획이나 아직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북한의 안전보장 문제는 한국보다는 미국이 구체적으로 제공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윤 대통령이 언급하는 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담대한 구상’과 관련해 미국 등과 협의를 지속해 왔으나 아직 논의가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북한은 그동안 미국 등의 ‘대북 적대시 정책’으로 안보를 위협받고 있어 핵무기 개발을 통해 전쟁을 억제하고 안전을 지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왔다. 비핵화를 위해선 경제적 보상 이외에 북미관계 정상화나 군사적 신뢰 구축, 군비통제 등 이른바 북한의 ‘안보 우려’를 해소할 정치·외교·군사적 상응조처가 필요하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난2018년 6월 싱가포르 회담과 2019년 2월 하노이 회담이 노딜(no deal)로 종료된 당시 상황을 살펴볼 때 북한 비핵화의 조건은 단순하지 않다. 영변 비핵화를 대가로 11건의 유엔 대북제재 결의안 중에서 5건의 해제를 요구한 합의안이 노딜로 끝난 상황에서 안전보장과 경제제재 해제를 넘어 경제협력까지는 갈 길이 멀다. 일차적으로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중요하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려는 야심은 비핵화 협상 자체를 어렵게 한다.
KBS는 매년 광복절을 앞두고 국민 통일 의식을 조사해 왔다. 올해 조사에서는 응답자 80% 가량이 북한 정권에 반감을 느낀다고 답했고, 북핵 문제 전망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답변이 85.5%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최근 안보 상황에 대한 평가’는 70.2%가 ‘불안하다’고 답해 지난해보다 14.1%p나 증가했다. 북한의 연이은 미사일 시험 발사와 노골적인 핵 위협 등으로 악화된 남북관계가 반영된 걸로 분석된다.
‘담대한 구상’은 북한의 호응이 관건이다. 최근 북한은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등 북한 최고위급이 전면에 나서 대남 비난 공세 수위를 끌어올리고 있다. 8월 22일부터 후반기 한미연합연습 ‘을지 자유의 방패(UFS)’가 시작된다는 점 등도 작용했다. 앞서 김 위원장은 7월 27일 전승절 연설을 통해 윤석열 정부의 선제타격 시도 등을 겨냥해 “강력한 힘에 의해 응징될 것이며 윤석열 정권과 그의 군대는 전멸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김여정 부부장은 최근 노동신문 담화를 통해 윤 대통령의 제안에 “절대로 상대해 주지 않을 것”이라며 비난했다. 단기간에 북한이 대화에 나올 전망은 불투명하다. 전체적으로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북 정책을 전향적으로 밝히기에는 한반도 정세가 무겁다.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이 한일관계 분수령
지난 8월 4일 광주시의회 시민소통실에서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 일본 측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다양한 변수가 포함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해법이 한일관계 발전에 분수령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연합
윤 대통령은 한일관계와 관련해선 “과거 우리의 자유를 되찾고 지키기 위해서 정치적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하는 대상이었던 일본은 이제 세계시민의 자유를 위협하는 도전에 맞서 함께 힘을 합쳐 나아가야 하는 이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일관계가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양국의 미래와 시대적 사명을 향해 나아갈 때 과거사 문제도 제대로 해결될 수 있다”며 “한일관계의 포괄적 미래상을 제시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계승해 한일관계를 빠르게 회복하고 발전시키겠다”고 덧붙였다.
이번 경축사에는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지만 향후 일본과의 관계는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와의 연대와 협력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메시지도 포함됐다. 위안부 등 과거사 문제보다는 미래지향적으로 한일관계를 발전시키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일본의 경제안전보장 정책을 총괄하는 다카이치 사나에 경제안보상 등 일본 정부 관료들은 일본 패전일인 8월 15일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이 같은 참배는 3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 정부는 일본 정치지도자들이 한국의 광복절이자 일본의 패전일에 즈음해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료를 내거나 참배해 온 데 대해 유감을 밝혔다.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대외 여건이 녹록치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
향후 한일관계는 ‘난제 중의 난제’인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의 해법 찾기에 달려 있다. 총론에서는 한일 양국이 미래로 나아가기로 선언했지만 각론에서는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일본 정부는 자산 매각으로 현금화가 실제 이뤄질 경우 한일관계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를 것이라는 경고 메시지를 발신해 왔다. 일본제철과 미쓰비시 중공업도 재항고하며 ‘버티기’에 들어갔다. 앞서 우리 대법원은 2018년 10월과 11월,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을 대상으로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1억 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들 기업은 판결에 불복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대법원의 판결을 이행하지 않는 일본 기업들의 국내 자산을 매각해 배상해 달라고 다시 법원에 신청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과거, 현재, 미래 및 국가 배상, 개인 피해 구제 등 다양한 변수가 포함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해법은 윤석열 정부의 한일관계 발전에 분수령이 될 것이다.
지난 7월 18일 일본 도쿄도 미나토구 소재 외무성 이쿠라공관에서 박진 외교부 장관과 히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이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
남 성 욱
고려대학교 통일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