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미국의 지정학 전략과 국제사회 진영화
심화되는 미중 경쟁 속
진영 대결 장기화 대비해야
미국과 중국 두 초강대국을 중심으로 국제사회 ‘진영화’ 구도가 심화되고 있다. 대중국 견제를 위한 미국의 다자주의 제도를 살펴보고 향후 글로벌 경쟁구도를 전망한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종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2022년의 세계정세는 짙은 안개 속을 걷고 있다. 다만 우크라이나 사태가 모든 모호성과 불확실성의 주된 원인이라 하긴 어렵다. 이번 사태가 국제사회에 엄청나게 큰 충격파를 던진 것은 분명하지만 훨씬 이전부터 국제정세에 근본적인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되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세계질서 장악력은 현저하게 약화됐고 이에 반해 중국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하면서 미국과의 격차를 급속히 줄여나갔다. 마침내 2013년 중국의 시진핑 정권이 적극적, 공세적인 대외정책 추진을 공언하면서 국제정세의 변화가 시작됐다. 2016년에는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가 안보, 경제, 기술협력 등의 분야에서 중국에 대한 견제를 노골화하기 시작했고 중국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양국 간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이러한 추세는 2021년 2월 미국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가 남긴 부정적 유산을 일소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대외정책 측면에서는 오히려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국 강경책을 이어나가고 있다. 다만 트럼프가 미국의 전통적인 동맹국을 소외시키고 다자주의 국제제도를 뒤흔들려 했던 반면 바이든 행정부는 나토(NATO)를 위시한 동맹을 강화하고 다자주의를 재활성화하는 방식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에 맞서 중국 역시 세계 여러 국가와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두 초강대국의 움직임은 국제사회가 점점 더 ‘진영화’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대중국 견제를 위한 미국의 다자주의 제도
바이든 행정부는 출범 직후인 2021년 3월에 펴낸 ‘국가안보전략 잠정안(Interim National Security Strategy Guidance)’에서 미국이 ▲민족주의의 고조, ▲민주주의의 쇠퇴, ▲중국, 러시아를 비롯한 권위주의 국가와의 경쟁, ▲기술혁명이라는 네 가지 중대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중국을 “경제적, 외교적, 기술적 역량을 결합해 안정적이고 개방적인 국제체제에 지속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유일한 경쟁자”로 지목했다. 2017년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을 미국의 국익을 위협하는 ‘수정주의 국가(revisionist power)’로 정의했던 것만큼 강경한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중국이 미국의 ‘전략적 경쟁자(strategic competitor)’라는 트럼프 행정부의 인식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미국은 나토와 호주, 일본, 한국 등 전통적인 동맹국들과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는 한편, 동아시아 지역에서 대중국 견제를 목표로 하는 중소규모 다자주의 제도를 제안하고 활용하기 시작했다. ‘쿼드’, ‘오커스’,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 등이 대표적인 다자주의 제도들인데 각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쿼드(Quad)’라 불리는 ‘4자안보대화(Quadrilateral Security Dialogue, QSD)’는 미국, 일본, 인도, 호주 4개국이 참여하는 비공식 안보협의체로 2007년 일본의 제안으로 결성됐다. 한때 아시아판 나토의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2009년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원한 호주가 탈퇴하면서 사실상 해체됐다가 2017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관심을 보이면서 부활했다. 2020년에는 미국이 한국과 뉴질랜드, 베트남 등 3개국이 추가로 참여하는 ‘쿼드 플러스(Qaud-Plus)’를 제안하기도 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쿼드의 활용방안에 대해 최종적인 입장을 정리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 중국의 부상에 대한 민주주의 국가 간 안보협력 수단으로서 쿼드의 유용성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높은 상황이다. 장차 중국과의 갈등이 심화될 경우 쿼드가 확장 내지 재편될 가능성이 상당해 보인다.
중국 샤먼에서 지난 5월 24일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신흥 경제 5개국) 산업장관 회의가 화상으로 열렸다.
중국은 미국이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계획으로 대중 압박을 높임에 따라 브릭스 국가 간 연대 강화에 나서고 있다©. 연합
다음으로 2021년 9월 결성된 미국, 영국, 호주 간의 ‘오커스(AUKUS)’라는 새로운 형태의 안보협의체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커스는 군사기술 파트너십 구축을 목표로 하는 협의체로서 미국과 영국은 호주에 핵잠수함 건설에 필요한 기술과 핵물질을 공여하기로 합의했다. 아울러 장거리유도미사일을 포함한 각종 미사일, 인공지능, 양자컴퓨팅, 사이버 분야의 기술협력 합의가 이뤄지기도 했다. 호주와 마찬가지로 핵잠수함 건설에 관심을 가진 한국이 미국의 협력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오커스는 한국 내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미국이 오커스 합의를 통해 호주의 핵잠수함 건설을 지원하는 이유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점증하는 중국의 군사력을 견제하는 데 있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미국은 특히 남중국해를 자국의 내해(內海)로 통제하려는 중국의 야심을 꺾는 데 호주의 핵잠수함이 유용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2022년 5월 23일 출범한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ndo-Pacific Economic Framework for Prosperity, IPEF)’는 쿼드나 오커스와는 달리 일차적으로 참여국가들 간의 경제협력을 주제로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중국 견제라는 점에서 앞의 두 안보협의체와 궤를 같이 한다. 지난 2017년 트럼프 행정부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Pacific Partnership, TPP)’ 탈퇴를 결정했다. 중국은 이 틈을 타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RCEP)’과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omprehensive and Progressive Agreement for Trans-Pacific Partnership, CPTPP)’을 적극적으로 주도하면서 동아시아 지역에서 경제적 주도권을 확보하려 했다. 중국과 함께 한국, 일본, 인도네시아, 뉴질랜드, 베트남 등 총 15개국이 참여하는 RCEP는 계획대로 작동할 경우 전 세계 인구의 30%와 GDP의 30%를 차지하는 국가들로 이루어진 세계 최대의 무역지대가 탄생할 전망이었다. 미국과 인도가 참여하지 않고 중국이 주도하는 RCEP가 최대 지분을 소유한 경제협력체가 될 가능성이 다분한 상황이었다. 미국은 IPEF의 설립을 통해 이러한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IPEF에는 한국, 미국, 일본, 호주, 싱가포르, 뉴질랜드, 베트남,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필리핀, 인도 등이 참여해 관세 인하, 무역장벽 축소 등을 통한 자유무역지대의 창설을 목표로 한다. 더불어 디지털경제, 노동, 환경, 탄력적 공급망 구축, 녹색기술협력, 조세 및 반부패 등 새로운 통상의제를 협의하는 경제협력체가 될 전망이다.
평행선 달리는 미중 갈등
현재 동아시아 지역에서 중소규모 다자주의 제도를 통해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시도가 구체적인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다. 중국 역시 아직은 관망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한국이 IPEF 가입을 결정했을 때 ‘신냉전’을 유발할 수 있는 행동을 자제할 것을 촉구했지만 사드(THAAD) 사태 때와 같이 한국을 압박하는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않고 있다. 다만 중국이 미국의 압력에 쉽게 굴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중국 내부에서도 미중 대결구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시기 미국의 무역보복에 직면해 중국의 강국 우월주의 선전 방식이 미국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는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IPEF의 출범 즈음해서는 주펑 난징대 국제관계연구원장 등이 ‘도광양회(韜光養晦)’로의 복귀를 주장하기도 했다.
미국과 인도네시아 군인들이 8월 12일(현지시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남부 바투라자에서 실시된
‘2022 슈퍼 가루다 실드(슈퍼 독수리 방패)’ 훈련에 참여하고 있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해상 활동이 증가하는 가운데
미국과 인도네시아는 지난 8월 3일 호주, 일본, 싱가포르 등 14개국이 참여하는 대규모 다자 훈련을 시작했다. ©연합
하지만 최근 대만 문제에 관한 중국의 입장 표명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 정부는 기존의 대외정책 기본노선을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시진핑 주석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 정권의 정당성이 대외정책의 성과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2022년 3월에 개최된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시진핑 주석은 “중국이 코로나19를 극복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첫 번째 국가이며 경제성장을 다시 시작한 첫 번째 국가”임을 선언하면서 “이는 중국 인민이 중국이 걸어온 길, 중국의 이론, 중국의 체제, 중국의 문화에 대해 가진 확신 덕분”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중국이 미국의 압력에 결코 굴복할 수 없는 것은 공산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권위주의 정치체제와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liberal international order)’가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의 가장 중요한 목표 두 가지를 꼽자면 한 가지는 주권국가로서 중국의 독립성 보존이라 할 수 있고 다른 한 가지는 ‘권위주의적 자본주의(authoritarian capitalism)’ 체제의 유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독자적인 국제질서를 구축하지 못한 채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의 규범과 룰을 일방적으로 따른다면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유지하려는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 ‘중국식 민주주의’로 정의되는 정치체제를 지키는 데 큰 어려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이는 국내 정치체제의 형태와 내용이 ‘무엇이 정치적으로 올바른가’에 관한 국제사회의 규범과 믿음이 행사하는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현 중국 정부가 중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의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뜻을 같이 하는 국가(like-minded states)’ 간의 협력을 강조하는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기조도 중국의 이러한 노력을 부추기고 있다. 결국 중국이 더 이상 뒤로 물러서기 어렵고 미중 간 경제력 격차는 계속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국제사회의 진영화는 앞으로 적어도 수십 년간 더욱 현저해지거나 현재의 형태로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의 관심은 두 초강대국 간 근본적인 화해와 협력보다는 각각이 주도하는 두 진영의 평화적 공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김 준 석
가톨릭대학교 국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