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평화통일 기행
전통과 자연이 어우러진 천안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끼다
하늘 아래 가장 편안한 고장인 천안(天安)은 충청도와 영호남을 오가는 교통의 요충지다. 유관순 열사와 이동녕 선생 등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던 애국지사의 혼이 살아 숨 쉬는 호국충절의 도시이자 호서지방 최대의 독립만세운동 발생지역이기도 하다. 천안시 중앙을 남북으로 가로 지르는 태조산에는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동양 최대 크기의 청동좌불상이 있고, 산자락 아래에는 독립기념관, 유관순 열사 사적지 등 호국정신과 평화통일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는 명소들이 자리해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자연과 함께 어우러진 도시 천안에서 선열들의 숨결을 느껴보자.
Course 1
그날의 뜨거운 함성과 열기를 간직한 ‘아우내장터’
아우내장터는 ‘두 개의 내를 아우르다’는 뜻으로 경상도와 한양을 이어 주는 길목이었다. 조선시대부터 전국의 상인들이 청주, 진천, 예산 등에서 지역 특산물과 소를 몰고 와 장을 형성했던 이곳은 유관순 열사 등 3천 명의 군중이 대한독립을 목 놓아 외쳤던 곳이기도 하다.
1919년 3월 1일, 당시 18세에 불과했던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에 재학 중이던 친구들과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결사대를 조직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3·1운동의 여파로 모든 학교에 임시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 병천으로 내려와 새로운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아주머니들처럼 머리에 수건을 쓴 채 병천, 목천, 천안, 안성 등지의 교회학교와 유림을 찾아다니며 만세운동에 대한 약속을 받아 냈다. 마침내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에 3천 명이 넘는 사람이 모여 아우내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직접 만든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독립 만세를 외쳤던 유관순 열사와 많은 참가자들은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공격에 부상을 입고 투옥됐지만 아우내 만세운동은 만세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번져나가는 데 커다란 기폭제가 됐다.
인근 장터 중 가장 크게 번성한 곳이었던 아우내장터는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성업 중이다. 이제는 병천 순대거리로 더 유명해진 이곳에는 여전히 선열들이 목이 터져라 외쳤던 그날의 함성과 열기가 남아 있다. 시장 거리 한 편에는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는데, 이곳은 당시 시위 군중에 총칼을 드리웠던 헌병주재소가 있던 장소이기에 역사적 의미가 더욱 깊다.
아우내장터의 전경 ⓒ한국관광공사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 기념공원 내 조형물 ⓒ한국관광공사
Course 2
시대의 아픔에 당당히 맞선 ‘유관순 열사 사적지’
아우내장터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는 유관순 열사 사적지가 있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는 봉화대와 초혼묘, 추모각, 기념관, 동상, 생가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추모각에서는 유관순 열사 순국일인 9월 28일에 맞춰 매년 추모제가 거행된다. 사적지 뒤 우뚝 솟은 매봉산 정상에는 봉화지가 마련돼 있다. 아우내 만세운동 전날 밤 유관순 열사가 거사를 각지에 알리기 위해 봉화를 올렸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사적지를 나와 유관순 거리를 따라 매봉산을 돌아가면 멀지 않은 곳에 초가집 한 채가 보인다. 바로 유관순 열사의 생가지다. 지금 세워진 건물은 빈터만 남아 있던 곳에 초가집을 1991년 복원한 것이다. 유관순 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할 당시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체포된 후에도 “나는 대한 사람이다. 나라를 위해 독립만세를 부른 것도 죄가 되느냐!”고 당당히 외쳤던 유관순 열사의 의지와 열정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유관순 열사 사적지를 걸으며 시대의 아픔을 당당히 짊어졌던 선열들의 숭고한 뜻과 정신을 되새겨 보면 어떨까.
복원된 유관순 열사 생가지 ⓒ천안시청
유관순 열사 사적지 내 추모각 ⓒ천안시청
Course 3
815개의 태극기 물결 ‘독립기념관’
독립기념관은 천안시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로 일제 강점기 수난의 역사와 나라를 되찾기 위한 선조들의 투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다. 기념관 입구에 우뚝 솟은 ‘겨레의 탑’을 지나면 독립기념관을 상징하는 동양 최대의 기와집인 ‘겨레의 집’이 나타난다. 건물 앞 ‘겨레의 큰마당’에는 광복을 기념하는 815개의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 겨레의 집 뒤편으로는 6개의 전시관과 MR독립상영관이 있는데 다양한 체험과 전시를 운영하고 있다.
겨레의 집 서쪽 한 편에는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이 조성돼 있다. 정부는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식민잔재를 청산하고자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고, 각계의견을 수렴해 철거부재를 독립기념관으로 이전했다. 현재 이곳은 청소년 등을 위한 살아 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독립기념관 초입 겨레의 탑 우측에는 ‘통일 염원의 동산’을 지어 통일을 바라는 국민의 마음을 형상화했다. 동산에는 무지개 모습을 본뜬 통일의 탑을 세우고 그 중심에 통일의 종을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통일에 대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과 이름을 벽돌에 새겨 보존하는 ‘통일염원의 동산 벽돌 조적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10인 이상 단체는 남북 방향에서 서로 마주 보며 타종을 하는 통일염원 타종 체험도 신청할 수 있다.
독립기념관에 들리는 사람들은 규모에 한 번 놀라고 다양하게 꾸며 놓은 전시공간에 또 한 번 놀라는 경우가 많다. 가을이 시작되는 9월, 겨레의 큰마당에서 청소년 통일캠프와 사생대회를, 겨레의 집에서 통일세미나를 개최한 뒤 단풍나무 길을 걸으며 선열들의 어록을 머릿속에 새겨보기를 추천한다.
독립기념관 겨레의 큰마당에 있는 815개 태극기
독립기념관 야외에 있는 단풍나무 길
Course 4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이동녕 선생 생가·기념관’
1869년 천안 목천읍 동리에서 나고 자란 석오(石吾) 이동녕 선생은 신흥무관학교 초대 교장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창립멤버인 개화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다. 임시정부 초대 주석을 시작으로 총장(장관), 국무총리, 국무령, 대통령 대리 등의 행정부 수반을 역임해 조국의 독립과 국가 건립에 생애를 바쳤다. 안타깝게도 8·15 광복을 보지 못한 1940년 72세를 일기로 중국 기강에서 서거했지만,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역사를 살펴볼 때 김구 선생 못지않게 영향력이 큰 인물이다.
이동녕 선생 생가지는 ‘ㅁ’자 구조로 배치된 기와집으로 안방, 사랑채 등에 옛 가구와 인물모형이 전시돼 있다. 생가지 왼쪽으로는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위치해 있고 우측에는 기념관이 조성돼 있다. 총 8개의 테마로 구성된 기념관에는 이동녕 선생의 일생과 업적이 전시돼 있다. 기념관을 다 둘러보고 나면 어느새 애국자의 꿈을 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통일은 과거를 돌아보고 기억하는 일에서부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한민족
지금은 두 동강 난 채 허리 잘려 신음하고 있지만
반만년의 긴긴 역사 속에서 분단은 고작 70여 년,
백두산 천지를 먹물 삼고 한라산 구름을 화폭 삼아서
평화통일의 그림을 그려 나가다 보면
그 짧은 기간을 어이 극복하지 못하리오.
이동녕 선생 생가지 내부 ⓒ천안시청
이동녕 선생 기념관 내부 ⓒ천안시청
통일은 단순히 휴전선을 제거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질화된 남북한의 정신적, 정서적 통합을 이루는 과정이 필요하다. 남과 북은 오랜 갈등과 반복, 그리고 분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같은 전통문화와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 진정한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과 북의 주민들이 한민족의 역사를 중심으로 동질성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독립을 위해 희생했던 순국열사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독립 에너지를 통일 에너지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한 이 때 천안에서 선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여행을 해보면 어떨까.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푸짐한 순대국밥으로 든든히 배를 채우고 유관순 열사 생가와 독립기념관, 이동녕 선생 기념관에서 독립 운동가들의 열망을 고스란히 느끼고 돌아오는 길에 호두과자를 사 오는 코스를 추천한다. 맛과 멋이 있는 편안한 고장 천안으로 오시라.
하 채 수
민주평통 천안시협의회 지회장,
선문대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