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1932022.11.

우리고장 평화통일 기행

역사와 자연이 빚어낸
오래된 ‘국경 마을’ 거창

덕유산에서 지리산으로 뻗어나가는 끝자락에 자리한 거창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태의 고장으로 낙동강 지류인 황강이 시작되는 곳이다. 오랜 역사를 자랑해 선사시대, 청동기, 철기시대부터 많은 유적을 남겼고, 삼국시대에는 가야, 신라, 백제의 접경지대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다. 지리적 위치로 인해 한때는 백제의 의자왕이 점령하기도 했으며, 지방 세력들의 각축장이 됐던 국경 마을이었다.

거창은 신라와 백제의 끊임없는 전쟁과 대립을 통해 나라와 나라, 문화와 문화가 이어지고 끊어지는 교류와 단절의 땅이었다. 이로 인해 전쟁에 희생된 백성들의 피 맺힌 슬픔과 한이 역사가 되어 상징적 유산으로 남아있다. 상처와 슬픔으로 범벅된 역사의 흔적들이 백성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돼 설화가 됐고 때로는 승자의 역사로 기록돼 전해졌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지나 평화를 향한 염원들은 문학과 예술로 승화돼 거창을 평화와 사랑의 도시로 살아나게 했다. 오래된 국경 마을의 흐릿한 역사와 세월이 빚어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거창. 역사가 빚어낸 거창만의 빛깔을 소개한다.

역사와 자연이 살아있는 ‘거열산성’
아홉산의 한 자락을 가로질러 자리해 있는 거열산성은 백제 부흥 운동의 격전지로 치열한 전투에 쓰러져 간 백제 사람들의 아련한 이야기를 돌덩이 하나하나에 품고 있다. 약 1,400년 전 신라와 백제의 갈등으로 참수당한 7백여 명의 백제 병졸들과 이름 없이 죽어간 백성들의 피 맺힌 한을 고스란히 지켜본 살아있는 역사의 교육장이다. 국경 마을의 설화가 산 구름에 묻어있는 아홉산을 오를 때면 돌멩이 하나를 성벽에 올려놓으며 평화를 염원했던 옛사람들의 이야기가 살아나는 듯하다.

옛 신라와 백제의 경계에 있는 아홉산은 자신의 과거를 거창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이제는 거창의 병풍처럼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다. 아홉산을 이루는 봉우리 중 가장 높은 취우령(795m)에는 사랑을 찾아 국경을 넘은 선화공주의 애틋한 사랑이 담겨있다. 선화공주가 국경 마을에서 아기를 낳고 숨을 거두었다는 내용의 설화는 치열한 전쟁 속에도 꽃처럼 피어난 평화와 사랑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갈망을 잘 보여준다. ‘비를 취하다’는 뜻의 취우령(取雨嶺)에는 선화공주의 슬픔이 뿌려지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라와 백제의 전투가 있었던 거열산성, 그리고 국경을 넘은 사랑 이야기를 품은 아홉산에서 가족과 함께 늦가을의 정취와 추억을 한 장의 사진으로 남겨보는 건 어떨까.

아홉산 최고봉 취우령의 모습

하늘에서 내려다본 거열산성의 성벽

속세의 근심을 잊고 망중한을 즐기다 ‘수승대’
바위 위로 흐르는 냇물과 솔숲이 우거진 경치를 뽐내는 수승대는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대립할 무렵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사신을 전별하던 곳이다. 처음에는 백제의 사신이 신라 조정에 가서 수모를 당하거나 목숨을 잃고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이런 사신들을 위로하던 곳이라 하여 수송대(愁送臺)라 불렀다. 지금의 수승대라는 이름은 퇴계 이황이 왕의 부름으로 이곳을 방문하지 못했던 일화에서 기인한다. 1543년 퇴계 이황이 수송대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아쉬움에 거창 선비 요수 신권에게 시 한 수를 보냈는데, 그 시에서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며 수송대(愁送臺)를 수승대(搜勝臺)라 고칠 것을 권하여 바꿔 부르게 됐다고 한다. 빼어난 경치와 자연을 자랑하는 수승대는 많은 이들이 망중한을 즐기며 특별한 하루를 보내는 명소가 되어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거북이가 머리를 내밀고 엎드린 것처럼 보인다는 수승대 구연암
거창의 얼과 정신을 담고 있는 ‘침류정’
거창읍 상림리에 위치한 침류정은 선비들과 시인묵객들이 흐르는 강물을 보며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선비들의 쉼터였던 이곳은 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는 국난극복을 위한 힘과 지혜를 모으는 곳으로 활용됐다. 침류정 앞에는 면우 곽종석 선생 주도로 일어난 파리장서운동을 기념하는 파리장서비와 연호 이주환 의사의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파리장서비는 우리나라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린 파리장서의 발상지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됐다. 면우 곽종석은 1919년 한국 유림 137명의 의견을 모아 파리 평화 회의에 독립탄원서를 보냈다. 당시 곽종석은 거창에서 영남 유림을 이끄는 한편 호서 유림과 연합해 유림(儒林)의 대표로서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렸다. 파리장서비 곁에는 거창 출신 이주환 의사 사적비도 함께 세워져 있다. 연호 이주환 의사는 1919년 나라와 임금을 잃은 외로운 백성의 심정을 표현한 절세시를 침류정 벽에 쓰고 자결한 인물이다. 1910년 일본에 의해 한일병합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이주환 의사는 나라가 망하고 국왕도 없으니 세금을 바칠 수 없다고 항변하다 일본 헌병대에 연행되었다. 일본 관헌의 협박 끝에 강제로 손도장을 찍게 되자 자신의 엄지를 스스로 절단하기도 했다.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거창군 주상면사무소를 찾아가 호적장부를 찢은 뒤 침류정에서 절세시 한 수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거창을 대표하는 독립운동인 거창 3·1 만세 운동도 같은 시기 진행됐다.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3.1 만세 운동은 전국으로 번져나갔고 거창의 유생, 농민, 학생들도 뜻을 같이 했다. 가조면 장터 만세 운동(3월 20일), 거창읍 장날 만세 운동(3월 22일), 위천면 장날 만세 운동(4월 8일) 등 거창 3.1 만세 운동은 유림은 물론 지역민들이 참여한 민중 항일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쉼터였던 침류정
과거를 돌아보며 희망의 내일로 ‘거창사건 추모공원’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일어난 ‘거창양민학살사건’은 우리나라의 가슴 아픈 역사 중 하나다. 당시 국군은 후방에 흩어진 인민군 병력과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제11사단을 창설하고 경상남도와 전라도 전역에서 작전을 벌였다. 토벌작전의 개념은 ‘견벽청야(堅壁淸野)’ 전략으로 작전지역의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파괴해 적이 이용할 수 없게 만드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제11사단 9연대는 양민들이 공비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거창군 신원면 지역의 양민 700여 명을 모아 마을 뒤 산골짜기에서 집단 학살했다. 이후 희생자 유족들의 수십여 년에 걸친 노력 끝에 마침내 1996년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2004년 조성된 거창사건 추모공원은 역사교육관, 참배광장, 위령탑, 묘역 등으로 구성돼 있다. 역사교육관에서는 연출모형, 기록물, 신문자료, 판결문, 사진 등을 통해 거창 사건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추모공원 외부에는 추모객과 내방객을 위해 ‘사계절 꽃이 피어 있는 공원’을 모토로 튤립, 무스카리, 수선화, 무궁화 등이 핀 꽃동산이 조성돼 있다.

늦가을 정취와 국화 향기 가득한 추모공원에서 작은 위로와 새로운 희망의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평화와 화해의 봄날은 과거를 기억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위령탑, 역사교육관 등이 마련돼 있는 거창사건 추모공원 전경

민주평통 거창군협의회가 개최한
‘지리덕유가야에서 백두까지, 평화의 길’ 행사

구석구석 새긴 평화통일의 발걸음
지난 8월 민주평통 거창군협의회가 개최한 ‘지리덕유가야에서 백두까지, 평화의 길’ 행사는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며 평화를 쌓기 위한 의지를 보여주는 행사였다. 심포지엄에 이어 사흘간 진행된 ‘청년 평화의 길’ 걷기는 국경 마을 거창에서 새로운 평화통일의 길을 시작하자는 청년자문위원의 마음과 염원을 확인한 자리였다. 거창사건 추모공원에서 출발해 파리장서비, 위천면 3·1독립운동기념비까지 근현대 역사 현장 77km를 걸은 청년들은 구석구석 평화통일의 발걸음을 새기며 자신과 역사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단절과 슬픔의 역사를 간직한 거창은 이제 평화와 화해, 용서와 화합의 길을 걸으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있다. 바람 소리, 산새 소리, 물 소리가 한데 어울려 대자연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거창에는 역사가 빚어낸 고색창연한 시간과 세월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선비의 마음으로 소소하게 망중한을 즐길 수 있는 안식과 위안도 있다. 누구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 돼 반겨주는 자연이 있고, 역사가 있고, 사람들이 있다.
김 동 환 민주평통 거창군협의회
기획운영분과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