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정착 이야기Ⅱ
탈북민 변호사와 한의사, 성공 비결
“탈북할 때처럼 목숨 걸어라!”
성공하려면 간절함과 절실함 필요
대한민국에서 의사와 변호사 되기는 정말 어렵다.
북한에서 나고 자라서 우리나라로 넘어온 북한이탈주민들에게는 두세 배 노력으로도
어려운 일이다. 북한에서 의사를 하다가 탈북해 한의사가 된 박지나 친한의원 원장과
14세에 탈북해 어엿한 대한민국 법조인이 된 이영현 변호사, 두 분에게
대한민국 정착 성공 비결에 대해 직접 들어봤다.
박새암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이영현 저는 서초동에서 송무 변호사로서 일을 하고 있고요. ‘대한변협 인권재단’이라는 공익법인에서 사무총장으로도 일하고 있습니다. 주로 두 일을 병행하고 있고요. 통일부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에서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박지나 제가 한의원 원장이다 보니까, 한의원에서 진료를 보는 게 기본적인 제 일이고요. 경희대 한의과대학에서 지금 4년 차 겸임교수로 학부 강의를 하고 있어요. 또 서울시 한의사협회 부회장으로, 협회 회무들이 많습니다.
박새암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은 직업을 꼽는다면 단연 의사와 변호사인데요. 두 분의 직업 만족도는 어떠신지? 특히 원장님께서는 북한에서 의사로 활동하셨고, 한국에서는 한의원 원장으로 계시지 않습니까. 비교하면 어때요?
박지나 (한국에서) 한의사로서 가장 만족하는 부분은 의료 활동의 자유죠. 북한에서는 의료 활동의 자유가 없다고 보면 됩니다. 두 번째는 약이 풍족하지 못한 북한에서 환자에게 필요한 약이 없으면 대용할 약을 찾느라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한국은 환경이 너무 좋지 않습니까. 그리고 경제적 자유도 참으로 만족합니다.
이영현
이영현 저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법률적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뿌듯하고, 또 자부심을 느끼고요. 이 직업을 선택하길 잘했다는 만족감도 느껴요.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으니까, 그런 부분에서 굉장히 만족하고 있어요.
박새암 수많은 직업 중에 변호사가 돼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이영현 대부분의 탈북민처럼, 저도 정말 힘들게 목숨 걸고 대한민국에 왔는데 앞으로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북한에서 참 힘들게 살고 있는 북한 주민들과 북한을 탈출해서 해외에서 떠도는 탈북민들을 위해서 먼저 온 탈북민으로서 뭘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북한 주민과 탈북민의 인권 개선과 인권 보장을 위해서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됐고요. 그 뒤로 법대에 들어가게 됐고, 로스쿨까지 가서 변호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지선다’가 뭐예요?”
박새암 원장님께서는 아무래도 북한에서 의사를 하셨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기서도 관련 직업을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셨을 것 같아요.
박지나 사실 북한에서 의사는 저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하반신 마비로 3년 이상을 거의 움직이지 못하시다가 한의학의 힘으로 다시 정상인이 돼서인지 저에게 ‘무조건 의사가 돼라’ 해서 의대를 가게 됐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대학 3학년 때 갑자기 위암으로 사망하셨어요. 그때 ‘의사란 어떤 직업인가’, ‘나는 왜 의사가 돼야 하지?’ 다시 한번 냉정하게 의사에 대해 생각하게 됐죠. 그다음부터는 정말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하겠다는 집념이 생겼고, 오직 학문의 깊이를 위해서 노력하고 연구를 했어요. 여러 가지 탈북 목적 중에서 의료 현장이 좋은 환경에서 마음껏 의술을 펼치고 싶다는 목적도 있었고, 제가 하던 암 연구도 한국에서 마무리하고 싶어서 탈북을 했기 때문에 직업 진로에 관해서는 한의사 외에는 생각할 이유가 없었죠.
박새암 북한에서의 의사 경력이 한국에서도 인정이 되나요?
박지나 한국에서도 북한의 학력과 경력은 인정해줍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받은 의사 면허는 인정 안 해줍니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다시 의사든 한의사든 국가고시를 합격해야만 면허를 가지고 의료 활동을 할 수가 있습니다.
박새암
박새암 북한에서 공부했던 게 도움이 되던가요?
박지나 북한에서 어릴 때부터 대학 전 과정에 걸쳐 제 인생에 객관식이라는 문제를 풀어본 적이 없어요. 다 논술형이고 주관식 문제였기 때문에. 그래서 시험방법이 객관식 ‘오지선다’라 해서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시험 방법이 가장 생소했던 것 같습니다.
박새암 변호사님은 굉장히 어린 나이에 탈북을 시도했는데, 한국으로 오는 과정을 여쭤봐도 될까요?
이영현 참 많은 스토리가 있는데요. 북한에서 소위 고난의 행군 시기라고 하죠. 그때 저희 할머니가 영양실조로 돌아가셨어요. 저희 삼촌도 영양 부족으로 아사하셨고요. 그런 상황에서 ‘더 이상 북한에서 살 수 없기 때문에 벗어나야 되겠다’ 해서 저희 외삼촌을 따라서 중국으로 탈출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으로 가기 위해서 두만강을 건너던 중 안타깝게 외삼촌도 강물에 휩쓸려 돌아가셨고, 열네 살 나이에 혼자서 중국에서 생활을 시작하게 됐어요. 혼자서 정말 힘들게 살았습니다.
북한 판·검사, 변호사 모두 ‘임명직’
박새암 원장님은 어떠셨어요?
박지나 북한에서 저희 집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탈북할 때 중국에 돈만 가지고 가면 한국으로 탈북민들을 보내는 브로커가 많다고 해서 북한 돈을 중국 돈으로 다 환전해서 많이 가지고 떠났어요. 그런데 중간에 숙식한 집에서 돈도 도둑맞고, 중국에 오니까 브로커를 그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어요. 제가 중국에서의 삶을 가장 힘들게 추억하는 게 뭐냐면 평생 안 해본 식당일을 하다가 실신한 일이에요.
박새암 원장님은 북한에서 의사 경험이 있고, 한국에서도 한의사로서 활동하고 계시다는데, 한국에서 일하면서 아쉬웠던 점은 없어요?
박지나 “크게 두 가지로, 제가 북한에서 와서 한국에서 한의사가 되기까지의 공부 과정이 아쉬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의사 국가고시를 보면서 그 구체적인 시험 방향이나 방법, 제가 시험장에 들어갈 때까지도 과목이 뭔지도 제대로 몰랐으니까요. 구체적인 지원 인프라가 없다고 해야 할까요. 또 한의사를 하면서 아쉬운 것은 북한은 양·한방 일원화 체계여서 환자분을 양방으로 치료하면서도 한의학적으로 침도 놓으면서 동시 진료가 가능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한국은 이원화 체계다 보니까 양·한방 넘나들면서 치료하던 것을 딱 절반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박지나
박새암 박 변호사님은 시험 몇 번 만에 합격하셨어요?
이영현 저는 변호사 시험을 다섯 번 봤어요. 로스쿨을 졸업하고 5년 안에 다섯 번의 시험에 응시를 할 수 있는데요. 그 기회를 놓치면 더 이상 변호사가 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다섯 번째 마지막에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고요. 법조인의 꿈을 꾸고 14년 만에 변호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박새암 북한에도 변호사가 있어요?
이영현 네, 북한에도 변호사가 있습니다. 판사와 검사도 다 있고요. 그런데 한국과는 제도 자체가 다릅니다. 한국에서는 시험을 봐서 자격증을 부여하는데 북한에는 시험 제도는 나와 있는데, 실질적으로 시험의 운용 여부는 불명확하고요. 대부분 소위 ‘간부사업’이라는 사업을 통해서 법조인들이 선발됩니다. 판사도 마찬가지고 검사나 변호사들도 간부 양성사업을 통해서 선발하는, 소위 임명직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박새암 탈북민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계세요?
이영현 대한변협 인권재단에서 탈북민을 대상으로 한 법률교육이라든지 법률 멘토링 사업들을 기획하고요. 변호사들을 모집해서 멘토링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통일부 남북하나재단과 하나센터 등 탈북민들을 위해서 설립된 기관들에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법률 상담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죽도록 공부하라! 탈북할 때처럼
박새암 민주평통 자문위원들이 국내외에 2만여 명이 계세요. 탈북민을 위해 어떤 뒷받침을 해줬으면 좋겠다, 건의 사항이 있으신가요?
이영현 지금 한국에 3만4000여 명의 탈북민이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 낯선 제도와 사회 환경, 문화 속에서 적응하느라 굉장히 힘들게 살고 있고요. 법과 제도가 너무 상이한 대한민국에서 범죄 행위로 인한 피해를 많이 겪습니다. 탈북민들이 한국에서 잘 정착하고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탈북민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향후 통일되고 난 이후의 사회 통합을 위해서도 국가와 사회, 모든 국민이 함께 힘을 모으고, 지혜를 합쳐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민주평통에서도 탈북민들에게 관심을 갖고 법 교육, 법률 멘토링 이런 사업을 추진해나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박새암 의사나 변호사를 꿈꾸는 탈북민들에게 조언을 해주신다면?
박지나 죽도록 공부하라! 탈북할 때 한 번 목숨을 걸었다면, 한국에서 제2의 인생을 살 때 다시 한번 공부에 목숨을 걸어봐라. 공부 조건은 북한에 비할 바 없이 환경은 좋다. 본인만 노력하면 된다.
“탈북민들이 한국에서 잘 정착하고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향후 통일되고 난 이후의 사회 통합을 위해서도 모든 국민이 함께 힘을 모으고,
지혜를 합쳐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영현 먼저 변호사가 되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가져야 합니다. ‘한번 해볼까?’ 이렇게 가볍게 접근해서는 안 돼요. 굳은 각오 그리고 정말 간절함과 절실함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단기간에 법조인이 되기 어렵거든요. 저 또한 그랬으니까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도전하다 보면 언젠가는 법조인이 돼 있을 것입니다.
박새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각오와 포부를 듣고 마무리하겠습니다.
박지나 올해도 아파하는 분들 많이 낫게 해드리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존경하는 교수가 되고 싶고, 또 협회에서는 동료들한테 인정받는 동료가 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준비한 역량을 가지고 민주평통 상임위원으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더 깊이 고민하는 한 해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이영현 일단 변호사로서 의뢰인들에게 만족하는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고, 공익적인 일들도 열심히 잘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고요. 특히 민주평통 자문위원으로서 북한의 인권 실상을 알리는 일, 통일의 필요성이라든지, 민족의 동질성이라든지, 북한 주민 그리고 탈북민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한 여러 가지 사업들도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열심히 해나갈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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