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길에서 만나는 통일
② 동해 해파랑길-울산
공비가 짓밟은 아름다운 산하
피로 물들인 충혼 서려 있네
1949년 2월 서울역. 남조선노동당 재정부장 성유경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경기중학교 입시를 준비하던 아들 성일기를 개성에서 요양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보낸다. 북한에서 러시아어를 독학한 성일기는 모스크바 유학이 좌절되자 회령에 있는 제3군관학교 1기생으로 입교해 훈련받은 다음 빨치산 유격대 제200지대에 배속된다. 1950년 6월 25일 빨치산 유격대는 인민군의 전면 남침에 따라 동해안을 종주해 울산 울주군 언양읍 신불산을 근거지로 빨치산 활동을 전개한다. 그러나 인민군이 낙동강 전투에서 참패하자 그가 속한 남도부 부대는 신불산 일원에 고립돼 절명의 위기를 맞는다. 성일기는 휴전 후 특무대에 체포됐다가 구사일생으로 처형을 피한다.
소설 ‘북위 38도선’의 줄거리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전처 성혜림의 오빠 성일기의 빨치산 활동을 중점적으로 기술했으며 성일기와 성혜림 등을 실명으로 적었다. 경상남도 창녕이 고향인 성일기는 아버지 성유경과 1920년대 민족주의 잡지 ‘개벽’의 기자였던 어머니 김원주가 6·25전쟁 때 성혜림, 성혜랑 자매들을 데리고 월북함에 따라 홀로 남한에 남았다. 훗날 어머니를 찾아 평양에 갔다가 빨치산이 됐다. 의사이자 아동문학가인 정원식은 서울대 의과대학 재학 시절 친구로부터 성일기를 소개받아 대학가 근처 다방이나 술집에서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해진다. 토막토막 성일기의 구술을 한 편의 소설로 엮는 데만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신불산을 근거지로 한 빨치산 활동을 전개한 이는 성일기만이 아니다. 6·25전쟁 전후로 서부 경남 전선에서 패한 북한군과 여수·순천 사건에 참여했던 병사 일부는 신불산과 가지산, 고헌산, 대운산 등에 아지트를 마련하고 민가와 군 초소를 습격했다. 국군과 경찰, 민간의용대는 1949년 말부터 1954년 초까지 공비 토벌 작전을 벌여 북한 남부군 제5지대장 김원팔 등 450여 명을 소탕했다. 4년에 걸친 토벌 작전으로 우익 인사와 경찰관, 의용대, 군인 등 146명이 조국과 지역을 사수하다 목숨을 잃었다. 그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1952년 2월 4일부터 3월 6일까지 전개된 신불산 공비토벌작전이다. 당시 수도사단 기갑연대와 울산경찰서가 미 공군의 지원을 받아 995고지와 681고지를 점령함으로써 울산의 평화와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후 신불산 공비토벌작전 전우들의 영혼을 추모하고 조국 수호의 의미를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신불산참전전우회가 결성됐다.
군번조차 없는 병사들의 전투
전쟁이 없었다면 소설에 등장하는 젊은 인재들은 남북으로 갈라져 대립하지 않고 함께 어우러져 학업에 매진했을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이처럼 잘 모르는 부분도 많은 것이 6·25전쟁의 역사다. 3월의 끝자락, 울산에 잔인한 이미지로 각인된 신불산 공비토벌작전 현장을 찾기 위해 해파랑길 6코스에서 울산 울주군 신불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불산은 예로부터 신성한 산으로 불린다. 울주군 상북면과 삼남읍 경계에 걸쳐 있으며 간월산, 영축산과 함께 영남알프스 동부 능선의 한 축을 이루는 봉우리다. 신불산에는 끝 간 데 없이 만발한 청억새로 가득하다. 꽃도 핀다. 한바탕 바람 군무를 추면 춘광은 어김없이 짙어져간다. 깊은 골골마다 흐드러지게 핀 꽃과 나무가 한 폭의 수채화를 이루며 봄의 정점을 찍는다. 이처럼 아름다운 풍광에서 또다시 떠올리는 것은 전쟁의 참상이다.
“서울 사람들은 신불산 공비 토벌 전투를 모르지예? 후방지역인 울산에서 유일하게 전개된, 군번조차 없는 병사들의 전투라.”
1952년 2월 4일부터 3월 6일까지 울산 울주군 신불산 인근에서
공비토벌작전이 전개됐다.
신불산참전전우회가 2001년 6월 건립한 신불산 공비토벌작전 기념비.
석남사에서 만난 한 울산 시민이 들려준 이야기다. 824년 신라 때 세워진 석남사는 6·25전쟁 당시 사찰 대부분이 소실돼 고찰의 모습이 모두 파괴됐다. 이곳 신불산 높은 봉우리 자락 아래 세워진 돌 하나에도 전쟁의 상흔이 가득하다. 신불산참전전우회가 2001년 6월 건립한 신불산 공비토벌작전 기념비다. 아름다운 산하를 공비들이 짓밟을 때 오로지 땅과 고장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능선과 계곡을 피로 물들인 충혼을 떠올리자 마음이 숙연해진다.
신불산을 내려왔다. 무거운 마음을 모르는지 태화강 물 흐르는 소리는 쾌활하다. 태화강 물줄기가 이곳까지 이어진다. 울산 남구로 진입하면 ‘울산대공원’ 표지가 눈에 띈다. 면적 205㎡ 넘는 부지에 조성된 울산대공원에는 또 하나의 공원인 안보테마공원이 조성돼 있다. 참전기념탑, 무기전시장, 현충탑이 한곳에 모여 있다. 길 찾기도 어렵지 않다. 표지판이 잘돼 있고 산책로를 따라 이동하도록 해놓아 안보테마 전시관에 들러도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현충원 방향으로 걸어가자 바람에 나부끼는 태극기 거리에 산책하는 시민, 유모차를 끌고 나온 가족 단위 탐방객이 보였다.
전쟁 상흔 위에 희망 피워낸 도시 '울산'
안보테마공원의 명물 무기전시장에는 월남전에 사용한 F-4D 팬텀기를 비롯해 현역에서 퇴역했으나 대한민국 안보와 전쟁 억지를 위해 최전선에 배치했던 육·해·공 무기가 한데 모여 있다. 1958년 생산돼 1971년 주한미군 제7보병사단이 철수하면서 우리 육군에 인도돼 2007년까지 한국군의 주력 전차로 사용된 ‘M-48A2C’, 1943년부터 1999년까지 54년 동안 운영된 함포 ‘40MM L60(T)’ 등이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전시장에 놓인 공격기, 전차, 전투기, 수륙양용 장갑차 등은 후손들의 내일을 있게 한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 육·해·공군에서 대여받아 전시한 것이라고 한다.
무기전시장을 지나면 울산지역 6·25전쟁과 월남 참전용사의 애국심을 기리는 참전기념탑이 있다. 참전기념탑의 주탑은 6·25전쟁과 월남전을 상징하는 두 개의 날개 조형물과 호국용사들의 자유, 평화를 기원하는 손을 형상화해 세계 평화를 염원한다.
6·25전쟁 당시 피란민의 피란터가 돼준 언양성당.
전쟁 중 폐허가 됐다가 다시 복구됐다.
6·25전쟁 당시 신흥사가 위치한 일대가 빨치산의 주 무대가 되면서
사찰 일부 건물이 훼손됐다. 현재는 복구된 모습의 신흥사.
안보테마공원 산책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으면 호국관이 나온다. 관람객과 탐방객의 편의를 위해 1층 현충탑과 위패실 계단 아래에 호국관(지하)을 조성했다. 6·25전쟁 직후 대한민국은 전후 복구와 먹고살기 위한 몸부림이 한창이었지만 울산은 전쟁의 상흔 위에서 재건과 희망을 피워냈다. 이는 호국관 입구 통로에 전시한 울산 도시 개발 전시물에서도 잘 드러난다. 중앙 통로에는 6·25전쟁 초기,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 중공군의 개입과 재반격, 전선의 교착과 휴전 등 일련의 전쟁 흐름을 전시했다.
호국관에서 전쟁의 참상을 느꼈다면 1층 위패실에서는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충의와 위훈을 기릴 수 있다. 위패실은 울산지역 4479명의 호국영령들의 위패를 모신 시설이다. 울산대공원은 매년 6월 6일 현충일 기념식을 개최해 시민들이 나라사랑 정신을 이어가도록 유도한다. 현충탑 앞을 지나는 한 할머니는 “매일 대공원 산책길을 걷는데, 이곳을 지날 때면 자연스럽게 순국선열을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현충탑에서 울산대공원 후문까지는 가파른 경사길이 이어진다. 숲길 정취에 취해 걸으니 힘든지도 모르고 올랐다. 정상에는 평화 상징물이 있다. 남북 분단의 대치 상황이 씻을 수 없는 생채기도 남겼지만 평화의 가치와 중요성도 남겨뒀다. 가까이 들려오는 도시 소음이 안보테마공원 여정이 끝났음을 알려줬다. 조국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과 희생을 잊지 않는 시민의 마음을 느낀 보람된 걷기였다.
울산대공원 내 ‘안보테마공원’에 설치된 참전기념탑.
글·김 건 희 기자 사 진· 이상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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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암호수공원 참전용사 기념 비석
일제강점기 때 농사 목적으로 선암제라는 못을 만들었고 1962년 울산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된 후 비상공업용수의 공급이 늘어나면서 1964년 선암제를 확장해 선암댐을 조성했다. 이후 수질 보전과 안전을 이유로 전역에 철조망을 설치했다가 나중에 이를 제거하고 수려한 자연경관을 활용해 생태호수공원을 조성했다. 공원 입구엔 6·25전쟁 당시 울산 남구 출신 참전용사들의 명단을 기록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 옆으로는 무궁화동산이 조성돼 있다.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를 식재해 공원 이용객에게 국민의 자긍심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고취하고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조성한 동산이다.
신흥사
635년 선덕여왕 4년 신라 신인종의 시조인 명랑법사가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평화를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을 모아 왜적에 항거했다. 울산성이 함락됐을 때 승려인 지운을 비롯한 승병 100여 명이 기박산성에 있던 의병과 합세해 전투에 참여했고, 승려들의 의병 활동이 알려져 왜군에 의해 절이 소실됐다가 1646년 중건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신흥사가 위치한 일대가 빨치산의 주 무대가 되면서 일부 건물이 또다시 피해를 보았다. 지리산 자락의 다른 사찰들처럼 수많은 경전과 판각이 사라지고 폐허가 된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신흥사의 문화재로는 석조아미타여래좌상, 신흥사 구 대웅전, 신흥사 구 대웅전 단청반자, 400년 된 보호수인 회화나무가 있다.
언양성당
울산의 언양에는 과거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이주해온 신자들이 모여 사는 신앙공동체(불당골)가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병인박해 때 많은 피해를 보았는데, 4명의 신자가 순교하기도 했다. 박해가 끝난 뒤 재건됐고 1926년 12월 부산 본당으로부터 분리돼 그해에 정식 언양 천주교회가 설립됐다. 성당 설계를 직접 주도한 에밀 보드뱅(정도평) 신부는 명동성당을 지은 중국인 기술자, 신자들과 힘을 모아 1932년 석조 건물 형태로 성당을 완공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보드뱅 신부는 부산으로 피신했다가 1952년 본당에 재부임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본당의 재건을 위해 힘을 썼다. 언양성당은 6·25전쟁 당시 피란민의 피란터가 돼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