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한미정상회담과 한미동맹
포괄적 전략동맹 구체화하며
동맹의 미래 좌표 제시
윤석열 대통령 취임 11일 만인 지난 5월 21일 한미정상회담이 개최됐다. 회담의 주요내용과 성과를 살펴보고 한미협력과 한미동맹의 방향을 모색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 20일부터 2박 3일간의 성공적인 방한 일정을 마쳤다. 한국의 새로운 정부 출범 열흘 만에 이뤄진 전례 없는 방한이었고 세계질서 격동기를 맞아 한미동맹의 새로운 이정표를 굳건히 해야 하는 엄중한 상황에서 추진된 양국 정상 간 만남은 많은 성과를 낳았다. 구체적인 성과를 정리하는 동시에 만에 하나 있을 수 있는 논쟁적 부분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짚어본다.
외교가에는 ‘실패한 정상회담은 없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정상회담의 경우 다양한 부처의 관료들이 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동시에 국가이익에 부합하는 성과를 도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설사 실패했다 하더라도 정부는 언론과 국민을 상대로 성공한 회담으로 보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홍보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들을 두루 고려한다 하더라도 이번 한미정상 회담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상징적이고 역사적인 큰 성과를 만들었다.
포괄적 전략동맹 구체화하며 국익에 부합하는 외교 실천
첫째, 한미 간 ‘포괄적 전략동맹’에 대한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개념이 정립되고 액션 플랜이 마련됐다. 지난 5월 3일 발표된 윤석열 정부의 ‘110대 국정과제’에서 이미 ‘포괄적 전략동맹’에 대한 입장 표명이 있었지만, 한미동맹의 미래 지향적인 업그레이드를 기대하던 국민들에게 ‘포괄적 전략동맹’은 다소 막연하고 추상적인 의미로 다가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번 양 정상 간 협의와 약속을 통해 한국전쟁 이후 성공적으로 유지되던 한미동맹에 시대적 변화와 한국의 역할 강화가 반영됐고, 향후 방향에 대한 상세한 비전도 제시됐다.
한미 전략동맹은 ‘군사안보’, ‘북한 문제’, ‘경제안보’, 그리고 ‘글로벌 협력’의 4개 영역에 걸쳐 구체화됐다. 물론 한미 간 모든 정책이 전략적 관점에서 다뤄질 수는 없겠지만 그만큼 양국 간 긴밀한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한미동맹이 나아갈 좌표를 명확하게 설정한 것이다. 냉전 종식 이후 국제사회 대부분의 동맹 관계는 군사 분야를 넘어서서 비군사 정책 영역으로 확산됐고, 동맹이 관할하는 정책 영역의 포괄성은 대폭 확장됐다. 오히려 이러한 동맹의 포괄적 확장성으로 동맹국 간 협력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발생하곤 했는데, 이번 한미정상회담은 동맹의 정책 영역 포괄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줬다.
둘째, ‘경제안보’를 주축으로 한 국가이익에 부합하는 ‘동맹 관계’를 설정한 성과가 두드러졌다. 사실 경제 안보라는 표현 자체는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고, 안보의 다양성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이미 상당한 연구 성과가 축적돼 있다. 그럼에도 경제안보를 한미동맹의 미래 방향성이라는 차원에서 핵심 정책 영역으로 설정했고, 한미동맹이 어떻게 우리 국민들의 실질적인 이익에 부합할 수 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뜻깊은 성과로 판단된다.
경제적 이익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들이 최우선 가치로 삼는 중요한 관심사다.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는 한국 현실에서, 한국과 미국이 ‘경제안보’를 매개로 과거보다 한 차원 높은 약속을 확인했다는 점은 향후 정책 추진의 성패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시도이다.
경제안보를 정교하게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 레토릭처럼 들리지만 국가 정책의 모든 이슈가 경제 이슈인 동시에 안보 이슈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신흥 기술협력’, ‘글로벌 공급망 정비’, ‘원전 협력’, ‘우주 협력’, ‘외환시장 협력’ 등 5개 분야로 실천 과제를 제시함으로써 경제안보의 개념적 모호성을 해소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연장선에서 ‘기술동맹’이나 ‘국방상호 조달협정’과 같이 한국과 미국 모두에게 호혜적인 동맹 관계가 설정됨으로써 윤석열 정부의 등장과 함께 제시했던 ‘국익에 부합하는 외교’를 실천할 수 있게 됐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경제안보’를 주축으로 한 국가이익에 부합하는 ‘동맹 관계’를 설정한 성과가 두드러졌다.
사진은 지난 5월 20일 경기도 평택의 반도체공장을 방문한 한미 정상의 모습 ⓒ연합
‘글로벌 중추국가’로 가는 토대 마련
셋째, 한국은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적극적인 ‘글로벌 지위 향상’을 꾀할 수 있게 됐다. 미중갈등, 포스트 코로나 질서, 우크라이나 전쟁 등과 같은 요인으로 인해 국제사회는 한마디로 격동의 시간을 맞고 있다. 여전히 미국을 대체할 초강대국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과거와 비교해 미국의 국력이 상대적으로 하락한 점 역시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확보할 수 있는 외교적 공간이 발생한 것이고, 한미 정상 간 만남을 통해 이러한 기회를 지렛대 삼아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의 국가이익을 극대화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국내외 언론들은 현재의 국제질서를 ‘지정학의 귀환’ 혹은 ‘강대국 정치의 귀환’으로 부르고 있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한국과 같은 중견국가의 역량을 갖춘 국가에게는 ‘외교 강국’이 되기 위한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윤석열 정부는 이러한 기회를 ‘글로벌 중추국가’로 활용하겠다는 비전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외교 잘하는 나라’ 혹은 ‘글로벌 중추국가’가 되는 길이 쉽지만은 않다. 이미 우리는 1995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 원년(元年)’ 발표를 계기로 국제사회의 위상 강화를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많은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세계가 부러워할 ‘경제 성장’이나 아시아를 대표하는 ‘민주주의 발전’만큼 ‘외교 강국’을 이뤄냈다고 할 만한 확실한 성과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는 북한 문제로 인한 의도하지 않은 ‘코리아 디스카운트’, 초강대국 미국과 중국 사이에 낀 외교적 곤경, 외교정책에 투입할 외교안보 자산의 부족 등과 같은 원인이 있었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을 계기로 바이오 협력, 첨단 분야 공동 연구, 글로벌 보건안보, 이와 관련한 민간 부분의 적극적인 활용 등이 제시됐다. 이는 근대 국제질서 이후 대부분의 국가들이 ‘경제 성장’과 ‘정치 발전’에 이어 세 번째 국가 목표로 설정했던 ‘외교 강국’이 되는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북핵 문제와 관련한 성과를 꼽을 수 있다. 한미 정상은 무엇보다도 원칙론적이고 규칙에 근거한 비핵화 과정을 추진하겠다는 점을 강조했다. 물론 혹자는 과거 미국 부시 행정부 시절의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를 떠올리면서 남북한 ‘강대강’ 대치를 우려할 수도 있겠으나, 북핵 문제를 접근하는 과정에서 예외성을 인정하기 보다는 인류 보편적 원칙을 적용하겠다는 입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는 보수 정부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북한 핵문제에 접근할 것이고, 기본적으로 한반도 문제의 해결은 한미동맹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국제공조를 통해서 더 근본적이고 효과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남북한 관계에서 오랫동안 케케묵은 논쟁인 ‘국제공조 vs. 민족공조’ 중 어느 것을 더 우선할 것인가의 문제가 더는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기를 바라며, 이번 기회에 한반도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다양한 정책 자원(resources)이 확보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렇다고 해서 대북 정책에 있어서 관여주의 정책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윤석열 정부는 110대 국정과제 중 ‘93번 및 94번 과제’를 통해 관여주의 정책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으며, 한미정상회담 설명 자료를 통해서도 북한에게 ‘담대한 계획’을 제안할 의사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 돌이켜 보면 진보 정부가 제안하는 대북 관여주의보다 보수 정부가 제안하는 대북 관여주의가 더 효과적임은 물론 국민적 공감대 확보에도 더 유리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미 두 정상은 지난 5월 22일 오산 공군작전사령부 항공우주작전본부 작전조정실을 방문해 양국의 ‘군사안보’ 동맹 강화를 구체화했다. ⓒ연합
정책 추진의 자율성 확보하며 북핵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야
모든 성과에는 명암이 있듯 이번 한미정상회담 역시 향후 추진 과정에서 유념해야 할 점이 분명히 드러났다. 첫째, 기본적으로 한미 간 호혜적인 이익의 공유가 전제돼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우리 정부가 강조한 ‘경제안보’의 결과로 미국이 더 큰 수혜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부분이다. 한미동맹의 긴 역사에서 어느 시점에 누가 더 큰 이익을 확보하느냐를 계산하는 것은 바람직한 외교 스탠스가 아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향후 5년 동안 ‘경제안보’ 및 ‘경제동맹’을 국정 핵심 슬로건으로 간주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경제안보의 한국적 측면과 경제안보의 미국적 측면에 대해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둘째로, 북한 문제를 접근하는 과정에서 보수 정부의 장점을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다. 결국 북한 및 한반도 문제는 미국 혹은 국제사회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다. 보수 정부는 대미 관계에서 정책 추진의 자율성을 확보하기가 더 용이하며, 윤석열 정부는 이런 관점에서 북한 문제 해결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남북관계에서 원칙적이고 인류 보편적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좋으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 남북관계의 자율성을 제한할 필요는 없다. 돌이켜 보면 1965년의 한일국교 정상화, 1988년의 7·7 선언과 북방정책, 2009년의 한미동맹 미래비전 등과 같이 한국 외교의 큰 성과는 실용적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일궈졌다.
이제 첫발을 내딛은 윤석열 정부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걸거나 부담을 줄 필요는 없다. 또한 한미정상회담 한 차례를 통해 한국 외교안보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국제질서 격동기가 오히려 한국 외교의 기회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미사일 실험에 몰두하는 북한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정상화의 길을 제안하기 위해 국내외적 지혜를 모아야 할 시점이다.
박 인 휘
이화여자대학교 국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