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평화의 길
물러섬 없는 격전으로 나라를 지킨
세종시 호국의 길
세종특별자치시는 2012년 7월 1일 출범한 행정중심복합도시다. 올해 출범 10년을 맞은 세종시에는 국무총리실을 비롯한 주요 정부기관들이 위치해 있다. 추산 인구는 약 38만 명으로 계속 증가 추세를 유지하고 있어 2030년에는 5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향후 입주 예정인 국회 분원과 대통령 집무실까지 개설된다면 실질적인 행정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될 것이다.
호국의 역사가 서려 있는 세종시
한국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한 세종시에는 선열의 피로 얼룩진 호국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멀리는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였으며, 고려 후기에는 몽고의 합단적을 궤멸시킨 고장으로 백척간두에 섰던 나라의 운명을 지켜낸 ‘연기대첩’의 전승지다. 임진왜란 시에는 승장 영규 대사가 금산 연곤평 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친 기록이 있고, 6·25 전쟁에서는 미 제24사단 장병이 전의 지역과 금강에서 방어전을 펼쳐 북한군의 남진을 8일간 저지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의 바탕을 마련했다. 그중에서 고려시대 ‘연기대첩’과 6·25 전쟁 당시의 ‘전의 개미고개전투’, ‘금강 방어전투’에 대해 살펴본다.
고려 후기의 국난을 극복한 연기대첩
고려 충렬왕은 즉위(1274년)하던 해부터 일본을 정벌하려는 원나라에 병력 및 물자 조달을 강요받았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걸쳐 원나라의 일본 정벌에 협조했으나 모두 실패함에 따라 고려는 국력을 소진한 채로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원나라의 반역 무리였던 합단적이 고려를 침입했는데 방어를 제대로 하지 못해 충청도 연기현까지 참화를 입는 수모를 당했다.
합단적의 고려 침입이 이뤄진 때는 1290년 5월이다. 그때부터 다음해 6월까지 고려사 <세가> 기록 총 92건 중 72%에 해당하는 66건이 합단적 관련 기사였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당시 고려가 얼마나 심각한 국난을 겪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1290년 12월 합단적은 쌍성→등주·화주→양평→원주→충주를 거쳐 1291년 4월 말 연기현 정좌산 아래에 주둔했다. 이러한 정보를 확인한 여원연합군은 5월 1일 한밤중에 목천을 출발해 5월 2일 새벽에 정좌산에 도착해 단잠에 빠져 있던 합단적을 앞뒤로 포위하고 기습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날 전투에서 김흔 장군, 별장 배정지, 보졸 이석과 전득현을 비롯한 고려 3군이 죽음을 무릅쓰고 적군을 궤멸상태에 빠뜨렸다.
1차 전투에서 대패한 합단적은 정예기병 1,000여 기를 이끌고 금강을 건너 도주했다. 그리고 부대를 재편성한 후 5월 8일 우리 군사가 주둔하고 있던 원수산 아래에 나타나 도발을 감행했으나 한희유 장군의 활약에 합단적은 또 다시 패전해 경기도 방향으로 도주했다. 미처 도망하지 못한 잔당 580여 명은 6월 5일 한희유 장군에게 항복함으로써 고려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연기현 지역에서 이룬 이 승전을 대첩이라 일컫는 것은 이때의 승전으로 고려 경제의 근간이자 곡창지대였던 호남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서도 실제로 ‘대첩(大捷)’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한 개미고개전투
6·25 전쟁의 참화는 세종 지역 역시 피해갈 수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 남침한 북한군은 6월 27일에는 서울을, 7월 4일에는 수원을 점령했다. 파죽지세였던 북한군의 남진이 주춤했던 곳이 바로 세종 지역이다. 국방부에서 발간한 ‘한국 전쟁사’에서는 이곳에서의 전투를 ‘전의전투(개미고개전투)’와 ‘금강방어전’으로 기록하고 있다.
7월 8일 천안 방어선이 무너지던 무렵, 미 제24사단 21연대는 조치원을 방어하기 위해 전의면 동교리 야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던 7월 9일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 제4사단이 전의면 읍내리에 나타났다. 7월 10일 아침, 북한군 제4사단의 공격을 시작으로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됐다.
흙 묻은 군화와 철모가 얹혀진 총검 조형물이 당시 치열했던 개미고개 전투를 떠오르게 한다.
21연대 1대대는 전투 초기에 북한군의 공세를 잘 막아내는 듯했으나 포격에 방어선이 무너지고 대대 무전기가 파손되면서 난관에 봉착했다. 통신 수단 상실로 포병지원을 받지 못하던 와중에 빅슬러 소대원 전원이 전사하는 등 1대대는 심각한 피해를 입고 3대대의 진지가 있는 개미고개로 후퇴했다.
7월 11일 새벽, 전날 미군의 격렬한 방어에 크게 타격을 입은 북한군 제4사단이 뒤로 빠지고 제3사단이 선봉에 나서 보전포 공격을 감행했다. 개미고개 진지에서 적의 공격을 대비하던 3대대 미군 장병들은 최선을 다해 방어전을 펼쳤으나 북한군이 후방 보급로를 차단하고 포위하는 바람에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북한군 2개 사단을 상대로 맞서 싸운 미 제24사단 21연대 1대대와 3대대는 이 전투에서 428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으며 중화기도 대부분 파손·유기한 채로 후퇴하고 말았다. 하지만 북한군 역시 미 공군의 폭격에 탱크와 트럭 등 100여 대를 잃는 큰 손실을 입으며, 북한군은 이때부터 낮 행군을 포기하고 밤에만 이동하는 등 남진 속도를 현저히 늦추었다.
개미고개 전투 기념탑(자유 평화의 빛)
연합국 반격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의미 있는 패전
개미고개 방어에 실패한 미군은 조치원 북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가 더 큰 손실을 우려해 7월 12일 조치원에서 철수해 오후 늦게 금강을 건넜다. 7월 12일부터 16일까지 4일간 금강을 방어한 부대는 미 제24사단 19연대였다. 7월 13일부터 금강 도하를 준비하던 북한군은 7월 15일 황혼 무렵부터 간헐적으로 도하를 시도하다 야간에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미군은 적 도하 예상지점 3개소에 병력을 배치하고 방어전을 펼쳤다. 전투 초기에는 후방의 포병 지원사격 덕분에 북한군을 잘 막아냈으나 포병의 좌표 착오로 조명탄 지원이 끊어졌던 약 20분 사이에 북한군이 금강을 건너고 말았다.
7월 16일 새벽, 금남교와 금강 상·하류에서 도하에 성공한 북한군은 엄청난 화력을 퍼부었다. 멜로이 대령이 이끄는 19연대는 잘 방어하며 역습에도 성공했으나 북한군이 우회하여 후방도로를 차단함으로써 군수물자 지원과 후퇴로마저 막히는 혼란한 상황에 몰렸다. 보급로를 탈환하기 위해 혈투를 벌이던 연대장 멜로이 대령이 중상을 입었고 이에 지휘를 대신 맡았던 1대대장 윈스태드 중령마저 전사하자 전황은 급전직하 악화되어 미군은 7월 16일 야간에 산길을 택해 대전으로 후퇴했다.
연기대첩비
4일간 전개된 금강 방어전에서 미군 제19연대는 윈스태드 중령을 비롯한 65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으며 105mm 곡사포 8문을 유기하는 등 실로 궤멸 수준의 피해를 입었다.
6·25 전쟁 초기 세종 지역에서의 전투상황은 위와 같았다. 결과만 보자면 세종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는 미군이 패전한 것으로 보이나 전쟁평론가들은 파죽지세로 천안까지 남진했던 북한군의 공세를 세종 지역에서 8일간 지연시킴으로써 인천상륙작전 등 연합군의 반격에 필요한 준비시간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호국보훈의 달 6월에 대한민국의 자유수호를 위해 세종 지역에서 산화한 희생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돌아보며 삼가 옷깃을 여며 명복을 빈다.
6·25 전쟁 당시 금강 유역에서는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한 방어전이 치러졌다. ⓒ세종특별자치시청
황 우 성
세종향토사연구소장
(前 민주평통 세종부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