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경지역 사람들
통일을 일구어 나가는 마을
통일촌 사람들
자유로의 끝자락, 통일대교를 건너면 두 방향으로 갈라지는 이정표가 나온다. 직진하면 판문점과 개성(開城), 왼쪽으로는 ‘통일촌’이다. 통일촌은 DMZ 서부전선 민간인통제구역 안에 자리한 조그마한 마을이다. 주소는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백연리이지만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 곳이다.
본래 통일촌은 민씨, 최씨, 박씨, 이씨 등 집성촌이 있던 지역이었지만 전쟁은 마을의 풍경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1973년 8월, 6·25 전쟁 이후 20년간 방치됐던 이곳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남북 간 체제 경쟁이 치열했던 당시 정부는 북한의 선전(宣傳)용 마을에 대응하기 위해 통일촌을 만들었다. 그 후로부터 50년. 반세기를 맞은 통일촌에는 여전히 저마다의 밭을 일구며 평화와 통일을 일궈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전쟁의 상흔을 품은 민통선 내 사람들
통일촌은 통일대교에서 마을 주민의 인도를 받아 신분 확인을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는 민통선 내 마을이다. 검문소 주변은 겹겹이 쳐진 바리케이드와 군인들로 긴장감이 맴돌지만 검문소를 통과하면 여느 시골과 다를 바 없는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마을 꼭대기에 있는 작은 교회의 종탑과 정겹고 아담한 시골 학교, 주민들이 쉬어가는 정자까지 지극히 평범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의 모습이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전쟁의 상흔과 아픔이 마을 곳곳에 남아있다.
마을 한복판에 놓인 망원경을 들여다보면 북한 땅이 손에 잡힐 듯하다. 군사분계선과 불과 4.5㎞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곳에서는 남한 대성동 마을의 태극기와 북한 기정동 마을의 인공기가 나란히 내려다보인다. 망원경 옆으로는 철조망이 쳐져 있고 두꺼운 철문으로 막아놓은 대피소도 보인다. 오랜 기간 주민들이 지켰던 방공호와 무기고도 상징적으로 남아 있다. 12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이곳엔 집집마다 태극기가 휘날리고 그 흔한 대문 하나 없다. 처음 마을이 생겼을 때는 집 밖이 온통 ‘미확인 지뢰지대’였다. 지뢰 사고로 발목을 잃거나 목숨을 잃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오랜 역사 위에 뒤덮인 지뢰와 포탄은 이 지역에서 살아온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생활의 일부였다.
“애들이 사내애들이다 보니 버려진 군용물품을 막 주워 왔어요. 예전에는 놀 게 따로 있었겠어요? 위험하다고 못하게 해도 사내애들이라 말도 안 듣고, 총알 같은 것들을 주어다 놀았죠.”
- 최영주 통일촌 주민
집마다 태극기가 휘날리는 통일촌 마을의 풍경
민통선 내 마을이 그렇듯 남북관계에 긴장이 고조 될 때면 주민들은 늘 걱정과 불안감에 시달리곤 했다. 1970년대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 마을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집집마다 피란 보따리를 싸두고 밖에 나가지도 못했고 일주일간 전화 한 통도 할 수 없었다. 학교도 일주일간 휴교를 했다. 연평도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비상이 걸려 외부와의 교류가 단절됐다. 매일 시끄럽게 울려대는 대남방송도 통일촌 주민들을 골치 아프게 했던 문제였다. 남북 간 협상으로 대남방송이 중단되기 전까지만 해도 밤새도록 이어진 대남 방송으로 주민들은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판문점 도끼사건 때가 제일 무서웠어요. 당시 제가 이장을 할 때였는데 그때는 진짜 전쟁이 일어나는 줄 알고 주민 모두가 긴장했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런 상황이 익숙해져서 그런지 만성이 됐어요. 북한의 도발 위협이 있을 때마다 친척들은 불안해서 전화를 걸어오지만 우리는 그래봐야 뭐 별일 있겠느냐며 오히려 태평한 편이에요.”
- 권영한 통일촌 노인회장
통일촌의 모델은 전투 능력을 갖춘 이스라엘의 집단 농장인 ‘키부츠(kibbutz)’였다. 초창기 주민들은 평상시 농사를 짓다가도 비상상황이 발생하면 총을 들고 적과 싸우는 훈련을 해야 했다. 저녁에는 소총을 들고 마을 무기고에서 경계근무를 섰다. 이따금 실시되는 비상훈련과 주기적인 예비군훈련도 받아야 했다.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한다’는 구호 아래 사격, 제식훈련, 각개전투까지 여자들도 예외는 없었다.
“남녀가 다 예비군훈련을 받았어요. 보통은 35세까지 예비군훈련을 받는데 우리는 50세까지 예비군훈련을 받았어요. 마을에 무기고가 두 군데 있었는데 그곳에 총기를 보관하면서 야간에 보초도 서고 그랬죠.”
- 민태승 통일촌 마을박물관장
마을박물관에서 통일촌의 지리적 특성을 소개하는
민태승 마을박물관장
장단출장소 앞 망향제단
하나하나의 사연과 사람이 모여 문화가 되다
통일촌은 제대 군인 40가구와 실향 원주민 40가구 등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이뤄졌다. 입주 자격을 갖추기 위해 서둘러 군대를 제대한 남편을 따라 온 아내부터 구비서류를 갖추지 못한 동생을 대신해서 들어오게 된 형까지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통일촌에 들어온 이들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새로운 마을의 주인이 되었다. 전국 팔도 사람이 모인 만큼 다양한 풍속과 생활 방식이 어우러져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 냈다. ‘후방마을’, ‘철조망 영어’, ‘빠텐더 영어’, ‘건달이 이장’ 등 이 마을에서만 들을 수 있는 용어들과 타지에서 들어오는 신랑을 맞이하는 혼례 풍습 등 통일촌만의 생활문화는 ‘다름’이 모여 하나의 마을 문화를 만들었다.
입주 후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공동체 모임을 조직했다. 1970년대 중반에는 부녀회와 새마을지도자를, 1980년대에는 상조계를 직접 만들었다. 1991년에는 주민들이 공동 출자한 통일촌 마을직판장이 조성됐고, 1996년에 입주 1세대를 중심으로 노인회가 조직됐다. 그리고 농사일과 결부된 두레 농악과 같은 풍습들도 통일촌을 하나로 묶는 데 역할을 했다.
통일촌 주민들은 입주 당시 국가로부터 받은 8,000평 가량의 황무지를 개간해 콩, 인삼, 벼농사를 지으며 지금의 ‘장단콩 마을’을 일궜다. 이 지역 쌀은 임진강의 깨끗한 물과 큰 일교차 덕분에 예로부터 임금님께 진상하던 품목 중 하나였을 정도로 맛과 풍미가 좋다. 특히 이곳 장단지역은 물 빠짐이 좋은 마사토 토양을 가지고 있어 좋은 품질의 콩으로도 명성이 높다. 통일촌이 조성된 이후 주민들은 이 지역에 100만㎡의 재배 면적을 확보하여 콩 농사를 짓고, 전통장류 가공시설을 운영하면서 콩을 지역 특산물로 육성했다. 콩의 이름은 과거 통일촌이 속한 장단군의 이름을 따 ‘장단콩’으로 불렀다.
이곳에서 재배된 개성인삼 또한 유명한데 임진강, 한강, 사천강이 흘러가면서 불어오는 바람이 인삼이 자라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줬다. 특히 모래와 흙이 적당히 섞여 물 빠짐이 좋은 토양은 물과 상극인 인삼 재배에 안성맞춤이었다. 해마다 가을이면 ‘파주 개성 인삼 축제’와 ‘장단콩 축제’가 열릴 정도로 쌀, 인삼, 장단콩은 ‘장단삼백’(세 가지 흰색)으로 불리며 통일촌의 명물이 됐다.
통일촌 마을박물관 내부 모습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하는 통일촌
50년 전 전략촌으로 탄생한 통일촌은 2000년대 이후 통일 정보화마을, 장단콩 슬로푸드 체험마을, DMZ 세계화 브랜드마을로 발전을 거듭하면서 평화·통일의 거점이자 관광마을로 다시 태어났다. 마을 곳곳에 남아 있던 방공호와 무기고 등은 관광 상품이 됐고, 지역 특산물인 장단콩 순두부와 된장찌개를 파는 식당은 외지인이 찾는 ‘필수 맛집 코스’로 자리 잡았다.
2013년에는 마을 주민들의 삶의 갈피를 보여주는 마을박물관도 생겼다. 마을박물관 안에는 피란 갈 때 묻어 둔 항아리, 뒤주, 군인시절 만든 추억록과 편지들, 꼼꼼하게 적어 둔 농사일지, 수거된 탄통과 탄피, 불발탄 등 주민들의 사연이 담긴 물품들이 그들의 추억과 함께 전시돼 있다. 박물관 건물이 세워졌지만 실은 통일촌 마을 전체가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통일촌 곳곳에는 전쟁의 아픈 역사와 마을을 일구어 낸 주민들의 의지, 지금도 휴전선 옆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주민들의 삶의 애환이 곳곳에 묻어 있다. 반백 년을 맞은 통일촌. 반세기가 흐르며 현재 초창기 주민은 몇 남아있지 않지만 통일촌 2세대와 함께 평화와 희망의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하고 있다.
통일촌의 유일한 학교인 군내초등학교는 ‘유네스코협동학교’로 지정돼 있다.
+ Mini Interview in 파주 통일촌 +
민태승 (통일촌 마을박물관장, 거주 50년), 권영한 (통일촌 노인회장, 거주 50년), 문종천 (통일촌 청년회장, 거주 46년)
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민태승 | 통일촌이 만들어진 1973년부터 살기 시작해 올해로 82세가 됐습니다. 현재는 통일촌 마을박물관장을 맡고 있어요. 이전에는 민주평통 파주시협의회장과 통일촌 이장, 초대 새마을지도자, 파주문화원장을 맡았었죠.
권영한 | 저도 고양시에서 벼농사를 짓다가 1973년 통일촌에 입주한 1세대로 올해 83세입니다. 지금은 통일촌 노인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노인회는 입주 1세대들이 원로가 되면서 1996년도에 조직됐습니다.
문종천 | 저는 통일촌에서 나고 자라 정착한 통일촌 2세대입니다. 올해 3월, 마을을 위해 봉사하고 친목을 다지는 통일촌 청년회장직을 맡았습니다. 파주시 문산읍 소재의 환경업체에 근무하며 통일촌에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권영한 노인회장(좌)과 민태승 마을박물관장(우)
Q. 통일촌에 정착하게 된 계기와 당시 풍경은 어땠나요?
민태승 | 통일촌에 들어오기 전에는 파주시에서 공무원을 했어요. 부모님이 우연히 신문에서 공고를 보고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셨어요. 국가에서 집과 농지까지 분배해 준다고 하니까요. 7남매의 맏이인 저도 공무원 벌이로는 가족 봉양이 만만치 않았어요. 그때는 쌀값이 비싸 공무원보다 농부가 훨씬 나았거든요. 위험한 것은 전방이나 후방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당시 통일촌은 산등성이를 불도저로 밀어 15평짜리 슬레이트집을 짓고 평지를 만들어 놓았어요. 동네 주위로는 잡초와 숲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고요. 여름철이라 모기떼가 너무 많아 해 지기 전에 밥을 지어 먹고는 모기장 속에 들어가 지냈어요.
문종천 | 저는 1997년 군에 입대하면서 통일촌을 떠났었어요. 이후 요리사로 일하면서 자영업을 준비하던 중 통일촌에 계신 부모님께서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부모님 옆에서 건강을 돌보며 기존에 하시던 농사를 이어받을 생각으로 하던 일을 정리하고 통일촌에 정착하게 됐습니다. 2008년에 제가 통일촌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통일촌 마을을 비롯해 DMZ 주변 관광이 활성화돼 있었습니다. 포장된 도로와 길목마다 걸려 있는 태극기, 경의선 도라산역도 달라진 풍경 중 하나였습니다.
Q. 평화·통일을 위한 바람이 있다면?
민태승 | 하루 빨리 남북 통일이 되면 제일 좋겠지만 당장에 통일이 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작은 소망이 있다면 남북한 주민이 자유롭게 남북을 왕래하며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문종천 | 접경지역인 통일촌 마을이 통일을 준비하는 데 앞장서 일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접경지역에 남북한 주민이 왕래 가능한 공동구역을 만들고, 그 안에서 자유롭게 교류하며 평화·통일을 먼저 이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정부에서 통일촌 마을을 활성화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과 정책을 마련해 주시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