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
한국전쟁 70주년,
새로운 변화의 불씨 마련해야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 그동안 남북관계는 우여곡절도 많았고 큰 변화도 겪었다. 한국전쟁은 분단을 무력으로 끝내기 위한 전쟁이었던 만큼 치열한 전투와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를 야기했고, 휴전으로 일단락된 상황은 큰 후유증을 불러왔다.
1940년대 해방부터 분단 정부 수립까지의 과정이 지리적, 정치경제적 분단이었다면, 한국전쟁은 심리적, 사회문화적 분단을 심화시켰다.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과 중국군의 개입으로 남북전쟁이 국제전으로 비화하고 정전협정 체결에 즈음하여 한미동맹이 결성됨으로써, 남 북 분단이 국제 냉전질서에서 더욱 고착화하는 과정도 겪었다. 이 글은 국제적 맥락 속에서 정치군사 분야의 한반도 분단 및 분단 극복 노력을 살피고 우리의 과제를 알아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휴전 직후 분단 고착화 과정
한국전쟁은 남북한 모두에게 세계적 냉전구조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절감하는 계기였다. 중·소의 지원 아래 야심차게 남침을 기획하고 도발한 북한은 세계 최강 미군의 개입으로 존망의 기로에 섰고 결국 중국군이 개입 하면서 회생할 수 있었다. 중국군은 1958년까지 북한에 주둔하면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국 역시 전쟁 과정에서 국력의 한계를 여실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허장성세의 북진통일론에도 불구하고 기습에 당한 한국군은 초기 패퇴를 거듭했고, 미군과 유엔군의 개입으로 되살아났다. 무기·장비 부실로 인한 전력의 취약성은 미국의 물자 및 교육 지원으로 전쟁 중반 이후에야 해소되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는 미국이 주도한 정전협정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 대신 한미동맹과 미군 주둔을 얻어냈다.
전쟁은 남북한의 국제적 위상을 약화시켰으나 양측 지도자의 국내정치적 기반은 강화했다. 김일성은 국내파, 연안파 등 반대세력을 제거하여 권력을 공고히 했고, 주체사상을 내세워 8월 종파사건 등을 겪으면서도 굳건한 지위를 갖게 된다. 이승만도 전시 특유의 대중 지지를 바탕으로 부산정치파동과 발췌개헌을 거치면서 직선제 대통령이 되고 종신집권까지 꾀한다.
한편, 전쟁 초반 기동전과 지리산 등 빨치산 전투의 여파로 남북의 주민들은 엄청난 이념적, 심리적 압박을 받았다. 북한은 이를 강력한 동원과 사회주의화의 자원으로 활용하여 조기 복구에 성공했다. 한국은 그만큼 체계적이지는 못했지만, 사회적으로 구질서 해체와 산업예비군 양산을 통해 뒷날 경제성장의 기반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남북은 국력과 리더십의 관심에 따라 군사적으로 재조직화된다. 양측 모두 외부 후원세력으로부터 대규모 군사 원조를 통해 군사력을 회복했는데, 이 과정 에서 한국은 72만 명의 대군을 육성하면서 대미 의존성이 심해졌다. 북한은 자력갱생에 의한 전후 복구에 우선 집중하면서 상대적으로 적은 40여만 명의 병력을 유지했지만, 1958년 노농적위대를 창설하고 1962년 경제 군사 병진노선을 채택하면서 군비증강을 본격 재개하기 시작한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UN측 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왼쪽 탁자)과
북한 인민군 남일 대장(오른쪽 탁자)이 휴전협정에 조인하고 있다. ⓒ연합
분단의 심화와 탈냉전 초기 분단 극복의 기회
이처럼 전후 분단 고착화 과정에는 국제적 배경과 정치적, 심리적 요인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전쟁의 후유증이 남아 있던 상황에서 군사적 요인은 상수였다고 할 수 있으며, 양측의 군사력이 시차를 두고 증강되면서 분단 심화에 더욱 영향을 주었다.
남북한은 미·소 양 진영 안에서 이념적 정체성을 갖고 있었지만, 북한은 중·소분쟁의 와중에서 자주외교 노선을 추진했고, 제3세계 국가들과 특별한 유대를 맺었다. 한국은 한일관계 정상화와 베트남전 파병을 통해 미국 주도 질서에 더 편입되었으나, 북한의 군비증강과 남북 군사충돌, 주한미군 감축 등에 대응해 뒤늦게 자주국방과 군비증강을 추진해 나갔다. 1960년대 중반부터 치열해진 남북 군사갈등과 충돌, 1970년대 후반까지 극심한 군비경쟁이 이루어졌음을 볼 때 무력에 의한 통일은 더 위험하고 어려워졌다.
박정희와 김일성은 모두 분단 극복을 말하면서도 분단체제를 정치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쓴 측면이 있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 3선 개헌, 유신에 이르기까지 반공 과 대북 대결, 국력 경쟁과 통일 등 양 극단을 오가며 분단체제를 강화했다. 김일성 역시 통일론을 앞세웠지만, 언제든 반목과 대결을 활용하며 절대권력을 유지했다. 박정희의 리더십은 전두환에게 그대로 이어졌고, 김일성은 1980년대 중·후반 신(新) 데탕트와 사회주의체제 변혁의 길목에서 머뭇거리며 분단 극복을 주저했다.
탈냉전이 되면서 또 다른 기회가 왔지만, 여전히 분단은 극복되지 못했다. 아마도 냉전 종식 초기 미국과 구 소련 등이 과거의 영향력을 재고하던 때가 남북한 주도의 분단 극복이 가장 가능했을 시점이었을 것이다.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을 앞세웠고 남북고위급회담을 통해 그 이전보다 훨씬 적극적인 불가침과 화해협력 노력을 전개했다. 그러나 북한은 국제사회주의체제의 와해 속에 핵개발 카드를 체제 유지의 수단으로 활용했고, 결국 체제는 생존했으나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경제발전에 성공할 수 없었다.
한국의 민주화로 5년 단임 정부가 제도화된 것은 남 북관계의 지속성에 오히려 부담이 됐다. 1992년 이후 대선을 앞두고 대북정책은 늘 중요한 정치이슈였고, 일정한 지지도를 가진 보수세력은 남남갈등 속에 강경한 대북정책을 주문했다. 진보 성향의 정부에서도 대통령 은 적극적 대북정책을 추구하지만 임기 후반으로 갈수 록 선거와 차기 정부를 고려한 정치셈법이 작용하기도 한다. 북한은 김일성의 사망과 극심한 경제위기 속에 폭 넓은 선택지를 갖기 힘들었다고 할 수 있다.
2018년 12월 12일 9·19 남북군사합의서에 따라 DMZ 내 GP
시범철수 상호 검증을 위해 만난 남북 검증반이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합
2000년대 분단 극복을 위한 새로운 노력
한국전쟁이 일단락된 후 사회가 변화하면서 정치군사 상황도 바뀌게 되었다. 한국에는 정치 리더십이 여전히 중요하지만 시민사회의 민주적 요구도 무척 중요하며, 오랫동안 대북정책이 정치의 중요한 화두여서 국민적 이해도 높다. 민주주의 공고화로 1990년대 말 이후 진보 정부가 여러 번 등장하면서 남북관계 발전과 분단 극복을 위한 적극적인 정치적 선택도 가능해졌다.
김대중 정부의 6·15 선언은 남북 화해협력과 평화번영, 그리고 중장기적 통일 가능성에 대한 국민의 염원이 반영된 것이다. 북한을 단순히 적대세력으로만 보지 않 고, 서로 합심하고 협력해서 우선 평화와 공동 번영을 만듦으로써 점진적 과정으로 변화와 통합을 이룩하자는 것이다. 단언하기는 힘드나,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은 평화 관리는 힘으로 하면서, 북한체제의 불안정성과 붕괴 가능성에 기초하여 급속한 통합을 꾀하 자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그 상황이 자연스레 실현된다면 독일 통일처럼 좋은 기회가 되겠지만, 자칫 무리한 시도 끝에 엄청난 피해와 후유증을 유발할 위험도 크다.
1960~70년대 이후 남북한의 군비확충으로 양쪽의 군사력은 무척 커졌다. 한국군은 현재 50만 명을 목표로 국방개혁 2.0을 추진하고 있는데, 과거에 비해 기술집약 적인 첨단무기와 장비를 구비하고 있어 막강한 전력으로 평가된다. 북한은 재래식 전력의 노후화에 대응하여 병력을 늘려갔고 현재 128만 명에 달한다. 1990년대 이후 핵개발과 미사일 시험발사를 지속하면서 북한의 전략무기도 크게 확충되었다. 북한의 핵위협은 한국 단독뿐 아니라 한미연합 확장억제전력으로 함께 대응하는데, 핵이든 재래식 전력이든 신속히 사용될 수 있어 확전될 위험이 크다.
통수권자와 상부에 절대 복종해야 하는 군대와 군사력의 속성을 볼 때 어려운 군사상황을 통제하는 것은 결국 남북의 정상과 핵심 지도부이다. 1992년의 남북기본 합의서와 불가침부속합의서, 2007년의 10·4 정상선언 과 제2차 남북국방장관회담 합의문은 군사적 긴장 완화와 군비통제를 위한 주요한 내용들을 담았으나 끝내 이 행되지 못했다. 한국은 차기 정부가 이행 노력을 게을리 했고, 북한은 대남 불신 속에 체제 생존을 위해 대범한 변화를 유지할 수 없었다.
2018년 4월의 판문점선언과 9월의 평양공동선언, 그리고 9·19 남북군사합의는 평화를 유지하고 장차 남북 협력을 통해 공동 번영과 분단 극복을 이룩하게 할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이는 남북관계 개선과 군사적 긴장완화 및 전쟁위험 해소,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 등 포괄적 정책과업을 제시하고 있다.
판문점선언과 9·19 군사합의, 번영과 분단 극복 위한 자산
이 점에서 2018년 4월의 판문점선언과 9월의 평양공동선언, 그리고 9·19 남북군사합의는 평화를 유지하고 장차 남북 협력을 통해 공동 번영과 분단 극복을 이룩하게 할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이는 남북관계 개선과 군사적 긴장 완화 및 전쟁위험 해소, 항구적이고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 등 포괄적 정책과업을 제시하고 있다. 군사적으로도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 군비제한과 단계적 군축,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통한 상시적 점검과 협의 가 가능한 체계까지 포함하고 있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북핵 협상이 중단되면서 남북관계도 일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초심으로 돌아가 합의 이행을 위한 준비와 후속 대화를 해 나가야 한다. 2년 전의 큰 성과가 정상 수준에서 나온 것인 만큼 남북 정상 간 교감 재개를 위한 노력이 집중될 필요가 있다. 남북 관계 이슈뿐 아니라 비핵화 및 평화체제 구축 과제까지 정책적으로 재점검하여 새로운 변화의 불씨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서 주 석
전 국방부 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