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 Vol 1642020.06

2000년 6월 13일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합

특집 2

6·15 20주년, 화해협력에서 평화번영으로

새로운 시대,
아래로부터 평화 만들기

올해는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한 해이다.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그리고 남북이 평화공존을 선포한 6·15 공동선언 2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이런 계기를 통해 우리는 그간의 역사를 다시 숙고할 기회를 가져야 할 것이다.

6·15 공동선언 이후 지난 20년 동안 시민과 시민사회는 많은 난관과 갈등 속에서도 6·15 공동선언의 실행 을 위해 남북의 교류를 실현하고 대화를 이어가려는 노력을 치열하게 해왔다. 2018년 4월 27일에는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음을 8천 만 우리 겨레와 전 세계에 엄숙히 천명”하는 판문점 정상회담이 개최되는 감격의 순간도 있었다. 뒤이은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그리고 9·19 평양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에서 실질적인 평화프로세 가 시작되었다는 큰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대북 제재와 한미공조의 틀’ 안에 남북관계가 갇히면서 평화를 향한 우리의 여망은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분단의 세월을 생각하자면, 무력갈등의 위협이 어느 정도 완화되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논의하는 지금의 상황이 큰 역사적 발전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더 나아가 정부나 국회 그리고 시민사회 차원에서 판문점 선언 이후의 소강상태에 대한 보다 진지한 반성과 해법 모색이 필요하다.

성큼 다가온 새로운 시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코로나19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몰아치면서, 이제 우리는 당혹감이나 불안감을 느끼는 것과 더불어 삶과 사회를 모두 재사고하고 재조직해야 할 선택의 순간에 서 있다. 또한 코로나19가 가져온 위기상황에서 민주적이고 투명한 방역체계를 만드는 데 성공한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모범국가로 칭송받으면서,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섰다는 평가를 받는 점도 새로운 현상이다.

거기에다가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치는 위기 상황에서 진행된 4월 15일 총선이 예정대로 치러져 투표율 66.2% 를 보이면서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보다 진전된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여망도 드러났다. 선거 기간 동안 북풍 소동이 먹혀들지 않은 것도 처음이다. 혹자는 향후의 한국 외교나 통일정책에서 반공이나 반북 이데올로기가 종언을 고할 것으로 예단하기도 한다. 그간 추진해 온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획기적인 진전을 가져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철저한 방역과 경제위기 극복이 우선적인 당면 과제다. 그렇더라도 코로나19 이후 우리가 만들어야 할 미래사회의 모습을 구상하면서 남북관계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함께 풀어가는 종합적인 접근이 시급해졌다. 담대한 결단과 근본적인 변화를 견인해야 할 지금의 시점에는 국민이나 시민사회가 광범하게 참여하는 다양한 집단토론과 숙의 민주주의의 실천이 중요해졌다. 새 시대는 우리의 집단 지성을 요청하고 있다.

먼저 우리는 국제관계의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코로나19 등장 이후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들은 정치 리더십의 부재, 공공 의료 시스템의 부재, 시민사회의 역량 부족으로 과거의 위상을 잃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전 세계는 중국의 리더십과 투명성에 깊은 회의를 갖게 되었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군사적 최강대국의 영향력 축소 외에도 유럽연합의 대안 정치 실패 그리고 유엔이나 세계 보건기구 같은 국제기구의 존재 필요성에 대한 불신이 나타났다. 이에 방역의 성공으로 기술적 우위와 국제적 신뢰를 얻게 된 한국이 중견 국가로서 안보나 외교관계에서 교량 국가나 중재자 역할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또한 코로나19 사태 이후 안보에 대한 의제 설정이 군사안보에서 신안보로 바뀌어 갈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국가의 위상이 그간 경제력이나 군사력으로 결정되었다면, 이제는 전염병이나 환경 위기 등 새로운 도전에 대한 대응 여부가 국가의 능력을 측정하는 주요 변수로 떠오르게 되었다. 개별 국가 운영에서 방역이나 생태계 보존에 역점을 두면서, 간접적으로 군비 경쟁을 축소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예측도 나온다.

무엇을 해야 하나
이렇게 들이닥친 새 시대에 우리는 한반도 프로세스의 적극적인 주체로서 담대한 주장과 실천을 견인해 내야 한다. 화급한 현안은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재개하고 대화 창구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사를 파견하는 직통노선이 필요하다는 제안에서부터 정상회담을 통해 현안들을 일괄 타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혹은 북의 경우 코로나19로 인한 타격이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지만, 당장 필요한 보건의료 협력으로 남북교류를 재가동시키고, 이를 기반으로 평화프로세스를 좀 더 전진하도록 하자는 제안도 나오고 있다. 이런 전술들은 그 자체로 유용한 것이어서, 시민은 이것의 정책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남북의 정부와 국제사회를 향해 높여가야 한다.

지난해 10월 27일 서울 뚝섬 한강공원에서 열린 2019 서울평양시민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한반도기를 흔들고 있다. ⓒ연합
이런 제안들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Top-down) 방식이어서 남북관계에서 신속하면서도 효과적인 작동을 기대할 수 있지만, 시민들의 폭넓은 참여에는 한계가 있다. 문재인 정부에 들어와 정부가 주도적으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이끌고 가면서, 시민사회의 참여는 상대적으로 위축된 채 모두 정부의 대응을 바라보기만 하는 형국이 되었다. 시민과 시민사회는 지금의 무기력을 넘어 남북공동선언의 전면적인 실현, 대북제재 중단 그리고 남북의 전면적인 교류 실현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북한 관광방문, △비무장지대 유네스코 등재, △철도 사업, △2032 서울-평양 공동올림픽 유치를 가능한 사업으로 제시했다. 이런 기획과 관련하여 시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그 활성화를 재촉하거나 지원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민간이 꾸린 6·15 공동선언 20주년 준비위원회는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하여 20주년 기념행사로 최소 규모의 평화대행진을 하면서, 다양한 온라인 참여 행동을 제안하고 있다. 이런 시민적 참여가 대중적인 시민운동으로 더 퍼져 나가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활동 외에도 필자는 시민사회와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남남갈등 해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임을 환기하고 싶다. 정부가 남북의 화해협력을 위한 정책을 담대하고 속도감 있게 집행하려 할 경우, 사회적 갈등은 그 속도를 더디게 하거나 좌절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에 시민사회는 다소의 반발이 있더라도 여론을 끌고 나가는 역할을 인내심 있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시민사회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나 남북관계에 대해 서로 말하고, 차이를 확인하고, 이를 좁혀 가는 노력을 부단히 진행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와 관련된 정책을 기획할 경우, 우리 사회의 이분법적 전선과 남남갈등은 언제든지 다시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고위지도자의 정책적 결단을 통한 톱다운 방식의 한반도 프로세스도 중요하지만, 지금의 무기력증과 침묵을 넘어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Bottom-up) 평화통일운동도 보다 적극적으로 활력 있게 진행되어야 한다.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통일평화운동
앞에서 언급한 대로 2020년 총선에 대해 주류세력의 교체로 평가하고, 남북관계의 추동에 대한 낙관적인 기대도 하지만, 이는 성급한 판단일 수 있다. 논란도 많고 탈도 많은 지금의 소선거구제로 인해 민주당은 거의 180석에 가까운 의석을 석권했지만, 현실은 지난 대선 구도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진보-보수가 여전히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 있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의석비율은 민주당이 60%이지만, 정당투표에서는 39.7%를 얻었을 뿐이다. 미래한국당이 정당투표에서 1당이고, 여기에 국민의당까지 합치면 그 비율은 더 높아진다. 이는 코로나19의 충격에도 한국사회에서 범진보-범보수 유권자층 균형이 변함없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한반도 평화와 관련된 정책을 기획할 경우, 우리 사회의 이분법적 전선과 남남갈등은 언제든지 다시 떠오를 수 있다. 고위지도자의 정책적 결단을 통한 톱다운 방식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도 중요하지만, 지금의 무기력증과 침묵을 넘어 아래에서 올라오는(Bottom-up) 평화통일운동도 보다 적극적으로 활력 있게 진행되어야 한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사전투표 첫날인 지난 4월 10일 서울역에 마련된 사전투표소에 시민들이 줄을 서 있다. ⓒ연합
온라인 행동을 포함한 다양한 주창운동 외에도, 남남 갈등 해소를 위해 보다 근본적인 전략으로 평화·통일교육 확산이 필요하다. 우리의 눈이 고위 정치지도자를 통한 일괄 타결방식에 집중되면서, 시민이 참여하는 평화 통일운동이나 평화·통일교육 등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많이 줄었다.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특히 청년과 여성의 목소리를 반영한 평화통일운동 없이는 코로나19 이후의 사회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포용적 복지, 소득주도성장, 생태위기 극복, 정치개혁을 포괄하는 ‘전체론적 접근’에 한반도 평화 의제가 함께 녹아들어 갈 수 없을 것이다.

미국과 서유럽의 이른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코로나19 대응에서 허점을 드러낸 원인으로 의료 상업화와 민주주의 결손, 사회적 응집성의 해체를 들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의 성공은 중앙정부 행정의 신속성과 투명성, 의료인들의 헌신, 시민의 공동체적 동참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래서 코로나19 이후의 사회에서는 시민 공동체의 역할이 더 중요해질 것이다. 한반도 평화 실현을 위한 시민 참여 공동체가 우리 사회에서 폭풍처럼 일어나고, 이를 바탕으로 남북 간에도 신뢰 회복의 급물살이 몰려오기 바란다.
정 현 백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