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코로나19와 문명,
인간안보
1997년 4월 7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세계보건의 날을 맞아 ‘감염병 시대 다시 오다 - 우리 모두 관심을, 우리 모두 대응책을’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모든 국가와 의료인, 그리고 인류가 감염병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기울일 것을 촉구했다.
감염병은 인류가 지구상에 탄생한 이래 사람들을 괴롭혀 왔다. 사실 감염병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보다 훨씬 길어, 인류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수많은 생물체가 감염 병에 희생당해 왔다. 하지만 사람들은 감염병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감염병에 걸려 고생하고 죽는 것을 거의 운명처럼 감수해 왔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후반 파스퇴르(Pasteur)와 코흐(Koch) 등이 감염병 가운데 많은 부분이 병원성 세균(병원균) 때문에 발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20세기 들어서는 세균 이외에 바이러스와 곰팡이와 리케차(Rickettsia)1) 등도 감염병의 원인이라는 점이 밝혀지면 서 인류는 감염병 퇴치에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1880년대 이래 여러 가지 항독소와 예방백신이 개발되고, 1940년대부터는 페니실린과 스트렙토마이신 등 감 염병에 특효를 나타내는 여러 항생제가 생산되면서 감 염병은 어렵지 않게 정복될 것으로 낙관했다. 그리고 실제로 1970년대에 두창(천연두)이 완전히 정복되는 등 많은 감염병이 그 위세를 잃게 되었다. 20세기 후반 들 어 급격한 수명 증가로 질병 패턴이 만성 퇴행성 질환 위주로 변화한 것도 감염병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중요한 이유였다.
1) 세포 내 기생균. 주로 진드기나 벼룩과 같은 절지동물을 매개로 하여 사람에 게 감염을 일으킨다.
감염병 시대 다시 오다
하지만 감염병에 대한 때 이른 낙관을 뒤엎는 사태가 벌어졌다. 1970년대 중반 이래 에볼라형 출혈열과 에이즈를 비롯하여 감염력이 매우 높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30여 종의 감염병이 새로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 감염병 대부분은 뚜렷한 치료법을 찾지 못했고 예방백신 또한 개발하지 못했다. 더욱 당황스러운 일은 항생제에 내성을 갖춘 새로운 균주들이 더욱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세계보건기구가 ‘새로운 감염병 시대’를 경고한 것은 이 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실 이러한 경고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1918년 인플루엔자 팬데믹 이후 적지 않은 의학자들이 제2, 제3의 팬데믹을 예고 해왔다. 그리고 그러한 경보에 응답하는 듯 21세기 들어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조류인플루엔자,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등 새로운 감염병들이 인류를 위협 했지만 다행히 피해 정도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는 팬데믹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하여 큰 인명 피해를 낳고 있다. 사회경제적·정치문화적 여파도 엄청나서 코로나 사태 이전의 세상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느니, 뉴노멀과 문명의 전환이 나타났다고 언급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우리나라를 휩쓴 감염병의 역사
1798년(무오년) 연말부터 이듬해(기미년) 초까지 인플루엔자가 중국과 우리나라를 휩쓸었다.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플루엔자 대유행이다. 『정조실록』 1799년 1월 13일자에 의하면 사망자는 모두 12만 8,000여 명으로, 그 무렵 조정에 보고된 전국 총인구 741만여 명의 1.73%에 달하는 엄청난 인명 피해였다. 당시 청나라 방문 사절단의 서장관인 서유문이 남긴 『무오연행록』에 따르면 수행원 200여 명 중 7명이 1798년 12월 6일부터 16일 사이에 감기로 병사했다고 하니, 『정조실록』의 피해 규모와 들어맞는다.
세상이 멈춰서는 이 재난 앞에서 역병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시신을 수습하고, 살아남은 백성들을 구휼하는 것 외에는 국왕도 국가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역병의 정체도, 진단과 치료방법도, 방역과 예방법도 모르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이로부터 꼭 120년 뒤인 1918년(무오년) 가을부터 이듬해 초까지 또 한 차례 인플루엔자가 중국과 우리나라 (식민지 조선)를 휩쓸었다. 이때의 유행은 동아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를 강타한 팬데믹이었다. 일제의 조사 자료에 의하면 조선인은 환자 739만 414명, 사망자 13 만 9,137명으로, 당시 인구 1,670만 명에 대해 사망률 0.83%를 나타냈다. 한편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은 환자 16만 명, 사망자 1,297명으로 사망률이 0.39%이었다. 이 자료를 보도한 「매일신보」(1919년 1월 30일자)는 ‘악성윤감의 사망자가 실로 14만 명, 호열자 흑사병 이상이다’라는 제하에 “작년 10월부터 경성을 위시하여 인천, 대구, 평양, 원산, 개성 등의 시가지에 만연하여 집집에 앓지 않는 사람이 없고 각 학교에서는 부득이 휴학 을 하게 되었으며 관청, 은행, 회사 같은 데서도 인원의 부족으로 사무에 방해되는 일이 적지 아니 했고 … 마침 추수 때인데 환자는 날로 증가하고 병은 용이하게 종식 되지 아니하여 익은 벼를 거두지 못하고 …”라고 썼다.
물론 이 120년 사이에도 사람들은 여러 가지 역병으로 고난을 겪었지만, 인플루엔자로 세상이 멈춰서는 재난이 다시 한 번 발생한 것이다. 같은 조선 땅에 살지만 조선인과 일본인의 피해 정도는 뚜렷이 달랐다. 조선인 의 사망률이 2배 이상이나 되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조선에서만 관찰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후 많은 연구를 통해 당시 선진국과 미개발국, 식민본국과 피식민지 같은 나라에서도 민족과 계층·계급에 따라 피해 정도가 달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질병, 특히 감염병이 계급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보편적 현상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아 사람들이 건강의 가치와 일상의 소중함을 깊이 체득하게 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현상이다. 감염병 확산을 방지하고 인간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부분적으로 혹은 전면적으로 멈춰 세운 것도 인류사에 새로운 경험이다. 이를 계기로 인간이 이윤보다 중시되고, 인간안보가 진정한 안보라는 깨달음이 자리 잡는 문명이 싹트면 좋겠다.”
과거와 달리 감염병 예방 역량 갖춘 인류
다시 100여 년이 지난 2020년. 원인 바이러스는 다르지만 역학적, 임상적 특성이 인플루엔자와 흡사한 코로나19가 온 세상을 휩쓸고 있다. 아직 진행 중이라 코로나19가 남길 피해의 특성과 최종 규모를 가늠하기 쉽지 않지만, 5월 18일 현재 전 세계적으로 확진자 480만 여 명, 사망자 31만여 명을 기록하고 있다. 이만큼의 피 해도 결코 적은 것이 아니지만 세상의 종말이 온 것처럼 법석을 떠는 것은 지나친 듯하다. 인구가 지금의 4분의 1이 되지 않던 1918년, 인플루엔자로 전 세계가 입은 인명 피해는 대략 3,000만 명(2,000만 명~5,000만 명) 으로 현재까지 코로나19 사망자의 100배이며, 인구를 감안하면 400배에 이른다.
지난 3월 24일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민주평통 인천 서구협의회 자문위원들이 방역 봉사활동에 나섰다.
우리나라는 코로나19 방역에 가장 성공한 나라로 꼽히고 있다. 5월 18일 현재 확진자 1만 1,065명, 사망자 263명으로 인구당으로 따지면 선진국 중 가장 적은 축에 속하거니와 그 통계치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신뢰할 만하다. 더구나 전면적인 지역 봉쇄도 전혀 없었다. 요컨대 우리나라는 몇 차례 고비를 맞기도 했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코로나19를 통제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우리나라가 코로나19 통제에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류가 1798년, 1918년과 달리 감염병을 방어하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유럽과 미국이 코로나19 통제에 실패한 것은 기본 역량의 부족이 아니라 태만과 방심, 편견과 오만, 자원 배분의 잘못 등으로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데에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나라보다 공공의료 체계를 훨씬 잘 갖추고 있는 서유럽 나라들이 그러하다.
우리나라의 성공은 일각에서 되뇌듯이 의료 시스템에 기인한 것이 결코 아니다. 질병관리본부를 중심으로 자원봉사 의료인들을 포함한 방역인력의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대응, 휴대전화, 신용카드, CCTV의 광대한 자료 활용(감염병 관리와 프라이버시 보호라는 양쪽 측면에서 심층적인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필요한 문제이다), 정부의 전폭적인 진단검사비 및 치료비용 부담과 적절한 정보 공개, 그리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의 산물이다. 이런 요소들이 선진국 가운데에서 가장 부실한 공공 의료 체계를 메울 수 있었던 것이다. 환자가 2월 말 위기 때 조금 더 발생했더라면 허약한 공공의료 시스템의 둑이 붕괴되어 미국과 유럽의 참상을 경험했을지 모른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지만 운도 어느 정도 따랐던 것이다.
공공의료 강화, 국가의 지원과 사회적 연대 필요
코로나19는 효과적인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될 때까지 유행을 반복할 것이다. 우리는 1차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했지만 더 거세질지 모르는 2차, 3차 그리고 또 다른 감염병들의 공격에 이번처럼 대응해서는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요컨대 기본 역량의 강화를 꾀해야 할 것이며 그 핵심은 공공의료의 강화이다. 또한 의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에 대한 국가의 지원과 사회적 연대도 필수적이다.
공공의료 강화가 의료 분야뿐 아니라 전 사회적으로 중심 화두가 되어야 할 이때, 비대면 시대의 요청인 양 공공의료 확충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의료영리화와 그 첨병인 원격의료 도입을 말하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일이다.
5월 12일 인천시 연수구 대한적십자사 인천광역시지사에서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취약계층에 전달할 긴급구호 물품 세트를 제작하는 자원봉사자들 ⓒ연합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아 사람들이 건강의 가치와 일상의 소중함을 깊이 체득하게 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현상이다. 감염병 확산을 방지하고 인간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부분적으로 혹은 전면적으로 멈춰 세운 것도 인류사에 새로운 경험이다. 이를 계기로 인간이 이윤보다 중시되고, 인간안보가 진정한 안보라는 깨달음이 자리 잡는 문명이 싹트면 좋겠다.
멈춘 공장과 기업체를 보면서 분주히 손실을 따진다. 그 손비의 몇 백 분의 일이라도 미리 방역과 의료에 배당했더라면, 인명 피해뿐만 아니라 경제적 손해도 훨씬 줄일 수 있었을 터이다. 방역과 의료가 생명과 경제와 세상을 살린다. 인간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자들의 계산방법은 다를까?
황 상 익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명지인문의학연구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