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격화하는 미·중게임 속
한국의 평화전략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국제정치질서에 많은 변화들을 몰고 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현상은 ‘미·중시대’의 도래(到來)이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하버드대학의 조셉 나이(Joseph S. Nye)가 설명했듯이, 금융위기는 미국의 외교안보자산을 위축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일부 외교자원을 국내문제에 투입하게 만들었다1)
중국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미국과의 갈등에서 특정 사안을 중심으로 전개했던 방식(Issue-driven)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의 제도적 환경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신개발은행(NDB) 설립 주도, 상하이협력기구(SCO), 일대일로의 지역별 프로젝트 등은 중국 중심의 국제제도를 만들어 보겠다는 야심찬 계획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소위 ‘브레튼우즈 시스템’이라는 연결고리 안에 세계은행, IMF, GATT(WTO의 전신) 및 각종 군사동맹을 통해 자국에 절대적으로 우호적인 국제질서를 만들었던 전례를 따르고 있는 셈이다.
1) Joseph S. Nye, “American and Chinese Power after the Financial Crisis,” The Washington Quarterly, 33:4(2010), pp. 143-153.
첨예한 이해관계가 만들어낸 전선, 그 사이의 한국
국력이란 물질적 힘의 크기만이 아닌 제도, 관습, 리더십, 투명성 등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면, 여전히 미·중 간에는 국력 격차가 크다. 따라서 한국처럼 두 강대국 사이에서 외교적 좌표 설정이 어렵던 나라들은 지금까지 ‘전략적 모호성’, ‘기본 입장’, ‘관행’ 등을 내세우면서 미국 주도의 질서 안에서 국익을 극대화하고자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의 글로벌 표준기술력 확보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지고 있으며, 2016년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 이후 ‘중국 때리기’ 전략이 과도한 국내정치적 목적과 결합하면서 한국, 호주, 싱가포르, 인도 등과 같은 소위 중견국 지위에 놓여 있는 국가들의 고민을 깊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무역전쟁, 5G 사태, 화웨이 스캔들, 남중국해 갈등 등은 현재 형성되어 있는 미·중 간 첨예한 이해관계가 맞선 전선(戰線)들이고, 최근 주먹다짐만으로 수십 명의 사망자를 낸 중국-인도 국경 분쟁 역시 한 꺼풀 벗겨보면 미-중-인도 간 복잡한 세력관계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표출한 것으로 짐작된다. 2000년대 초반 테러와의 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인도와 동맹관계를 맺었고, 중국의 인도양 진출을 극도로 꺼리는 인도가 최근 미국을 끌어들여 중국을 견제하려는 정책을 구체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18년 6월 10일 중국 칭다오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이 서명식을 갖고 있다. ⓒ연합
문제는 미·중 사이에 낀 한국이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외교게임 속에 있다는 점이다. 미국과 중국 모두와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생각은 모든 국가들의 공통적인 속셈일 것이다. 하지만 북한 문제라는 특수한 숙명적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의 경우, 미국과 중국의 전략을 우리의 이해관계에 맞추도록 변화시켜야 한다는, 한 마디로 ‘지난(至難)한 외교현실’에 처해 있다. 인구, 영토, 경제력, 군사력, 천연자원, 국제적 지위, 외교적 리더십 등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우리보다 앞서 있는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한반도문제, 특히 평화 정착과 비핵화문제를 우리의 눈높이와 생각에 맞추도록 설득해야 한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북한은 김여정 조선노동당 제1부부장, 리선권 외무상, 장금철 통일전선부장 등이 여러 차례의 담화를 통해 한국을 상대로 공세와 도발적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이 중에서도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파괴를 실제 행동으로 옮긴 점, 그리고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으로 추정되는 ‘핵전쟁억제력 강화’를 내세운 점은 매우 우려되는 사항이다. 한 마디로 문재인 정부가 일관되게 추구한 ‘비핵평화프로세스’가 매우 심각한 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좌절된 북한의 세 가지 비전
북한의 강경 대응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또, 대미전략과 관련하여 지금의 이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지혜가 필요한 것일까? 2018년 한반도문제를 위한 국제협상 국면이 전개되면서, 북한은 세 개의 비전을 가졌던 것으로 풀이된다. 하나는 경제성장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북한은 1980년대 이후 처음으로 2016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한 바 있고, 올해가 그 마지막 해로써 인민들과 약속한 경제성장을 달성해야 하는 부담감이 크다. 하지만 2016년 이후의 대북경제제재는 변하지 않고 있고, 더욱이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경제상황에 큰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짐작건대 첫 번째 비전은 실패했다.
두 번째는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로 국가 안보를 확보하는 것이다. 2018년 첫 북·미 정상회담에 임하는 김정은 위원장의 계산에는 한국전쟁 이후 지속되어 온 일탈 국가의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미국 정상과 단독회담을 진행하며 국가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받고 싶은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노이 ‘노딜’, 스톡홀름 실무회담 실패, 2020년 이후 트럼프 대통령의 무관심,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글로벌 외교무대의 경색 등이 이어지면서 두 번째 비전 역시 현재로서는 실패했다.
마지막 세 번째의 비전은 남한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한반도문제의 ‘남북한 중심성’을 확보하겠다는 계획이었다.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도보다리’에서의 내밀한 대화, 9·19 군사합의, 문재인 대통령의 백두산 방문 등이 보여주듯이 두 정상이 한반도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견고한 발판이 만들어지는 듯 했지만, 국제사회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제재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완고했고, 한국 정부가 시도한 최소한의 자율성 확보 시도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누구의 잘못을 탓하기 전에, 북한이 계획했던 세 번째 비전 역시 이뤄지지 않은 셈이다.
결국 논의의 초점은 이 시점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로 모아진다. 코로나19 사태가 미국에게 의외의 피해를 주었고,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태로 인해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은 집권 이후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다.
지난 1월 15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미·중 1단계 무역합의 서명식이 열렸다. 사진은 중국 무역협상 대표인 류허 부총리 등 중국 대표단과 오찬을 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 ⓒ연합
민주당은 일찌감치 전당대회를 치러 바이든 전 부통령을 대선후보로 선정한 상태이고, 오는 8월 말 집권 공화당은 전당대회를 개최해서 트럼프 대통령을 2020년 미국 대선 후보로 선정할 계획이다. 공화당 내부의 전통적인 지도자들조차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감추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적어도 연말까지 미국 외교당국은 북한 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지 않을 것이다.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진정성에 대해서 의구심을 거두지 않고 있는 미국 행정부는 선거를 앞두고 북한과 어떤 거래도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6월 18일 하와이에서 개최된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과 양제츠 중국 외교담당 정치국원 사이의 회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회담의 1차 목표는 미·중 간 2차 무역전쟁을 막아보자는 의도였지만, 스티븐 비건 국무부 부장관도 동석한 회담으로 알려져 한반도 문제 역시 다루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정확한 회담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대체적인 분석에 따르면 미·중 간에 현 시점에서 북한문제가 악화되지 않아야 한다는 공감대는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2) 이와 동시에 국내 언론은 중국이 북한에 80만 톤의 식량을 지원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지원 규모에 대한 진위여부를 놓고 다소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의 대북 식량지원 자체는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중국이 북한의 빅브라더 역할을 담당한다고 하더라도, 미국 주도의 대북 국제제재가 엄격히 작동하고 있는 현실에서 그 정도의 경제지원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일 것이다. 따라서 폼페이오 장관과 양제츠 정치국원 회동 당시 이 이슈와 관련한 의견이 조율되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2) U.S. Department of State’s Brief, “Secretary Pompeo’s Meeting With Poliburo Member Yang Jiechi”, June 18, 2020.
우리 정부가 떠안은 까다로운 과제,
가치와 이익 사이 한·미·중 이해관계의 접점 찾아야
북한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문제 해결은 평화로운 방법에 의해서 이뤄져야 한다는 우리 국민들의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최근 대북정책 방향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유화책’과 ‘현행유지’가 48%로 조사돼 ‘강경책 선호(40%)’보다 다소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3)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가까운 시일 안에 미국의 대북 강경 입장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우리 정부가 미국과 북한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또한 어떤 정책을 개발할 것인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진정성이 확인되어야 하고, 동시에 미국을 상대로 한국의 대북정책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 관례적으로 보건대, 올 하반기부터 내년 6월 정도까지의 시간은 미국의 대북정책이 일종의 휴지기에 들어서는 시간이다.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에는 대체로 겨울에서 다음 해 봄 사이에 재집권 여부와 무관하게 주요 외교사안에 대한 종합적인 리뷰 작업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3) 리얼미터, “대북정책방향 여론조사,” 2020년 6월 22일.
지난 5월 29일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의 홍콩 국가보안법 처리 강행 보복 조치로 홍콩의 특별지위를 철폐하는 절차를 시작한다고 밝혔고, 중국 편향적이라고 비난해 왔던 세계보건기구와의 관계도 끝내겠다고 선언했다. ⓒ연합
대북 정책 자율성은 미국의 전략과 생각을 너무 앞서 나가서 미국이 우리 정부의 ‘비핵평화프로세스’ 자체에 의구심을 품을 정도여도 안 될 것이고, 북한이 어렵게 마련된 협상테이블을 떠나 또 다시 고난의 행군을 선택하게 만들 정도로 약해서도 안 될 것이다. 홍콩 보안법, 미국-인도 밀착, 9월의 G7, EPN(경제번영네트워크) 제안 등으로 인해 미·중 간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질 전망인데, 미·중게임을 어떻게 한반도 게임의 긍정적 요인으로 전환시키느냐는 현 시점에서 우리 정부가 떠안은 절체절명의 과제이다.
미·중 사이에서 ‘거리의 균형’을 유지하던 시간이 막을 내리고 있다. ‘가치의 중심’과 ‘이익의 균형’이라는 원칙 아래 한·미·중 이해관계의 접점을 찾는 노력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박 인 휘
이화여자대학교 스크랜튼대학 국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