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 Vol 1652020.07

남한의 군사도발 기사. 『동아일보』. 1970년 6월 24일. 6면.

남북관계 아카이브

전쟁 70년 후:
우리는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 걸까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되었다. 정부수립과 함께 시작된 남북한의 역사 전체와 유사하다. 그동안 남북한 사이에는 수많은 사건이 있었고, 그중에서 가장 위협적인 사건은 역시 군사충돌일 것이다.

다시 한국전쟁을 호명하는 이유
“이제 새로운 100년은 과거와 질적으로 다른 100년이 될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3·1절 100주년 기념식에서 한반도의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과거 100년’의 역사와는 다른 ‘미래 100년’의 새로운 기획으로 ‘신한반도체제’를 제시했다. 남한만의 역사도 아니고 북한만의 역사도 아닌, 한반도 차원의, 남북한 공동의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자는 제안이었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임시정부는 우리 헌법의 기초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통해 한반도 최초의 근대국민국가 탄생을 알렸다. 100년 전의 일이다. 근대국민국가 100년 동안 한반도의 역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지난 100년 동안 남북한은 70년을 싸워왔다. 70년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덮을만큼 긴 시간이며, 국가 차원에서도 남북한 전체의 역사를 뒤덮는 시간이다. 지난 70년 동안 남북한은 분쟁과 갈등 그리고 충돌의 나쁜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군사도발 기사. 『로동신문』. 1963년 7월 26일. 3면.

최근 개성의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되었다. 남북한의 공식적인 대화창구라는 현실적인 역할뿐만 아니라, 정치적 상징성 때문에 공동연락사무소 폭파사건은 충격적이다. 남북관계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우리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그것도 70년 전 한국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을 며칠 앞두고 말이다.

잘잘못을 논할 상황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나의 사건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기 마련이고, 그 중심에는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닮은 듯 서로 다른 남북한의 지난 70년 갈등과 충돌의 역사를 돌아본다. 아프고 외면하고 싶지만, 시퍼렇게 날 선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전쟁과 갈등의 역사가 여기에 있다.

징글징글한 전쟁의 흔적: 남북한 군사충돌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되었다. 정부 수립과 함께 시작된 남북한의 역사 전체와 유사하다. 그동안 남북한 사이에는 수많은 사건이 있었고, 그중에서 가장 위협적인 사건은 역시 군사충돌일 것이다. 동국대학교 DMZ평화센터는 2015년부터 3년 동안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1945년부터 2015년까지 발생한 남북한 사이의 군사충돌 사례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남북한 각각의 언론 기사, 공식 문헌을 통한 연구라는 점에서 온전한 결과는 아닐 수 있지만, 몇 가지 사실은 미래 남북관계를 설계하는 데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첫째, 한국전쟁 시기를 제외하고 1945~2015년까지 남한 『동아일보』는 북한의 대남 군사도발 사건을 2,940건 기사화했다. 반면 북한 『로동신문』은 남한의 정전협정 위반 사건을 9,239건 보도했다. 그중에서 인명살상 등 직접적인 총격전, 간첩침투와 같은 ‘주요한 군사충돌’은 대남도발이 2,000여 건, 대북도발이 2,800여 건이다.

남북한 언론의 기사 빈도 차이는 『로동신문』이 미군 비행기의 비월경 정찰행위 등을 심각한 군사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관련 보도를 늘린 반면, 『동아일보』는 침투교전이나 해상교전 등 비교적 ‘주요한 정전협정 위반 사건’을 중심으로 보도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 기간 3년을 제외하고 2015년까지 발생한 주요한 군사충돌은 매달 남한지역에서 2.5건, 북한지역에서 3.6건 발생했다. 그리고 남북한 언론은 증오를 표하고 사건의 책임을 상대에게 돌려 ‘국민’과 ‘인민’에게 유포했다.


둘째, 더욱 놀라운 사실은 남북한이 주장하는 상대의 군사도발 사례들을 비교해 보면 동일한 사건이 매우 적다는 점이다. 『로동신문』과 남한 정부문서를 비교해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사건은 180여 건에 불과하다.1) 각자 피해를 입었고 상대가 공격했다고 주장하는 무수한 군사도발 중에서 남북한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사건이 그렇다는 것이다. 남북한 언론을 종합하면 한반도의 유력 언론들은 매주 1건 이상의 군사도발 기사를 보도했다.

셋째, 북한의 대남도발은 간첩침투 등 남한 전 지역에 걸쳐 진행되었고, 남한의 대북도발은 DMZ 지역에서 발생했다. 북한의 대남 통일전선전술과 국군·미군의 DMZ 인근 군사작전의 영향으로 보인다.
1) 대표적인 공통 사례는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기습 무장공비사건,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미루나무사건, 1999년 6월 16일 발생한 1차 서해교전 등이다. 남북한이 상호 공개하지 않은 사건까지 고려하면 사례는 더욱 늘어날 수 있다.

『동아일보』는 정전협정 위반 사건 중에서 ‘군인 생포 또는 부상’을 포함해서 간첩사건을 가장 비중 있게 다뤘다. 군사충돌 사건 보도 2,017건 중 절반 이상인 1,025 건이 간첩사건으로 분류되었다. 같은 시기 『경향신문』 역시 전체 1,716건 중 1,009건이 간첩사건이었다. 이에 비해 『로동신문』은 DMZ 지역의 군사도발 기사를 많이 다루고 있다. 1960년대 후반 중앙집중적 행정 체계가 강화되는 북한에서 간첩사건 발생보다는 접경지 군사충돌사건에 집중한 측면이 있어 보인다.

넷째, 『동아일보』와 『로동신문』의 군사도발 기사 비중(%)은 1960년대와 1990년대 공통적으로 높게 나타나고 있다. 1960년대 남북한 사이에 군사충돌이 빈번한 이유는 △북한이 미군과 국군의 베트남전쟁 파병을 저지하기 위한 의도, △1960년대 중후반 북한의 ‘경제국방 병진노선’ 채택, △남한에 등장한 군사정부에 대한 견제 등이 주요한 원인으로 보인다. 같은 시기 남한의 대북 군사도발이 강화된 사례는 북한의 공세적인 대남전략에 대한 보복적 대응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6월 22일 경기 파주에서 탈북단체가 보낸 대북전단 살포용 풍선이 23일 홍천군 서면 마곡리 인근 야산에 떨어져 경찰이 이를 수거하고 있다. ⓒ연합
1990년대 중반 다시 늘어나는 쌍방에 대한 도발 기사는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 전환, 북한의 경제난과 깊은 관계가 있다. 북한은 ‘고난의 행군’이 라는 미증유의 경제난에 대처하며 내부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들기로 하고 남한과 미국 때리기 전략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남한 언론은 1990년대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북한의 경제난을 악의적으로 이용하고 탈북·월남 귀순자 기사를 양산하면서 ‘북한붕괴론’을 부추겼다.


적대적 상호의존성: 증오의 무한 확산·반복·증폭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우리 앞에는 다시 남북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놓여 있다. 최근 대북 삐라가 남북관계를 다시 냉전시대로 돌려놓고 있다. 적을 때리면서 닮아가고 의존했던 지난 70년 증오의 역사가 되풀이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삐라문제에서 촉발한 갈등이긴 하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쌍방 간의 신뢰 부족일 것이다. 그러나 국가 간 신뢰는 하루아침에 ‘선언’이나 ‘합의’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남북한은 아직 신뢰 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을 뿐이다. 그만큼 위태롭고 불안하며 조심스런 상태라는 것이다.

다시 군사도발의 유혹이 호시탐탐 한반도를 위협하고 있다. 언제까지 이 ‘무모하고 미친 행동’을 계속할지 한국전쟁 70년을 즈음해서 남북한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아픈 기억도, 짜증나는 역사도 모두 우리 것이다. 이 역사가 말뿐인 반성과 성찰이 아닌 ‘새로운 100년의 한반도 역사’를 설계하는 거름이 되기를 희망한다.

6월 20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대규모 대남삐라(전단) 살포를 위한 준비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연합
김 일 한 동국대학교 DMZ평화센터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