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 Vol 1652020.07

교동도 망향대에서 바라본 북한 황해도 연안군

평화통일의 길을 묻다

6·25전쟁 70년 평화로드, 강화 교동도를 가다

눈앞의 바다가 아닌
수평선 너머를 보며
남북관계 위기 풀어야

2020년 6월 25일, 6·25전쟁이 일어난 지 꼭 70년이 되는 날이다.
6월의 한반도는 전쟁과 평화 그리고 냉전과 열전 사이에서 언제나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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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을 맞아 화해와 협력의 남북관계와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를 꿈꾸지만, 여전히 전쟁과 분단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뜻깊은 6월, 우리는 남북협력의 상징인 남북연락사무소가 폭파되는 현장을 목도해야 했고, 남북관계를 대적관계로 전환하겠다는 북한의 엄포를 마주해야 했다. 남북 접경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 고향을 품고 사는 실향민들은 2020년의 6월을 어떻게 마주하고 있을까.

『통일시대』는 6·25전쟁 70주년인 6월 25일, 정세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과 함께 인천 강화군 교동도를 찾았다. 평온해 보이지만 아픈 삶을 사는, 그리움이 만든 생채기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실향민 품은 교동도, 하루빨리 분단을 끝내야...
교동도는 북한의 황해도 연안군을 마주보고 있다. 배를 타고 가야 했던 섬은 2014년 강화도와 교동도를 잇는 교동대교가 놓이면서 육지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다. 교동도는 민간인 통제구역이다. 교동대교를 건너기 직전 길목에서 군인이 차량을 막아선다. “출입증이 있습니까?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군인의 딱딱한 어투에 순간 긴장했지만 차량번호와 이름, 연락처를 적으니 바로 ‘임시 출입증’을 발급해 준다. 민간인 통제구역이지만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지역이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출입이 까다롭지 않다. 교동도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드넓은 들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교동도에는 3,300만여㎡의 농경지가 있다. 강화도에서 경작지 면적이 가장 넓고, 가구당 경작 면적도 가장 넓다고 한다. 섬같지 않은 너른 들판과 비옥한 땅. 이 땅을 연백군에서 넘어온 실향민들이 일궜다. 북한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연백군은 현재 연안군이 되었다.

실향민들은 고향을 떠나기 전 연백에서 농사를 지었다. 이들과 함께 연백의 농사기술이 교동에 들어왔고, 교동의 쌀은 유명해졌다. 6·25전쟁 당시, 곡창지대인 연백평야는 남과 북 모두 뺏길 수 없는 땅이었다. 인천 상륙작전으로 연합군이 들어오자 인민군은 연백평야를 사수하기 위해 대거 진을 쳤고, 연합군은 평양을 폭격한 후 바로 연백지역을 폭격했다. 연백에서 농사짓던 농민들은 폭격을 피해 쪽배를 타고 교동도에 피난을 왔다. 곧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던 고향은 그 후 70년 동안 바다 건너 바라만 봐야 하는 땅이 되었다.

1945년 만주에서 태어난 정세현 수석부의장과 1945년 황해도 연백군 온정면 낙선리 132번지에서 태어난 서경헌 교동도 실향민동우회장이 마주 앉았다.

정세현 수석부의장이 교동도 실향민과 대화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영애 상임위원, 정세현 수석부의장, 서경헌 실향민동우회장

정세현ㅣ 전쟁이 나자마자 교동으로 오셨습니까?

서경헌ㅣ 6살 때 아장아장 걸어 나왔어요. 고향집 생각은 나지도 않는데, 어머니가 옷이 든 가벼운 상자를 등에 메어 줬어요. 그거 들고 나온 기억이 나요. 방공호에 숨어 있다가 얼굴에 파편을 맞아서 이마에 상처도 났지요. 교동에 와서 1년 있다가 초등학교에 갔어요. 지금은 교동면 대룡리 29번길에 살고 있어요.

정세현ㅣ 전쟁 나자마자 오셨으면 저랑 동갑이겠네요. 선생님은 연백에서 교동으로 피난 오셨는데, 저는 지리산 밑으로 피난을 갔어요. 거기선 빨치산이 있어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서경헌ㅣ 피난 와서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어요. 보리밥도 부족해서 아침에 조금 먹고 남겼다가 점심에 먹곤 했어요. 지금은 땅도 있고, 쌀 수확량도 좋아지고 해서 살 만하지만 그땐 정말 힘들었죠. 교동도에 실향민 1세대는 이제 6~7명밖에 안 남았어요. 고향땅 한번 밟는 게, 눈앞에 보이는 저 땅을 한번 밟아 보는 게 소원이에요. 빨리 남북교류가 되고 통일이 되었으면 합니다.

정세현ㅣ 통일문제를 업으로 삼아 살아온 사람으로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하지 못한 죄책감이 듭니다. 하루빨리 분단을 끝내고, 북에서 오신 분들이 고향이라도 방문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해요. 북한이 보여주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고향 방문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북한이 문을 열 수 있도록 우리가 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저도 더 노력하겠습니다.

6·25 당시 피난온 실향민들이 함께 일군 농경지

연백의 삶이 녹아 있는 대룡시장
김영애 민주평통 상임위원(우리누리평화운동 대표)은 실향민 2세로 교동도 주민이다. 부모님이 연백에서 이곳으로 피난을 왔다. 그는 평화의 섬 교동도의 가치를 만들고 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교동도는 남북을 잇는 섬이자, 나아가 유라시아를 연결하는 거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교동도 일정을 동행하면서 길마다, 가게마다, 사람마다의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풀어냈다.

“대룡시장은 70년 전 북한의 연백마을을 담고 있어요. 옛날부터 교동사람들은 강화시장을 안보고 연백장을 봤어요. 실향민들이 이곳 교동에 연백과 비슷한 시장을 만든 거예요. 연백 식당, 연백 정육점 등 동네 이름을 건 가게들이 그대로 있어요. 북한은 이제 연백이라는 이름의 마을 자체가 없어졌지만 여기에는 연백이 있어요. 여기가 바로 통일자원인 거죠.”

피난민들은 교동에 와서 연백시장의 모습을 닮은 시장을 열었다. 원주민들은 이런 피난민을 밀어내지 않았다. 5,000명이 거주하던 곳에 연백에서 3만 명의 피난민이 왔지만 함께 쌀을 나누고 갯벌을 손으로 일궈 엄청난 땅의 농경지를 만들었다.

대부분 실향민 2세가 장사를 하고 있는 이곳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실향민 1세 할머니. 20대에 피난을 와서 66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자리에서 장사를 하고 계신다. 89세의 할머니는 일행에게 “먼 데를 오셨어”라고 한마디를 하시고 이내 가게로 들어가 앉으신다. 할아버지는 2009년 봄 평생 북녘만 바라보다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만물상 입구에 진열되어 있는 손수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손수건에는 실향민 어르신이 고향을 그리며 지은 시가 담겨 있다.

격강천리라더니 / 바라보고도 못 가는 고향일세 / 한강 임진강 예성강은 만나 바다로 흘러드는데 / 인간이 최고라더니 날짐승만 못하구나 / 새들은 날아서 고향을 오고 가련만 / 내 눈에는 인간을 조롱하듯 보이누나...



북한 연백시장을 닮은 교동도 대룡시장

철책 너머 바다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을 품고...
망향대에서 바라본 바다. 이 바다에는 분단선이 없다.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을 품은 바다는 교동도를 감싸 안고 서해로 흘러간다. 교동도를 포함한 한강 하구는 정전협정에 따라 남북한 민간 선박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지만 70년 동안 허가되지 않았다. 군사적 긴장이 여전한 상태에서 우발적 충돌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정세현 수석부의장은 2018년 9·19 공동선언의 군사 분야 합의가 이행되면 이곳의 뱃길도 열리고 고향 땅 한번 밟아보고자 하는 망향의 한도 풀릴거라는 희망을 전했다.

“2007년 10·4 선언에서 이 지역을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로 만들기로 합의했어요. 이 구상을 살려내는 노력을 해야 해요. 문재인 대통령도 2018년 4·27 선언과 9·19 선언에서 그런 구상을 했고, 남북 합의문에도 들어가 있어요. 이 선언이 이행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면 이곳은 다시 평화의 바다가 될 겁니다. 정부가 이를 위해 적극 나서야 하고, 국민도 뒷받침해줘야 해요. 그러면 망향의 한이 훨씬 줄어들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정세현 수석부의장이 남긴 메시지
개망초를 들고 망향대에서 북녘을 바라보는 정세현 수석부의장

6·25전쟁 70년이 되는 날. 교동도의 삶은 평온해 보였지만, 물길을 사이에 두고, DMZ를 사이에 두고 남북 간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주민들은 대북전단이 북으로 날아 갈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린다고 했다. 최근 긴장이 고조되면서 북한이 해안포 문을 열었다는 소식이 들렸고, 우리 군부대도 이동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전쟁 70년이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지루하고 힘든 이 과정을 어떻게 준비해 나가야 할까. 정세현 수석부의장은 눈앞의 바다가 아니 라 수평선 너머를 보라고 조언했다.

“보통 남북관계 이야기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눈앞의 일을 중심으로 이야기해요. 북한이 도발을 하면 ‘저런 사람들과 무슨 화해협력이냐’, ‘무슨 통일이냐’, ‘필요없다’고 합니다. 눈앞의 현실만 보는 근시안적 생각을 버려야 해요. 연안에서 어업하는 어부는 비가 오면 배를 띄우지 않지만, 원양어업 하는 어부는 포구에 비가와도 떠납니다. 수평선 너머는 비가 안 오고 태양이 빛나고 있다는 걸 아는 겁니다. 남북관계도 눈앞의 현실보다는 앞으로 10년, 20년 후를 보고 예견하면서 그쪽으로 나 갈 준비를 해야 해요. 통일문제를 생각할 때는 현미경적 시각보다 망원경적 시야를 가질 필요가 있어요. 멀리 내 다봐야 합니다.”

망향대에 개망초가 가득 피었다. 6월의 들녘에서 흔하게 만나는 이 꽃은 북아메리카가 원산지로 일본이 우리를 수탈하는 과정에서 들어와 6·25전쟁 때 전국으로 퍼졌다. 아픔을 딛고 피어났지만 개망초의 꽃말은 ‘화해’이다. 개망초 한 송이를 들고 철책 너머 연백평야를 바라본다. “분단을 하루빨리 끝내자”.
* 정세현 수석부의장과 함께한 평화로드 영상은 민주평통 유튜브 채널을 통해 볼 수 있다.
북한 황해도 연안군이 보이는 망향대
이 현 희 민주평통사무처 전문위원
김 성 헌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