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_코로나19 이후...
디스토피아를 피하는 방법
: 포스트 코로나 시대 ‘희망’을 생각한다
미래 사회를 그린 소설이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 중 하나는 사람들이 서로 접촉하지 않으며 기술의 통제에 순응하는 모습이다. 과학 기술이 완전히 장악한 세계에서 사람들은 과거에 행했던 수많은 행위들을 ‘야만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서로 모여 사는 것도 그렇고, 부대끼며 사랑하거나 싸우는 것도 모두 다 미개한 것으로 그려진다. 예컨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속 ‘문명인’들은 더 이상 결혼이나 출산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시험관을 통해 ‘완벽한 모습’을 한 채 세상에 태어나고, ‘소마’라고 불리는 마약을 먹으면서 항상 안정적이고 행복하게 사는 존재로 등장한다. 반면 ‘야만인’은 ‘문명인’과 분리된 채 지금의 우리가 살아가는 것처럼 서로 부대끼고 매 순간 고통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SF 영화에 등장하는 미래 모습도 비슷하다. 사람들은 철저하게통제되어 살아가고, 인간으로서의 자유, 존엄, 고통 등을 느끼려는 이들이 분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그려지기 일쑤다.
최근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그려왔던 디스토피아적 미래가 하나씩 현실화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중국에서 창궐한다는 소식을 들은 지 불과 반년이 조금 넘었다. 이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이렇게 완전히 멈추게 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들은 거의 없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우리의 일상은 파괴되었다. 여전히 상당수의 국가는 직장과 학교를 제한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위축된 경제로 인해 직장을 잃는 이들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국가가 나서서 재난 상황을 극복하려 하지만, 워낙 전 세계가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방역에서 그나마 선전하고 있는 국가들은 급격한 경제 위축으로 새로운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고, 처음부터 경제를 걱정하며 방역에 주저했던 몇몇 국가는 확진자와 사망자의 증가로 인해 사회 불안이 가중되고 있다.
상대적으로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에 위기를 맞은 한국은 적극적인 검사와 격리를 실시함으로써, 일상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면서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았다. 소위 ‘K-방역’으로 알려진 한국 정부의 대응은 사스와 메르스 사태의 교훈을 적극 참조한 방역 거버넌스 시스템과 선진적인 ICT(정보통신기술) 기술을 활용하여 확진자와 접촉자를 조기에 발견, 격리·치료하는 것을 요체로 한다. 거기에 상대방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성숙한 시민의식과 마스크와 같은 보호 장비를 쓰는 것에 거부감이 적다는 문화적 배경 등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정부의 가이드라인 아래 온 사회가 일사불란하게 바이러스에 대응했고, 이러한 성과는 초기의 확산세를 극복하고 현재의 안정적인 관리를 가능하게 하는 주요한 근간이 됐다.
지난 7월 22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공공시설 운영제한 조치 완화 결정에 따라 재개관한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시민들이 거리를 두고 디지털 도서관을 이용하고 있다. ⓒ연합
팬데믹 두려움이 불러온 혐오의 증가
하지만 이러한 K-방역에도 부작용은 존재한다. 코로나19 상황을 일종의 ‘예외상태(State of Emergency)’로 정의하면서, 개인의 자유나 인권 등의 가치가 쉽사리 무력화되는 것이 하나의 예이다. 확진자의 동선이 실시간으로 공표되고, 접촉자라는 이유로 자가격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혹여나 확진자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를 방문했다면, 그 사람의 부주의함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게 된다. 게다가 온라인에 등장하는 동선 관련 루머 또한 인격을 폄훼하는 방식으로 확산되었다. 바이러스를 두고 온 사회가 비난을 일삼자 확진자 혹은 접촉자는 혹여나 소문의 먹잇감이 될까 싶어 자신의 동선을 숨기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행동은 더 큰피해를 불러일으키게 돼 결국 법적 처벌까지 받는 사례도 등장했다.
갑작스레 마주한 팬데믹에 시민들은 특정한 집단을 희생양으로 낙인찍어 자신들의 두려움을 상쇄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예컨대 최근 서울대 유영순 교수 연구팀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코로나19 사태 6개월 동안 한국사회는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감이나 분노를 표출해왔다. 사태의 초반(2020년 1월 31일~2월 25일)까지는 중국인에 대한 혐오 표현이 60%를 넘나들었다면, 신천지 31번 환자가 등장한 2월 말부터는 신천지 신도들에 대한 혐오가 37.7%로 증가했다. 이후 이태원 클럽발 확산이 시작된 5월 13일을 기점으로 성소수자와 자가격리 위반자들에 대한 혐오 표현이 51.6%로 급증했다. 지금도 물류 창고와 방문판매업 등에서 확진자가 발생하며, 이들에 대한 적대와 혐오의 정서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이다. 방역에 따른 피로감이 고조되면 될수록 확진자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확산되고 있으며, 모두들 자신이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노출되고 있다.
자발적 고립 선택하는 인간, 더 강력해지는 국가
코로나19의 강력한 전파력을 감안했을 때 완전한 방역이란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백신과 치료제가 나올 때까지 모든 이들은 협력하며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사람들 사이의 신뢰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은 서로를 의심하고 비난하며, 가능하면 타자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양상이다. 바이러스에 노출되지 않도록 각자 성벽을 쌓고 자발적 고립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만나는 것도, 모이는 것도,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바이러스 팬데믹이라는 것은 일상의 멈춤을 의미하는 것이고 기존의 가치나 원칙이 일순간에 허물어질 수 있는 상황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외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서 통치 기관으로서의 국가는 더욱 강력한 힘을 갖게 되었다. 방역의 주축이 국가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국가는 이제 개인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을뿐더러, 기업 활동이나 사회를 특정 방식으로 통치할 명분이 생겼다. 지금까지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발전해왔다는 것을 감안하면 과히 체제의 대전환이라고 칭할 만하다. 예컨대 재난지원금이나 세제 혜택과 같은 적극적인 재정 정책 등은 팬데믹 상황에서 멈춰버린 경제를 국가가 주도하여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이었지만, 이것이 계속된다면 여러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강력한 국가가 경제 및 사회전반을 주도한다는 것은 권력의 전방위적 확장과 자유의 침해를 수반할 가능성이 높다.
재난 상황에서 국가를 중심으로 단결하는 것만이 생존하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최악의 상황에서 국가가 적절하게 대응하고 국민을 보호하는 것은 중요하다. 미국의 카오스적 상황만 봐도 그러하다. 하지만 비대해진 국가는 결국 ‘사회’의 자리를 빼앗을 확률이 높고, 이러한 상황이 혹여나 지금까지 인류 문명이 이룩한 ‘사회적인 것’의 영역과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닌지 경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인간으로서 상호간의 교류와 협력, 연대와 공존의 장이 ‘사회’라고 했을 때, 이제 국가가 나서 직접 ‘사회’를 운용하겠다고 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코로나19 사태로 얼어붙은 소비를 회복하기 위해 재난지원금을 지급한 후 사람들로 북적이는 서울 망원시장 ⓒ연합
새로운 미래 만들 수 있는 기회의 시간
하지만 비관에 빠질 필요는 없다. 팬데믹이라는 예외상황은 또 다른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영화 속 기술이 통제하는 미래 디스토피아 사회에서도 결국 인간성을 포기하지 못한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변화는 만들어진다. 지젝의 표현으로는 현재 우리가 목도하는 위기 상황은 작금의 시스템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결국 새로운 미래를 기획할 기회이기도 하다. 예컨대 더 많은 이윤을 위해 구축된 글로벌 밸류 체인(GVC)은 세계경제의 불균형과 불평등의 산물이며, 고도화된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생산물이다. 가난한 나라의 값싼 노동력과 자원을 활용하여 생산비는 최소화하고 이윤은 높이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 구조에서 급격하게 증가한 물류 이동은 더 많은 에너지 소비와 엄청난 환경 파괴의 주범이기도 했다. 경제 시스템이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 소비 욕구를 한없이 진작시키는 것도 중요했다. 마치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모두가 이 시스템의 연루자가 되어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하기를 반복해온 것이다. 이제 이 시스템이 자연을 파괴하고, 질병을 양산하며, 결국 인류의 생명을 위협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자의는 아니었지만 시스템을 멈추는 것만이 생존의 길이라는 해답 또한 얻었다. 결국 모두가 나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만 하는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는 결코 코로나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일하는 방식이 변할 것이고, 가족과 친지, 동료 등과의 커뮤니티 또한 급격하게 재편될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접촉이 줄어들면서 심리적인 불안감이나 사회 부적응 사례 또한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전히 미래의 향방은 지금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일자리를 나누고, 소비보다 재생에 관심을 기울이며, 자연과 상생하며, 기술을 인간을 위한 것으로 적절하게 활용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사이의 협력, 연대, 사랑 등의 가치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생물학적 생명보다 더욱 소중한 가치는 우리 모두가 인간다운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일 테니 말이다.
“미래의 향방은 지금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일자리를 나누고, 소비보다 재생에 관심을 기울이며, 자연과 상생하며, 기술을 인간을 위한 것으로 적절하게 활용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김 성 경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