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 Vol 1662020.08

김형석 평창국제평화영화제 프로그래머

평화통일의 길을 묻다

그럼에도
‘다시, 평화’를 말하는 이유

김형석 평창국제평화영화제 프로그래머

지난 6월 18일부터 23일까지 강원도 평창에서 제2회 평창국제평화영화제가 열렸다. 코로나19 이후 오프라인으로는 처음 열린 영화제는 철저한 방역과 지역민들의 협조, 관객들의 큰 호응 속에 치러졌다. 영화제가 마무리된 후 서울에 위치한 한국영화박물관에서 김형석 프로그래머를 만났다. 다소 생소한 ‘프로그래머’라는 직책을 그는 영화제의 기획과 운영 전반에 관여하며 ‘영화제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누구보다 영화제의 무사 폐막을 바랐을 그와 함께 평창국제평화영화제의 의미와 성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2018년 동계올림픽 이후 평화의 상징이 된 평창에서 제2회 평창국제평화영화제가 개최됐다. 지난해 ‘남북평화영화제’라는 이름으로 열렸던 영화제는 올해 명칭을 바꾸고, 운영 면에서도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다. 멀티플렉스 중심의 영화제에서 탈피해 지역의 자연과 특성을 최대한 살려 특색을 더한 것이다.

김형석 프로그래머는 “1회 영화제를 치르며 많은 반성과 개선을 했다”며 “영화제의 주제인 ‘평화’를 남북으로 한정시켜선 안 된다는 생각에 이름을 바꾸고, 지역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으로 영화제를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이중 삼중 방역망 속 무사히 치러진 영화제
코로나19 속에서 치러진 영화제의 화두는 단연 ‘방역’이었다. 다른 영화제들이 코로나19로 취소되거나 온라인 개최를 결정하는 상황에서 일정을 강행하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김 프로그래머는 “평창은 청정지역이고, 인구밀도가 낮아 방역만 제대로 한다면 꽤 괜찮은 영화제를 치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다”고 전했다.

영화제 기간 상영관을 비롯한 모든 행사 공간에는 이중 삼중의 방역이 이뤄졌다. 가장 눈에 띈 것은 ‘클린강원 패스포트’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클린강원 패스포트는 강원도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만든 QR코드 기반 방문자 출입내역 및 발열관리 시스템이다. 평창국제평화영화제는 실내외 상영관과 행사장에 QR코드를 부착하고, 행사장에 출입하는 모든 인원을 대상으로 클린강원 패스포트를 실행했다.

상영관 안에는 적은 인원만 입장할 수 있도록 좌석 간격과 개수를 조정하고 매일, 매시간 발열 체크, 문진표 작성, 소독을 진행했다. 상영관뿐 아니라 행사장, 게스트 라운지, 프레스센터 등 영화제가 진행되는 모든 공간에서 방역 매뉴얼이 철저히 지켜졌다.

코로나19는 관객과의 대화 풍경도 바꿔놓았다. 입국이 어려운 해외 감독들은 영상으로 관객들을 만났고, 환경 필름이 부착된 마이크를 사용했으며, 감독들은 음식점에서나 볼 수 있었던 투명마스크를 끼고 대화에 나섰다. 영화제가 끝난 후 항상 열리던 리셉션은 도시락을 나눠주는 것으로 대체했고, 자연스럽게 거리두기를 할 수 있는 야외 상영관을 적극 활용했다.

김 프로그래머는 “영화제 기간 약 만 명의 인원이 방문했는데, 공간을 최대한 넓히고 철저히 방역을 진행해무사히 영화제를 치를 수 있었다”며 “다행히 영화제가 끝나고 잠복기도 지난 시점인데 영화제를 통한 감염 사례는 없어 보인다”고 전했다.

<어느 수학자의 모험> 토르 클라인 | 2020 | 102min

<실종> 페르난다 발라데즈 | 2020 | 97min

<남부군> 정지영 | 1990 | 157min


34개국 96편의 작품 상영, 일상의 평화 다시 찾는 시간
올해 영화제에는 전 세계 34개국에서 출품된 96편의 작품이 상영됐다. 그중 개막작은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수학자 스타니스와프 울람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한 영화 <어느 수학자의 모험>이었다.

<어느 수학자의 모험>은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원자폭탄 개발에 일조하며 전쟁의 가해자가 된 울람의 삶을 이야기 한다. 김 프로그래머는 “원자폭탄이 개발되면서 수많은 전쟁 피해자가 생겨났는데, 관객들은 전쟁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울람의 아이러니한 삶을 보며 전쟁과 평화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된다”며 개막작 선정 이유를 밝혔다.

멕시코의 여성감독인 페르난다 발라데즈의 <실종>도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미국으로 가겠다며 집을 떠난 후 실종된 아들의 흔적을 찾아나서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이번 영화제에서 ‘국제장편경쟁’ 심사위원 대상을 받으며 주목받았다. 이와 함께 정지영 감독의 <남부군>도 올해 개봉 30주년을 맞아 4K(고화질 비디오) 버전으로 리마스터링 돼 ‘한국영화 클래식’ 프로그램에서 최초 공개됐다. 영화 상영 후에는 정지영 감독과 함께하는 관객과의 소통 시간도 마련돼 의미를 더했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프로그램도 여럿 있었다. ‘여성’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인 ‘스펙트럼K’에서는 여성감독이 만든 다섯 편의 여성영화가 상영됐다. 김 프로그래머는 “평화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여성이고 한국 영화에서도 중요한 화두이지만, 그동안 이들이 모여서 이야기 할 수 있는 자리가 없었다”며 “대화의 장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관객과 감독들에게 많은 호평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여름영화산책’ 프로그램은 일상의 평화를 다시 찾는 기회였다. 해 질 무렵 야외상영관에서 온 가족이 즐길수 있는 영화들이 상영됐고, 상영 전에는 라이브 공연도 펼쳐졌다. 관객들은 자유롭게 돗자리를 펴고 앉아 공연과 영화를 감상하며 코로나19로 잃어버렸던 여유와 즐거움을 만끽했다.

여성 영화감독과 함께한 스펙트럼K 토크

야외 상영관에서 진행된 여름영화산책 프로그램


지역과 함께 만든 영화제, 예상치 못한 시너지
평창국제평화영화제에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 중 하나는 평창이라는 장소의 매력을 영화제 안에 담아내는 것이었다. 김 프로그래머는 이를 위해 “영화제를 준비하는 단계부터 지역 주민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지역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영화제를 기획했다”고 전했다. 지역을 소개하는 지도와 스탬프를 만들고, 지역상인 및 단체와 함께하는 다양한 이벤트와 특산품 판매도 이루어졌다. 지역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유료 관객들에게는 지역상품권도 증정했다.

코로나19 이후 지역 축제와 행사가 위축돼 어려움을 겪던 평창의 상인과 주민들에게는 무척 반가운 시도였다. 김 프로그래머는 “영화제를 통해 맑은 공기와 철저한 방역 시스템, 깨끗한 숙소와 맛집 등 평창의 장점들이 많이 알려져 주민과 상인들의 평가가 굉장히 좋았고, 영화제가 아니더라도 평창을 다시 찾겠다는 관객들이 많았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그는 평화영화제 자체에도 큰 의의를 뒀다. 한국에 수많은 영화제가 개최되고 있음에도 그동안 평화를 테마로 한 영화제는 없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데, 사실은 평화영화제가 좀 더 빨리 만들어졌어야 해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냉전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분들이 많은 상황인데, 그럼에도 이런 영화제를 용기 있게 시작했고, 정치적 상황이 어떻든 간에 우리는 꾸준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려고 해요.”

그 과정에서 발굴한 북한 영화 <새>는 영화제의 역할에 대한 확신도 가져왔다. 지난 1회 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새>를 상영하는 과정에 관련 연구자와 전문가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장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북한 영화를 들여와 상영하는 것이 쉽지 않은 현실에서 영화제는 좋은 소통 창구였다.

김 프로그래머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북한 영화를 들여오고 상영하려고 한다”며 “이런 시도가 하나 둘 쌓이면 관심 있는 분들이 매년 6월 평창에 와서 영화를 보고 토론하며 자연스럽게 네트워크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메인스트림이 아닌 마이너리티도 골고루 조명 받고 균형을 맞출 수 있어야 평화를 위한 환경이 만들어 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라는 의미의 스펙트럼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계속 넓혀가는 것이 영화제의 중요한 과제죠.”


영화제 통해 평화의 스펙트럼 넓히는 것이 목표
평창동계올림픽의 평화 정신을 이어받아 만들어진 영화제지만, 최근 남북관계는 녹록지 않은 상황. 이것이 영화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았느냐는 질문에 김 프로그래머는 “우리 영화제에서 남북관계는 정체성의 일부일 뿐 전체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평화를 테마로 하다 보니 그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사실은 이럴 때일수록 평화를 이야기해야 하는 당위성은 더 커진다”며 “남북관계에 일희일비할 거라면 처음부터 시작도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어 그는 “문화는 정치의 종속변수가 아니”라며 “지금까지 대중문화나 스포츠는 남북 화해무드의 상징적 이벤트처럼 사용돼 왔지만, 이제는 그것을 넘어서 문화, 스포츠, 관광 등에서 독자적으로 교류가 추진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6·15 남북 정상회담 20주년과 6·25전쟁 발발 70주년. 평화와 전쟁의 사이에서 열린 올해 평창국제평화영화제의 슬로건은 ‘다시, 평화’였다. 코로나19로 일상이 무너지고, 전 세계적으로 갈등과 차별, 혐오의 문제가 불거지는 상황에서 평화는 더욱 절실한 가치가 되고 있다.

평창국제평화영화제는 이런 상황에 주목하며, 삶의 여러 부분에서 평화를 포착하고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다양한 평화의 형태를 보여주고자 했다. 한국 독립영화계의 재능 있는 감독을 재조명하는 ‘클로즈업’과, 영화제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주제인 아이들을 테마로 한 ‘POV: 안녕, 아이들’을 올해 새 프로그램으로 구성한 것이 그 일환이었다. ‘평화영화제에서 이런 것도 다루는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김 프로그래머는 이를 “굉장히 중요한 시도”라고 표현했다.

“메인스트림이 아닌 마이너리티도 골고루 조명 받고 균형을 맞출 수 있어야 평화를 위한 환경이 만들어 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라는 의미의 스펙트럼을 다양하게 활용하고, 계속 넓혀가는 것이 영화제의 중요한 과제죠.”

김 프로그래머는 인터뷰 말미에 “평화는 의미가 명확히 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명확히 규정된 것이 아니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상태가 평화라고 한다면, 평창국제평화영화제가 담아야 할 이야기도 무궁무진한 것이 아닐까. 앞으로 평창국제평화영화제가 만들어갈 평화의 길이 기대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