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평화 ROAD
남북 평화의 마중물,
김포시의 접경 수로를 따라
강원도 고성에서 시작된 남북 군사분계선(MDL)은 서쪽으로 248km나 하염없이 이어져 파주 탄현에서 숨을 몰아쉬고 멈춘다. 이도 모자라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서 눈물마저 보탠 조강(祖江)은 철책 없는 경계로 여전히 남북을 가른다. 바다가 시작되는 강, 김포의 조강은 이른바 ‘한강하구중립수역’이다. 1953년 7월의 정전협정은 엄연히 이 수역에서 무장하지 않은 민간선박의 자유로운 항행을 보장하고 있건만, 우리 사정에 아랑곳없는 유엔사의 규정은 칼 슈미트가 말했던 ‘예외상태’가 무엇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김포는 섬이다. 서쪽 황해, 동쪽 한강, 북쪽은 조강인데, 남쪽으로 아라뱃길 수로가 뚫려 김포도(金浦島)가 된지 벌써 8년이다. 나는 옛 김포반도의 북쪽 내륙 귀전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엔 그만 해도 평온한 동네라 북한의 선전삐라를 재미쯤으로 여겼을 뿐, 무시무시한 접경지역을 헤아릴 깜냥은 없었다. 타지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다시 김포로 온 지 20여 년이 되었지만, 서울로 고단히 출퇴근하느라 철책의 무게를 절감하지도 못했다. 최근에서야 탕자처럼 돌아와 고향의 오랜 역사와 문화유산을 하나둘 보듬으며 단장(斷腸)의 아픔을 헤아리고 있다.
Course. 1 포구와 나루로 둘러싸인 수로의 고장
오늘날 김포시는 조선시대 김포(金浦)와 통진(通津)이라는 두 고을이 1914년 이후 하나로 통합된 지역이다. 그때 양천(陽川) 고을도 김포에 통합되었다가 1960년대 서울로 편입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1930년대 건설된 김포공항을 아직도 김포시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유도 바로 그런 사연 때문이다. 김포의 ‘포(浦)’와 통진의 ‘진(津)’에서도 알 수 있듯 포구와 나루가 있었던 이곳은 동서남북이 물길로 이어진 사통팔달의 고장이다. 근래 김포시는 모두 11개의 포구를 발굴 및 조사했는데, 이는 과거에 존재했던 전체 포구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 포구는 또한 대체로 교통로 구실을 병행한 나루터이기도 했다. 이 외에도 한강하구에 위치한 김포는 벼농사에 적합한 토양과 풍부한 수량, 기후조건을 갖추어 삼국시대부터 남북국 세력이 국가의 사활을 걸고 차지하려 했던 요충지였다. 현재의 남북 분단도 어찌 보면 과거로부터 오랜 세월 누적된 인과의 찰나요, 앞으로 지속될 평화의 서막에 불과하다고 위안해본다.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문화재청
Course. 2 대명포구에서 갑곶나루의 석축로까지
김포 평화누리길 1코스가 시작되는 대명포구는 초지대교가 놓여 나루의 기능을 상실하긴 했지만, 여전히 강화도 연안에 마주한 유일한 항구이다. 2001년 ‘한국관광공사 추천 겨울바다 7선’에 꼽힌 대명항은 아름다운 경치와 싱싱한 수산물로 언제나 활력 넘치는 포구의 정취를 품고 있다. 함상공원을 지나서 바닷길을 따라 북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역사의 현장인 덕포진과 손돌목이 나온다. 덕포진은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 때 건너편 강화와 함께 외세를 격퇴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해협이지만 물살이 거세기로 유명한 이곳 염하(鹽河)의 손돌목에는 슬픈 전설이 깃들어 있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로 피난하던 중 이곳에 이른 임금은 거센 물길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다. 그러다 지혜로운 뱃사공 손돌을 만났는데, 임금은 그를 의심한 나머지 죽여버린다. 하지만 손돌의 마지막 조언 덕분에 임금은 무사히 해협을 건널 수 있었다는 전설이다. 피난 가는 임금은 그 누구든 백성을 돌아보지 않는다. 시대와 체제는 바뀌었지만, 한국전쟁 발발 때에도 서울 시민을 비정하게 버려두고 피신한 대통령이 있었다. 전설은 이렇듯 사실과 맞닿아 있다.
철책으로 이어진 평화누리길 1코스를 따라 북쪽으로 걷다보면 어느덧 포내천 하구를 건너 강화대교 밑에 이른다. 여기서 평화누리길 2코스로 이어지는 문수산성 남문쪽으로 가지 말고 계속 염하를 따라 300m 남짓 가면 옛 갑곶나루의 석축이 보인다. 이곳은 과거 김포에서 통진을 거쳐 최단거리로 강화성에 이를 수 있는 나루였다. 강화를 오갔던 우리 역사의 온갖 발걸음은 거의 다이 나루를 지나간 셈이다. 수심도 비교적 얕아 고려 때 몽고의 침략군들이 갑옷을 벗어 쌓아 놓고 건너갔다 해서 ‘갑곶’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당시에는 별도의 나루터 시설이 없었는데, 조선 세종 때 이곳 통진으로 유배를 온 박신(朴信, 1362~1444)이 자신의 사재를 털어 14년간 공사를 한 끝에 석축로를 완성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선착장은 일제강점기에 나루터가 폐쇄될 때까지 무려 500년간이나 사용되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석축로가 그저 귀하고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맞은편 강화읍의 갑곶나루터에도 역시 석축로가 남아 있다.
덕포진 ⓒ문화재청
Course. 3 남북의 가교, 조강 유역의 포구와 나루
갑곶나루를 지나서 염하를 따라 성동리 끝으로 계속 가다보면 보구곶리에서 조강을 만난다. 천릿길을 달려온 한강은 마지막에 임진강을 품으며 숨을 고르고 조강이라는 이름으로 흐른다. 한강의 끝자락이자 바다의 시작인 셈이다. 이런 곳을 ‘기수역(汽水域)’이라고 하는데, 염도가 민물보다는 높고 바닷물보다는 낮은 곳이다. 밀물과 썰물의 높낮이 폭, 즉 간만의 차이도 최대 10m에 이르는 험한 물길이 조강이다. 따라서 한강을 거슬러 서울을 향했던 삼남지방의 세곡선도, 근대 서구 문물을 실은 선박과 침략의 군함도 정확한 물때와 흐름의 방향을 알지 못하고는 감히 이곳을 지나갈 수 없었다. 사람들이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시간은 자연스레 조강 연안 강녕포와 조강포의 화려한 번영을 가져왔다. 강녕포는 건너편 북쪽 개풍구역의 영정리로, 조강포는 하조강리로 연결되어 나루터로서도 매우 중요한 지점이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은 이러한 소통과 연결의 공간을 불통과 단절의 장막으로 바꾸어놓았다. 덕분에 조강유역은 강녕포 앞 머무르섬 유도(留島)와 더불어 생태계의 보고가 되었으니, 비무장지대(DMZ)와 마찬가지로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평화누리길 1코스의 시작점 대명항
Course. 4 애기봉 전망대의 풍경과 평화생태공원
용의 전설이 서린 용강리의 강녕포를 벗어나 조강포로 가려면 두 마을을 길게 가르는 협곡 때문에 한참을 돌아가야 한다. 조강포 철책길을 걸어 너른 평야를 돌아나오면 문수산을 넘어온 평화누리길 2코스와 다시 만난다. 이 길을 따라 조강 동쪽으로 치솟은 애기봉에 올라본다. 병자호란 때 애기(愛妓)와 함께 피신해오던 평양감사는 미처 강을 넘기 전에 청나라 군사에게 붙잡히고, 애기만 홀로 건너와 이곳에서 임을 그리다 죽었다는 전설이 애기봉의 유래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당시 평안감사였던 홍명구(洪命耈 1596~1637)는 교전 끝에 적군 수백 명을 죽이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손돌의 예처럼 애기봉 전설 또한 사실과 다르다 할지라도, 다양한 관점에서 그 의미를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애기봉 전망대에 서자 중립수역의 조강 강물이 비장하게 흐르고, 건너편으로는 북녘땅 개풍구역의 산하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잠시 전에 지나온 왼쪽 아래 조강리로 고개를 돌려 철책에 갇힌 옛 포구의 풍요로운 자취도 나름 상상해본다. 오른쪽으로는 멀리 한강과 임진강이 합하여 조강이 되는, 이른바 ‘삼기하(三岐河)’가 파주 오두산 전망대에서보다 한결 또렷하다. 동쪽 끝 한강으로 거슬러 돌아가는 모서리는 김포 하성면 시암리다. 연화봉은 여기서 부드럽고 나지막한 산줄기 하나를 조강으로 흘려보낸다. 남북이 평화롭게 연결된다면 연화봉 줄기에서 아래쪽으로 세 강물을 내려다보는 전망이 김포시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애기봉은 지난 3년간의 공사를 마치고 이제 곧 새로운 전시관과 전망대를 지닌 평화생태공원으로 탈바꿈하여 시민들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애기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조강 하구와 유도
Course. 5 한강하구중립수역에 뱃길이 열리길 기대하며
김포 평화누리길 3코스는 애기봉 입구에서 전류리포구까지이다. 전류포구는 최근에 관광객의 방문이 급증하고 있는 김포의 명소다. 지난 2018년 7월에는 정전협정 65주년을 맞이하여 김포시와 시민단체에서 약 300여 명이 이곳에 모여 ‘한강하구 중립수역 뱃길열기 촉구 문화제’를 개최했다. 이를 기반으로 향후 김포시는 중립수역 항행 및 남북공동조사를 추진하고, 김포대교에서 이곳까지 철책선을 제거하는 작업에도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한강하구 중립수역 개방으로 김포가 남북분단의 1번지에서 평화 1번지로 극적인 반전을 가져오길 기대해본다. 그렇게 되면 서해에서 조강을 거쳐 한강까지 평화관광벨트가 구축되고, 조강리 일대에 통일경제자유구역이 들어서는 것도 수월해진다. 더 나아가 조강리에서 북한 개풍구역의 하조강리로 직접 다리가 놓인다면 그야말로 김포시의 접경 수로는 한반도 평화의 마중물이 될 것이다.
2018년 7월 27일 김포시 전류리포구에서 개최된 ‘한강하구 중립수역 뱃길 열기 촉구대회
조 민 재
김포역사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