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사랑채
연속된 만남이 만들어내는 진실
“남북이 다시 만납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씨의 고향은 평양이다. 만삭의 ‘위안부’ 사진으로 잘 알려진 박영심씨의 고향도 평양이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명부를 보면 남측의 피해자가 절대적으로 많지만, 평안남도, 평안북도 등 북측 출신도 적지 않다. 일본이 전쟁 수행 당시에 남쪽 지방을 중심으로 노동자를 강제 동원했던 것과는 달리, ‘위안부’의 경우 지역 차이를 두지 않고 강제동원했기 때문이다.
숨겨둔 상처 꺼내기, 그리고 연대하기
조선인 첫 ‘위안부’ 피해자로 알려진 배봉기 씨는 충남 예산군 신례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오키나와로 끌려가 ‘위안부’ 피해를 받고 돌아오지 못한 채 호적도 국적도 없이 살아왔다. 일본의 여성작가인 가와다 후미코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77년이었다. 가와다 후미코는 10년 동안 그녀의 삶을 가닥가닥 보듬으면서, 1987년 『빨간 기와집』이라는 책으로 발간했다. 그의 책은 ‘위안부’문제에 무관심했던 일본에 충격을 안겼다.
1990년 12월 18일 일본 국회의 참의원 외무위원회에서 사회민주당 참의원이자 일본부인회 회장이었던 시미즈 스미코 의원이 일본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의 정신대 강제연행 사실을 물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정신대로 강제연행을 한 사실이 없다”고 답했다. 이는 1991년 8월 한국에서 김학순 할머니가 “내가 강제로 끌려간 위안부다”라는 공개증언을 하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북측에서도 1992년에 리경생(평안남도 대동군 원천리, 당시 75세) 할머니가 용기를 냈다.
남측에서는 1990년 11월 16일에 37개의 여성단체가 모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발족했고, 북측에서는 1991년 1월 평양에서 개최된 제1차 조·일 정부 간 회담에서 일본 정부에 위안부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해 8월 ‘종군위안부 및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대책위원회(종태위)’가 결성되어 일본의 책임을 묻기 시작했다.
시미즈 스미코 씨는 1991년 아시아평화와 여성의 역할 토론회를 결성해 일본에서 두 차례, 한국과 북한에서 한 차례씩 토론회를 열고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토론했다. 1991년 5월에 열린 제1차 토론회에 참가한 남·북·일 대표는 일본군 ‘위안부’문제에 공동대처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991년의 이 만남은 비록 일본에서 이뤄졌지만 해방 이후 처음으로 남북 여성대표가 만나 ‘통일과 평화’를 이야기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매우 뜻깊은 만남이었다.
남북 피해자가 한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은 1992년 12월 9일 도쿄에서 열린 일본의 전후보상에 관한 국제공청회에서였다. 북측 피해자 김영실 씨가 증언을 마치자, 역시 증언을 위해 공청회장에 있던 강순애, 김학순 씨 등이 연단에 올라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고생했느냐, 이렇게 만날 줄 몰랐다”면서 눈물을 흘렸고, 즉석에서 서로 증언을 하며 “일본은 사죄하고 보상하라”고 말했다.
1993년 4월 도쿄에서 개최된 제4차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심포지엄에서 이효재 교수가, 1993년 11월 평양에서 개최된 일본 전후처리 문제에 관한 평양 국제토론회에서 북측 발표자 김은주 씨가 일본군 ‘위안부’를 일본군 성노예로 부를 것을 강조했고, ‘위안부’ 동원이 조선 민족에 대한 범죄라고 규정했다.
아사히 신문기자 출신인 마츠이 야요리는 ‘위안부’문제를 전시 성폭력 개념, 전쟁범죄로서의 성노예 개념으로 규정하고 책임자 처벌을 위한 모의재판으로써 2000년 여성국제전범법정을 구상했다. 당시 정대협은 북측 종태위에 함께 참여할 것을 제안하고, 1998년 10월 베이징의 일본군 ‘위안부’문제와 여성의 인권에 관한 남·북·일 여성의 3자회담에서 남북공동기소장을 작성했다. 이때 남측과 북측은 일제시기를 식민지가 아닌 ‘강제점령’으로 하여 일제 침략의 불법성에 동의했고, 북측의 주장대로 당시 조선과 일본제국은 전쟁상태였으므로 전쟁범죄인 인도에 반하는 범죄로 배상해야 한다고 적시했다.
남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는 일본제국의 불법점령속에서 이루어진 전쟁범죄이자 인도에 반한 범죄라는 인식을 공유했고, 이는 지금 우리 앞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다.
이제 다시 만나야 할 때
1991년 이후 남북은 서로 협력하면서 ‘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많은 노력을 이어 왔고, 이 과정에 일본 시민사회도 적극 연대했다. 그러나 일본의 아베 정권은 북한을 악마화했고, 한국에서도 이명박 정부의 남북 ‘접촉불허’ 방침에 따라 북한에 초청장도 보내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2014년 11월부터 시작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등재를 위해 북한과 겨우 연락이 닿았지만, 이 역시 박근혜 정부가 허락하지 않았다.
1991년 남북 여성들이 해방 후 처음으로 마주앉아 ‘위안부’ 문제 해결과 평화 그리고 통일을 이야기했다. 2000년 여성국제전범재판에서는 남북이 공동으로 일본의 범죄사실을 국제사회에 기소했다. 그러나 이들 만남은 슬프게도 모두 일본에서 이루어졌다. 남한에 살아계신 ‘위안부’ 피해자는 현재 18명에 지나지 않는다. 북에는 현재 몇 분이 살아계신지도 모른다.
우리는 2018년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명시한 대법원 승소판결을 얻어내는 성과를 냈다. 남과 북이 진지하게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비롯한 일본제국의 한반도 식민지 불법지배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일본제국의 사죄와 반성을 이끌어 내고, 남북통일과 동아시아 평화를 이야기해야 한다. 시간이 별로 없다.
1)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기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 사건[대법원2018. 10. 30. 선고 전원합의체 판결]
한 혜 인
아시아평화와역사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