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기 자문위원을 만나다
최연소 청년 협의회장이 떴다
최연소 협의회장으로
청년다운 신박함 보여드릴게요!
제20기 자문위원
영상으로 만나기
배정희
일본중부협의회장
아이치 시민법률사무소 변호사
  한국 나이 서른여덟. 평통 역사상 최연소로 협의회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배정희 자문위원은 협의회장에 임명된 것이 “영광”이라면서도 “동시에 긴장감이 느껴진다”는 소감을 전했다.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배정희 회장은 이모가 사는 일본을 종종 방문하며 일본 문화에 매료됐다. 2003년 일본어를 공부하겠다며 시작한 일본에서의 삶은 18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졌고, 현재는 일본 아이치시민법률사무소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재일코리안변호사회 이사, 세계한인차세대대회 일본지역 멘토, 주 나고야 총영사관 자문 변호사 등 왕성한 사회활동도 해 왔다.
어울리는 청년 회장, “청년답게 당당하게 자신 있게”
  본업에 사회활동까지 겸하며 지난 제19기 일본중부협의회 간사로 활동했던 배정희 회장은 각종 행사와 홍보, 회계까지 도맡아 전방위로 일했다. 그는 제19기 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워싱턴에서 열린 세계 청년위원 컨퍼런스에 참가했던 것이라며 “다른 청년들의 활동과 열정을 배우고 공유할 수 있는 기회였다”고 말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제20기 일본중부협의회는 “젊은 회장답게 직위, 연령, 성별에 상관없이 함께 참가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협의회를 만들고 싶다”고 전했다.
  중부협의회는 일본의 대표 도시 중 하나인 나고야를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국토 중앙에 위치해 지역적 특성상 독립적이고 보수적인 면이 있는 데다, 그간 재일동포 간의 역사적 인식, 문화와 사상적 충돌, 불필요한 감정싸움도 종종 있었다. 때문에 최연소, 여성 회장으로서 활동이 걱정스럽기도 하련만 배정희 회장은 오히려 당당함이 돋보였다.
  “제가 회장이 됐다고 하니 어떤 분이 ‘너는 박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여기저기 잘 붙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저는 일본에서 나고 자란 동포들과도 잘 지내고, 저처럼 중간에 오신 분들과도 감정이나 사상 같은 것을 공유할 수 있어요. 그런 점 때문에 저에게 기대도 해주시는 것 같고요. 저 역시 여기저기 잘 배려하면서 화합하는 협의회를 만들어보려고 해요.”
2019년 세계 청년위원 컨퍼런스에 참가한 평통 청년들 ⓒ배정희
  제20기에 임명된 일본중부협의회 자문위원은 총 48명. 태생, 정치적 성향, 사상, 성별, 연령 등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해야 하는 2년간의 동고동락이 시작됐다. “‘최연소’ 회장으로서 최연소답게 신박하고 매력적인 사업을 구상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느낀다”는 배정희 회장은 본업인 변호사로서 맡은 일을 성실히 하면서 한편으로는 한일 간의 가교라는 새로운 역할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제가 잘하면 나중에 다른 곳에서도 청년회장이 나올 수 있겠죠? 청년 협의회장으로서 당당하게, 자신 있게, 열정을 다해 활동하는 모습 보여드릴게요!”
제20기 자문위원을 만나다
국민참여공모로 자문위원 도전!
할아버지의 소원,
대(代) 이어 제가 이룰게요!
임승현
최연소 자문위원
군산기계공업고등학교 3학년
  “저는 통일이라는 말을 들으면 할아버지가 생각나요. 실향민이신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꿈이 고향에 가고 싶다는 거였거든요. 할머니께서 할아버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고향과 부모님을 계속 그리워하셨데요.” 만 18세로 ‘제20기 최연소 자문위원’이라는 타이틀이 아직은 어색한 임승현 자문위원은 “아직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두렵지만, 두려움보다는 당당함으로 나아가겠다”는 소감을 전했다.
  제20기 평통은 청년 세대의 참여와 역할을 이끌어내기 위해 자문위원 연령을 만 18세로 낮췄다. SNS를 통해 제20기 모집 소식을 보고 국민참여공모로 자문위원이 된 그에게 “할아버지의 한을 풀어 줄 수 있겠다”고 말해준 할머니의 응원과 격려는 큰 힘이 됐다.
  공부와 취업 등에 관심이 많은 또래 친구들과 달리 임승현 자문위원은 자기소개서에 ‘내일의 통일을 기대하며 늘 밤잠을 설친다’고 적을 정도로 평화통일에 관심이 많다. 그는 젊은세대가 평화통일에 더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며 “청년과 청소년의 평화통일에 대한 생각과 의견을 들어달라”고 말했다.
평화의 사회복지사가 꿈,
“통일되면 북한 친구 만나고 싶어요”
  임승현 자문위원은 각종 봉사활동과 시민참여 캠페인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어려운 사람을 대신해 목소리를 내고 베풀며 ‘평화의 사회복지사’가 되는 것이 꿈이다. 그런 그가 통일이 되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북한 친구 사귀기’였다.
  “저는 평화는 자유라고 생각해요. 한민족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자유롭게 교류하는 거죠. 통일이 되면 북한 친구를 만나서 너는 어떤 삶을 살았느냐고 묻고 싶어요. 더 나아가서는 북한 여자친구도 사귀고요.”
  임승현 자문위원은 벌써부터 청소년과 청년을 대상으로 한 평화통일 설문조사나 캠페인, 토론회 등 꽤 구체적인 활동들을 머릿속에 그려나가고 있다.
제20기 최연소 임승현 자문위원은 할아버지의 소원을 이루겠다는 각오를 전했다. ⓒ임승현
  할아버지의 소원은 어느덧 최연소 자문위원의 꿈이됐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이끌어나갈 제20기 자문위원이 된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각오와 다짐을 전했다.
  “황해도 신계군에서 태어나 전쟁포로로 남한에 오신 조명근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이뤄드리기 위해 게으름 피우지 않고 최선을 다할게요. 최연소 고등학생 자문위원으로서 작은 고추가 맵다는 걸 평통 활동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제20기 자문위원을 만나다
재외동포 참여공모로 자문위원 도전!
나는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3세,
한국인입니다
김타티야나
고려인 자문위원
세종학당 교사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소련에 살던 17만여 명의 고려인들이 척박한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다. 고려인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농사를 지으며 꿋꿋하게 견뎠고, 그 모습은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에게 고려인의 성실함과 정직함을 각인시켰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약 21만 명, 수도인 타슈켄트에는 7만 명이 거주한다. 제20기 자문위원이 된 김타티야나 씨도 고려인 3세로 그중 하나이다.
  “할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며 힘들게 사셨는데, 조국을 떠나온 뒤에도 족보를 보물처럼 간직했어요. 이 족보를 가지고 한국에 가면 친척을 찾을 수 있다면서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않으려 했던 할아버지의 뜻은 아들에게, 다시 손녀에게 대물림됐다. 어린 시절 러시아어보다 한국어를 먼저 배우며 친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곤 했던 아버지는 러시아 유학시절 만난 어머니와 결혼해 타슈켄트에 정착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한국에 관심이 많았던 김타티야나 자문위원은 “비록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스스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잊어본 적 없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간직해 온 족보 ⓒ김타티야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가까운 이웃,
“모든 국민이 평화롭게 살아가길”
  김 위원은 세종학당 교사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타슈켄트에는 고려인뿐 아니라 여러 민족이 함께 어우러져 산다. 때문에 세종학당에도 여러 민족 출신 학생들이 다니는데, 최근에는 한류, K-POP 등의 영향으로 청소년들의 입학이 많아졌다. 대부분 한국에서 공부하거나 일하기 위해, 또는 우즈베키스탄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 취업하기 위해 한국어를 배운다.
  김타티야나 자문위원도 어린시절 이곳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한국의 역사를 배우고 전통문화를 익히는 동안 그는 한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고, 그 꿈은 현실이 됐다. 평통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세종학당이 주최한 각종 남북통일 관련 활동과 행사에 참여하며 자신도 분단된 조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또 다른 꿈을 꾸게 됐다.
  “고려인들에게는 남과 북 모두 소중한 조국이기에 하루 빨리 통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교사로서 전쟁 경험이 없는 청소년들에게 평화의 소중함을 가르치고 싶어요. 또 고려인 4세 학생들에게 한국어뿐 아니라, 한 민족의 역사, 문화, 한(恨) 같은 고유의 얼도 가르치고 싶고요.”
  비록 두 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한국이 아주 가까운 이웃처럼 느껴진다는 김타티야나 자문위원은 한반도의 모든 국민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제20기 평통에 응원을 보냈다.
  “우즈베키스탄의 척박한 땅에 새싹을 틔우신 선조의 뜻을 잇는 자랑스러운 한민족이 되고 싶습니다. 제20기 평통을 응원합니다!”
제20기 자문위원을 만나다
북한이탈주민의 멘토를 꿈꾸며!
제2의 정주영을 꿈꾸는 청년 사업가
박영호
탈북민 자문위원
(주)리틀버즈 대표
  12살 소년이었던 박영호 자문위원은 형의 등에 업혀 두만강을 건넜다. 키 125cm, 몸무게 26kg의 영양실조 상태로 걸을 힘조차 없었다.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겪던 시기, 식량을 구하러 중국에 간 어머니와 연락이 끊기고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직후였다. 그렇게 도착한 중국에서도 어머니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운 좋게 만난 한국인 전도사를 통해 박영호 자문위원이 남한에 도착한 것은 2002년. 20여 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지만 그는 아직도 ‘남한 사회에 정착하는 중’이다.
  “한글도 모르고 까막눈인 상태로 남한에 왔어요. 초등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는데, 받아쓰기 시간에 ‘코끼리’를 쓰라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코끼리라는 단어도 몰랐고, 코끼리가 어떻게 생긴 건지도 몰랐거든요. 그 정도로 백지상태에서 적응을 해야 했죠.”
  하지만 담임선생님을 비롯해 당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은 그가 똑바로 설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주었다.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그때의 만남과 경험들로 자신이 더 단단해질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는 박영호 자문위원은 자신의 경험을 살려 북한이탈주민의 정착과 창업지원 등 멘토링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고 전했다.
푸드트럭을 운영하던 시절 박영호 자문위원 ⓒ박영호
연 매출 10억 달성, 밥 사주는 사람 되고파
  박영호 자문위원은 사업가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제2의 정주영을 목표로 창업에 뛰어들었다. 처음 시작은 오직 돈을 벌겠다는 게 목표였다. 돈을 벌어서 자신과 같은 북한이탈주민에게 밥도 사주고 커피도 사주고 싶었다. 때마침(2014년) 우리나라에서 푸드트럭이 합법화되었고, 그는 푸드트럭 ‘청년상회’의 사장님이 되어 ‘파이팅’, ‘열정’, ‘대박’ 같은 독특한 이름의 토스트와 커피를 팔았다.
  “처음에는 성적이 저조해서 매출이 0원일 때도 있었죠. 몇 달 동안은 정말 힘들었는데 여러 기관에서 도움을 받으며 점점 자리가 잡혔어요. 7년 정도는 365일 하루도 쉬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러한 노력으로 연 매출 10억 원을 달성하기도 했지만 이어 코로나19가 닥쳤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잠시 푸드트럭 사업을 접은 그는 방역전문업체를 차려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평통 자문위원이자 청년 사업가이자 MZ세대로서 또 ‘먼저 한국에 온 사람’으로서 박영호 자문위원이 느끼는 책임감은 크다.
  “북한이탈주민이 남한 사회에 잘 정착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남북 청년이 모여 고민하고 함께 정책을 만들어 좋은 결과를 내고 싶어요. 이렇게 함께 어울리고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 바로 평화통일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