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경축사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구조 변화 대응하며
능동적·장기적으로 접근하자
광복 76주년. 8·15 경축사 내용을 살펴보며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현재와 우리의 과제를 진단한다.
  우리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코로나19는 시간으로 보면 장기적이고, 공간으로 보면 세계적이며, 분야로 보면 포괄적이다. 물론 인류는 그동안 수많은 위기를 겪으며 생존했고 그때마다 한걸음씩 문명의 수준을 높여 왔다. 장기적인 보건 위기 국면에서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고, 남북관계도 한반도 평화도 영향을 받고 있다. 가야 할 길이 멀지만, 결국 이 위기를 극복할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
  광복 76주년 경축사는 우리 민족이 걸어왔던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며, 장기적인 보건 위기 국면에서 우리의 위치와 위기를 반드시 극복하고자 하는 희망을 담았다. 자주국방과 문화강국, 그리고 달라진 경제 위상을 강조하면서 스스로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지만, 이제 누구도 결코 과소평가 하지 못할 실력과 위상을 갖추었음을 선언했다.
  한반도 정세가 여전히 어렵고 복잡하기 때문에 말을 아꼈지만, 결국 문제를 해결하고 평화를 위해서는 화해와 협력의 정신과 평화를 만들어 가는 의지와 노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동시에 장기적인 보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연대와 협력도 강조했다.
코로나19 위기, 상생과 협력으로 극복하자
  경축사는 동북아 방역·보건협력체에 북한의 참여를 제안했다. 미증유의 보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남북한뿐만 아니라 동북아 지역 국가들 사이의 상생과 협력이 필수적이다. 도쿄올림픽은 보건 위기 국면에서도 무사히 마쳤지만, 아마 코로나19 상황이 아니었다면 동북아 지역의 평화를 위한 중요한 기회를 제공했을 것이다. 정부차원이 어려웠다면 민간차원에서라도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화해를 촉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내년 2월로 예정된 베이징 동계올림픽도 마찬가지다.
  최소한 동북아 지역에서의 교류와 접촉을 위해서는 연대와 협력이 필수적이다. 보건 위기 극복은 일국 차원의 문제를 넘어선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백신부국과 백신빈국 사이의 백신접종 격차가 ‘변이 바이러스’의 창궐을 가져올 것이라는 경고도 무시할 수 없다. 결국 세계적인 차원에서 연대와 협력만이 국제적 이동을 하루라도 조속하게 실현할 수 있는 기본원칙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남북관계뿐만 아니라 동북아 지역 협력을 위해서라도 북한이 좀 더 자신 있게 보건 위기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 차단과 봉쇄로 전염병의 확산을 막을 수는 있지만, 결국 개방과 협력만이 보건 위기를 종식시킬 수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와의 협력도 가능하고, 동북아 지역 차원의 보건협력 가능성도 열려 있다. 협력을 위해서는 정보를 공개하고, 국제사회와 함께 대안을 찾아야 한다. 자력갱생으로 보건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북한이 동북아 방역·보건협력체에 참여한다면, 동북아 지역의 국가 간 이동도 그만큼 수월해질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지만,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평창에 이어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의 문을 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보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북한의 의지와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지난 8월 23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한미 북핵수석대표 협의가 열렸다.ⓒ연합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환경이 달라졌다
  장기적인 보건 위기로 세계는 일시 멈춤이고, 남북관계도 마찬가지다. 보건 위기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와야 교류와 협력을 할 수 있다. 물론 보건 위기의 극복이 한반도 정세 진전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보건 위기 이전부터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2019년 2월 멈춘 북핵 협상을 재개하는 일이다. 바이든 정부가 들어왔고, 대북정책 재검토도 마무리되었지만 좀처럼 협상의 동력이 살아나지 않고 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환경은 과거보다 훨씬 어려워지고 복잡해졌다. 달라진 환경 변수 중에서 특히 세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는 미·중 전략경쟁이다. 바이든 정부는 한반도 정책을 미·중 전략경쟁의 하위 변수로 인식한다. 북·중 양국 역시 미·중 전략경쟁에 전략적 공조로 대응하고 있다. 미·중 전략경쟁은 인권에서 기술, 무역에서 군사까지 포괄적 분야에서 점차적으로 강도를 높여가고 있다. 특히 군사 분야의 미·중 전략경쟁은 한반도 평화에 부정적이다. 군비경쟁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고 불신을 높이는 환경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둘째, 북한의 고도화된 핵 능력은 협상의 환경과 조건을 까다롭게 하고 있다. 북핵 협상의 재개는 2019년 2월 하노이 회담의 실패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북한은 더 많은 제재 완화를 원하고, 미국은 더 많은 핵 능력 포기를 요구하고 있다. 북한은 정상회담을 선호하지만 미국은 실무회담을 중시한다. 하노이 회담의 실패로 북한의 불신은 더욱 높아졌고, 미국의 악화한 여론은 협상의 유연성을 제한하고 있다. 북·미 양국은 우선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신뢰 회복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만,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신뢰 형성이 어려워진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 바이든 정부의 외교 우선순위에서 북핵 문제가 멀어지고 있다. 바이든 정부는 아시아 정책에서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을 최우선 순위로 삼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미군 철수 이후 벌어질 중동정세의 불투명성도 당분간 바이든 정부의 외교 에너지를 소모할 것이다. 트럼프 정부의 고립주의에서 바이든 정부는 국제주의로 전환했지만, 관여의 범위는 넓은 데 비해 영향력은 감소하고 있다.
  한반도와 동북아는 중요한 질서 전환기에 진입했다. 일시적인 국면의 변화가 아니라, 장기적인 구조의 변화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재가동하기 위해서는 달라진 환경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경험에 안주하기보다는 달라진 환경을 반영하는 새로운 전략적 성찰이 필요하다. 동북아 지역의 질서가 달라졌고, 남북관계에서도 많은 구조적 제약과 인식 격차가 존재하며, 국내적인 인식의 변화도 반영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인식과 담론, 그리고 전략의 내용도 달라져야 한다.
능동적이고 장기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재가동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접근법이 필요하다. 우선 능동적 접근이다. 북핵 협상 재개를 포함해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환경변화만 바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 현재의 달라진 환경변화를 고려하면, 북·미 협상 재개는 쉽지 않아 보인다. 실무협상이 이루어진다 해도 다시 신뢰를 회복하고 쟁점을 좁히기 위해서는 북·미 양국의 상당한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북·미관계의 불투명성을 예상한다면, 남·북·미 삼각관계의 선순환이 쉽지 않고 그렇게 되어도 문제 해결에 얼마나 도움을 줄지는 미지수다. 미·중 전략경쟁을 고려하면, 중국의 창의적 역할을 포함하는 남·북·미·중 사각관계에서 한반도 평화의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당연히 한반도 평화를 위한 능동적 접근을 위해서는 미·중 전략경쟁에 대한 자주적이고 실용적인 입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한미 동맹만으로는 문제 해결이 어려울 수 있다.
  둘째는 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외교와 군사, 경제와 문화, 인권과 환경까지 우리는 포괄안보의 시대를 살고 있다. 공간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알고 보면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남북관계는 언제나 세계적 차원, 동북아 지역 차원, 그리고 남북관계 차원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 하면서 변해 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남북관계의 많은 쟁점이 공간적으로 얽혀 있음을 언제나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시대는 변했고, 세대도 달라졌으며, 인식의 변화도 눈에 띈다.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을 반영할 수 있는 복합적 접근이 절실해졌다.
  셋째는 장기적인 접근이다. 평화와 통일이라는 시대적 과제는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다. 장기적인 과정이 축적되어야 다수가 바라는 더 나은 평화, 더 나은 통일이 가능하다. 한반도를 포함하는 동북아 지역 차원에서 미·중 전략경쟁이 막 시작되었다. 경쟁의 완급이 있을수 있지만, 과거의 협력으로 복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남북관계에서 인식의 격차와 불신의 구조도 하루아침에 해결하기는 어렵다. 장기적인 접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합의의 기반을 넓혀서 전략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일이다.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기보다는 장기적인 차원에서 공감대를 넓히고, 지속가능한 제도 형성에 힘을 쏟을 필요가 있다.
한반도 평화에 대한 인식 차이를 좁히기 위해서는 사회적 대화가 중요하다. 사진은 지난 7월 2일 진행된 ‘2021 인제 평화플랜 시민대화’ 현장  
우리 안의 연대와 협력이 중요하다
  남북관계에 관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인식의 격차는 여전하다. 언제나 국민적 합의와 초당적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현실에서는 점점 더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물론 그동안 인식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 진행된 사회적 대화의 성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각계각층과 세대 간 공감을 넓히기 위한 평통의 의지와 노력도 평가할 만하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사회적 대화와 세대 간 대화를 지속하고, 확대하며 다양화할 필요성이 있다. 나아가 혐오와 차별이 아니라, 화해와 관용의 시각을 공유해야 한다. 주먹을 쥐고 악수할 수 없듯이, 폭력으로 평화를 실현할 수는 없다. 우리 안의 평화를 만들어 가기 위한 노력이 언제나 모든 평화의 출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코로나19 시대를 겪으며 우리는 연대와 협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다. 기후변화 때문에 발생하는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를 고려하면 코로나19는 어쩌면 일상이 될 수도 있다. 재난의 시대에 훨씬 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따뜻한 손길이 필요하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심화한 양극화의 격차도 완화해야 한다. 우리 안의 연대, 우리 안의 협력이 필요한 시기이다. 그것이 동력이 되어 남북관계에서도 동북아 지역에서도 오래 되고 복잡한 현안들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만들어질 것이다.
김연철
인제대학교 통일학부 교수
전 통일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