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 Vol 1832022.01.

런던한겨레학교 송년 발표회 날

평화통일 현장

런던한겨레학교에서 만나는 남과 북
애써 하나 되기보다 구분하지 않기

우리 학교는 런던 외곽 킹스턴 지역 뉴몰든 한복판에 있다. 뉴몰든은 영국의 대표적인 한인 타운으로, 한식당이 즐비하여 한식을 먹으려는 영국 사람들이 줄을 선다. 이 일대에 거주하는 남한 사람은 약 2만 명. 북한 사람도 대략 1천 명 가량 살고 있다. 2000년대 말부터 난민 지위를 받아 정착한, 이제는 모두 영주권자나 시민권자인 사람들이다.

런던한겨레학교는 2016년 1월 설립됐다. 학교 설립을 주도한 이는 북한 학부모들이었다. 영국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한글과 한민족의 문화를 가르쳐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한집에 모여서 한글을 배우며 놀았는데, 점점 아이들이 많아지자 교회 홀을 빌렸다. 우리 학교의 시작이다.
현수막을 걸었다 <런던한겨레학교 송년 발표회>
○월 ○일, 후원: 북한대학원대학교
우리 학교 이사장은 남한 사람이다. 학교가 설립·유지되는 데에는 그분의 참여와 지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사진 네 명 중 두 명은 북한 출신, 두 명은 남한 출신이다. 학부모는 북한 출신이 많지만 남한 출신도 있다. 굳이 묻지 않아서 누가 어디 출신인지는 모른다. 처음에는 억양으로 짐작해보려고 했는데 이제 그것도 잘 하지 않는다. 남북을 애써 구별하고 다시 통합하려고 노력하느니, 애초에 출신을 묻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재 교사들은 모두 남한 출신이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달라진다면 좋겠다. 나는 2021년 4월에 이 학교의 세 번째 교장이 됐다.

학교는 2020년 3월 락다운으로 문을 닫았다가 2021년 5월 온라인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멈췄던 학교를 다시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지만, 학부모들이 옆에서 도왔다. 9월에는 등교 수업을 강행했다. 공립학교들이 문을 열었으니 우리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8개월 만에 학교 문을 열자 학생들이 대부분 돌아왔고, 거기에 새로 온 학생들까지 더해져서 30명이었던 학생 수는 45명이 되었다. 교사가 부족해 걱정했는데, 자원교사들 덕분에 교사 수는 3명에서 14명으로 늘었다. 덕분에 3개였던 반이 6개 반이 되었다.

우리 학교는 설립 이래 수업료를 받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18세까지 무상으로 교육받을 수 있고,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도 무상교육이 원칙이다. 학부모들은 교육이 무료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철학은 아름답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올해 9월부터 수업료를 받기 시작했다. 이왕 받을 거라면 학교가 운영될 수 있을 정도를 책정했으면 좋겠는데, 이사진은 한달 수업료로 10파운드(약 1만 5,000원)를 책정했다. 기본 필요경비의 20%가 될까 말까 한다. 이렇게는 운영이 어렵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평화, 화해, 통일 문제에 관심이 많은 연구자, 교사, 성직자, 시민들이 십시일반 응원해주었다. 한 달 만에 놀라운 금액이 모였다. 응원해 준 사람들은 모두 우리 학교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분단을 뛰어넘는 평화의 학교가 될 거라고 격려했다. 내가 한때 몸담았던 북한대학원대학교도 후원해 주었다. 송년회 현수막에 대한 설명이 길었다.
‘딸랑 딸랑 딸랑’ 새싹반 엘라가 종을 울렸다
발표회를 시작한다는 신호이다
학생, 학부모, 손님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교회 홀은 천장이 아주 높고, 바닥은 가로 9m, 세로 18m나 되는 텅 빈 공간이다. 평상시 수업은 여기에서 군데군데 책상과 의자를 놓고 한다. 복도까지 잘 활용하면 6개 반을 만들 수 있다. 넓은 강당은 소리가 울려서 노래는 아름답게 들리지만, 말은 소음이 되기 쉽다. 수업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호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작은 종을 하나 샀다. 교장이 하는 중요한 일은 수업 종을 울리는 거다. 45분 수업과 15분 휴식을 알려준다. 쉬는 시간에 마당으로 뛰어나간 아이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도 종소리다.

느티나무반 윤지가 쇼팽의 녹턴을 연주했다. 청중이 조용해졌다. 윤지가 반짝반짝 빛났다. 내가 학교에서 하고 싶은 일 중 하나는 학생들 한 명 한 명이 무대에 서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자기가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 열심히 준비한 것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은 아이들을 성장시킨다. 긴장하고 떨리고 힘들어도 그 과정을 끝냈을 때의 성취감은 대단하다. 이번 발표회도 그런 자리였으면 했다. 우리는 코로나19로 그동안 서로 단절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데는 어른들의 눈길이, 박수가 필요하다. 그래서 지연이에게는 첼로 연주를 부탁했고, 중학생들에게는 훈민정음에 대해 한국어와 영어로 발표를 해달라고 했다. 덕분에 손님으로 온 영국인들에게 세종대왕이 어떤 마음으로 한글을 만들었는지 잘 전달됐을 것이다.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니 뿌듯했다. 발표회가 끝나고 나서 안젤라가 윤지에게 말했다.

“아까 언니가 피아노 칠 때 우는 사람이 있었어.”
“정말?” 윤지가 다시 빛났다.

킹스턴 시장이 아주 긴 편지를 보내왔다
‘학교 발표회에 못 가서 미안하다’며
“지난 18개월은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런던한겨레학교가 이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2021년에 학교를 다시 시작하고,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직면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언제나 즐겁고 안심하게 됩니다.”

시장은 발표회 아침 내게 직접 전화를 해서 편지를 잘 받았냐고 확인했다. 시장의 편지는 소나무반 이레가 읽었다. 편지 때문인지 차분한 목소리 때문인지 자꾸 눈물이 나려고 했다. 시장의 편지에서 두 가지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난관에도 꺾이지 않고 회복하는 힘(resilience)과 인내(perseverance). 우리 학교는 그 힘으로 다시 문을 열었고, 앞으로도 그 동력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레가 편지 읽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시장에게 보냈다.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 학교는 한때 나뉘었던 남북한이 킹스턴 커뮤니티 안에서 어떻게 연결되고 치유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고향의 봄’을 다 같이 불렀다. 행사가 끝났는데 다들 눈이 빨갛다.

“눈물이 너무 흘러서 밖으로 나갔어요.”

새라 엄마가 말했다. 여러 감정이었을 거다. 돌아가지 못하는 고향이 그리웠을 수도, 어린 시절이 떠올랐을 수도, 이 노래를 영국 땅에서 어린 딸이 부르는 게 대견했을 수도 있다.
우리 학교 수업은 2시에 시작하지만, 그보다 일찍 모여서 다 같이 노래를 부른다. 아이들에게 고향의 봄, 반달, 오빠 생각 같은 노래를 가르쳐줬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작곡된, 분단 이전의 노래이다. 내가 어릴 적에 불렀던 노래이기도 하다. 나는 자꾸 분단을 괄호 안에 넣고, 분단 이전에 우리가 공유했던 공통의 기억에 주목하고 싶어진다. 윤동주의 시를 읽는 것도, ‘고향의 봄’을 부르는 것도, 아리랑 셔플댄스를 추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분단이 없었던 양 시치미 떼고, 다시 미래로 훅 넘어간다. 군더더기처럼 붙어있는 남(South)과 북(North)이라는 접두사를 빼고 그냥 ‘코리안’으로 어떻게 자부심을 가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평화로운 미래 어느 날의 모습을 미리 그려보고 싶어서이다.
발표가 끝나고 음식을 나눴다
엄마들은 하루 종일 준비했을 것이다
핫도그, 잡채, 불고기, 샐러드, 닭강정, 두부밥, 골뱅이무침, 소시지볶음, 생선전, 샐러드, 과일꼬치가 한 상 가득하다. 아빠들이 떡과 음료수를 날랐다. 가지런히 놓아둔 음식이 마치 출장 뷔페를 보는 것 같았다.

뉴몰든에 있는 한식당은 북한 사람들이 없으면 운영이 어려울 것이다. 학부모 중에도 주방과 홀에서 일하는 분들이 많다. 다들 음식 솜씨가 좋다. 손도 크다. 봄 소풍 때도, 운동회 때도, 추석맞이 수업 때도, 오늘도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음식을 여러 봉지 싸갈 수 있을 만큼 준비해 주었다. 유학생 자원교사들이 배달 용기에 불고기를 담아가는 것을 보고, 무료봉사하는 그들에게 이렇게라도 보답할 수 있어서 마음이 좋았다. 학부모회장에게 음식 재료 값이라도 학교에서 드리겠다고 했더니 이런 말이 돌아왔다.

“그 말 했다가 엄마들한테 욕만 들었어요.”

다 잘 끝났다. 마무리 청소를 하고 있는데 학부모회장이 봉투를 건넸다. 선생님들 식사하시라고 모금을 했다고 한다. 440파운드(약 70만 원)가 들어 있었다. 카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선생님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겨레학교 부모 일동”

학부모들이 준비한 음식을 나눠먹는 학생들
우리 학교 학생은 45명이지만 형제자매가 많아서 가정으로 치면 스물네 집이다. 이런 큰돈을 모으려면 집집마다 두 달치 수업료를 냈을 것이다. 이건 내가 아는 셈법과 좀 다르다. 이 부모들은 수업료를 적게 내지만, 대신 교사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잔치 음식을 해 오고 바자회를 열어서 기금을 마련한다. 그 정성이 빈 곳간을 어떻게든 채운다. 나도 모자란 돈을 어떻게든 메꾸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후원회를 조직하고 공공기금 지원을 요청하고 프로젝트를 신청한다. 우리 학교는 수업료를 받고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어른들이 각자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서 배우고 싶어하는 아이들에게 문을 열어놓는 곳이다. 나는 이런 코리안 커뮤니티가 점점 좋아진다.
송년 발표회를 마지막으로 한 학기가 끝났다
내년에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많다
한글학교로 등록되면 한국의 재외동포재단으로부터 운영비를 일부 지원받을 수 있다. 몇 달 전에 서류를 갖추어 주영대한민국대사관에 등록신청을 했건만, 우리 학교는 아직 해외 한글학교로 승인되지 않았다. 대사관도 난감한 것 같다. 학생들이 대한민국 국적자여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동포’지만 ‘국민’이 아니다. 해외 한글학교에서 한글을 배우는 이가 ‘국민’이어야 한다는 기준이 참으로 기이한데, 나는 누구를 탓해야 할지 모르겠다. 옹졸하게 마음먹으면 전 세계 한글학교 학생들의 국적을 전수조사해달라고 요청하고 싶고, 설득할 수만 있다면 한류의 세계화를 위해 한글을 배우겠다고 모인 이들을 격려해달라고 읍소하고 싶은 심정이다. 내년에는 우리 학교가 대한민국 정부가 인정하는 한글학교가 되면 좋겠다. 내가 바라는 새해의 가장 큰 소망이다.

런던한겨레학교 송년발표회를 맞아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준비한 합창이 한창이다.
이것 말고 꼭 하고 싶은 일도 하나 있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영국 할아버지 브라이언을 우리 학교에 초대하는 것이다. 아흔 살 내 친구인 그에게 우리 학교에 한 번 오시라고 했더니 그가 이렇게 말한다.

“전쟁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이들과 여자들의 고통을 보는 거였어. 나는 아주 오랫동안 북한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 소망했는데, 내 소원이 이루어지겠구나. 그날이 꼭 오기를 기다릴게.”

내년 봄에는 맨체스터에 사는 이분을 뉴몰든으로 모시고 오려고 한다. 아흔 살 할아버지와 네 살 다섯 살, 많게는 열여섯 살이 된 우리 학생들이 만날 날을 상상하면 벌써 기쁘다. 우리 학생들의 미래는 창창하다. 그 앞날에 분단과 전쟁, 반목과 대립의 그림자가 없기를 바란다. 한반도 남과 북에 부모의 고향을 둔 우리 학생들과 영국 할아버지의 대화가 궁금하고 기대된다.

이 향 규 런던한겨레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