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경지역 사람들
손에 닿을 듯 아스라한 고향을
그리며 사는 교동도 사람들
교동도는 평화의 섬이다. 분단의 강 한강하구 중립수역에 둘러싸여 있는 교동도는 공격용 무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조상들의 강이란 뜻으로 ‘조강(祖江)’이라고도 불리는 한강하구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 세 개의 강이 만나 서해로 이어지는 곳으로, 바다의 밀물과 썰물이 교차되는 기수역(강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곳)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오래전부터 개경과 한양으로 깊숙이 진입하는 관문이란 뜻으로 ‘양경인후(兩京咽喉)’라 불리기도 했다. 교동도 남산포를 비롯해 많은 포구에 남아 있는 유적들은 이곳이 서해를 통해 들어오는 물류를 실은 선박들과 국내외 사신들이 유숙했던 중간 기착지이자 외교통상의 무대였음을 말해 준다.
실향민의 향수와 그리움이 어린 땅
1,500년 이상 씨족문화를 이루고 있던 교동도는 사신 교류와 물류 유통을 통해 어민과 상인, 외국 선박들이 빈번히 왕래하고 교류하던 터미널과 같은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13세기까지 교동도는 3개의 섬으로 나눠져 있었다. 고려시대 우왕(1374~1388) 때 교동도로 파견된 최영 장군(1316~1388)은 개경과 한양으로 실어 나르는 세곡선의 식량과 물류를 탈취하려는 왜구들을 막기 위해 3개로 나뉘어 있던 섬에 제방을 쌓아 하나의 섬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교동도에 첫 번째 변화를 가져왔다.
교동도는 6·25 전쟁 때 3만여 명의 황해도 연백군 피난민들이 휴전 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섬에 정착하면서 피난민 집성촌이 됐다. 피난민의 민원을 해결하기 위해 읍내리에 있던 관청을 화개산 자락 피난민 막촌이 있는 대룡리로 옮겨오면서 난민촌에 장마당이 들어섰고 이곳은 차츰 대룡시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연백평야에서 온 피난민들은 식량해결을 위해 토성으로 바다를 막고 농사 기술을 이용해 오랫동안 묵혀 있던 갯벌을 일궈 농경지로 개간했다. 갯벌의 염분을 제거하기 위해 여러 해에 걸쳐 민물을 가둬 우려내기도 했다. 이렇게 형성된 협동농장은 교동도에 두 번째 변화를 가져왔다.
교동도 실향민들의 망향의 한은 깊다. 정전협정 전까지만 해도 개성과 연백군의 대부분은 경기도였고 38선 이남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휴전선이 한강하구로 설정되면서 이남이었던 고향은 북한령이 됐다. 포격을 피해 잠시 앞마을 교동도로 피난을 온 연백군민들은 휴전 후에 북한령이 된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게 됐다. 내일모레 동동하며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려 온 실향민들은 그렇게 70여 년을 흘려보냈다. 고향 보이는 곳에 묻히는 일이 마지막 유언이라는 이들은 강 건너 고향을 바라보면서도 돌아갈 수 없어 ‘격강천리(隔江千里)’라는 시를 가슴에 안고 애환을 삭였다.
남한 서북단 끝에 위치한 교동도는 한강하구를 사이에 두고 황해남도 연백평야와 마주하고 있다. 지석리 율두산 자락에 있는 망향대는 떠나온 고향 마을을 마주하고 있어 북한 주민들의 모습을 육안으로도 볼 수 있다. 교동도의 실향민들은 헤어진 가족과 망향의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율두산 자락에 조그만 부지를 마련해 망향단과 북에 있는 가족들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이름 없는 줄무덤이 율두산 기슭을 메웠지만 이제는 주인도 가족도 떠난 지 오래돼 흔적마저 사라져 가고 있다.
황해남도 연백평야가 마주보이는 망향대
어머니 오실까 대문도 잠그지 않고 살아온 70년
여덟 살 때 어머니, 형님, 여동생이 함께 고향과 가까운 교동으로 피난을 온 황래하(81세) 어르신은 아직까지도 대문을 잠그지 못하고 살고 있다. 곧 통일이 된다며 땅에 묻어놓은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고향에 가신 어머니의 뒷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황해도 연백군 해성면이 고향인 그는 어머니가 다시 오실까 대문도 잠그지 못하고 지금까지 늘 거실에서 주무신다고 한다. 어르신은 2000년 이후 다양한 남북교류협력이 추진될 때 금강산 협동농장에 고구마 순을 가져가 북한 농민들과 고구마 식재를 하기도 했다. 그는 하루빨리 고향 소식이라도 전해들을 수 있기를 고대하며 망향대에 오른다.
“어머니가 고향 땅에 묻어놓은 놋그릇을 정리한다고 딸 둘을 데리고 들어갔는데 그게 어머니의 마지막이었어요. 지금도 어머니가 제일 보고싶고 어머니 얘기만 하면 눈물이 나요.”
- 황래하
교동면 지석리에서 태어난 안민수 씨는 망향단 카페지기이자 가수이다. 교동도 지석초등학교에서 실향민 자녀들과 함께 공부하며 자란 그는 교동 평야를 일구며 살아온 실향민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그들의 애환을 곧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게 됐다. 젊은 나이에는 도시로 떠나 사업과 음악활동을 했지만 은퇴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지석리 망향대를 지키며 방문자들에게 실향민 이야기를 들려주며 노래 봉사를 하고 있다. 안민수 씨는 조강의 뱃길을 복원하면 자신의 부모님 세대가 살아왔던 것처럼 서로 왕래하며 살아가는 이웃마을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는 매일매일 자유롭게 남북을 오가는 철새들을 보며 오늘도 그의 꿈을 노래한다.
70년 전의 연백시장을 닮은 대룡시장 ⓒ강화군청
망향대 지킴이 안민수 씨
섬마을 이발사의 오랜 기다림
지광식(83세) 어르신은 12세에 부모님과 교동으로 피난을 왔다. 그의 고향은 황해도 연백군 호동면 만당리인데 교동도 인사리 마을에서 보면 강 건너 고향 마을이 훤히 보일 정도다. 어르신은 60여 년 넘게 교동 이발관을 운영하며 교동면민들의 머리를 손질해 왔다. 오래된 가위와 이빨 빠진 빗, 손때 묻은 이발기와 함께 마을에 유일하게 남은 이발소를 지켜온 어르신은 얼마 전 손 움직임이 예전 같지 않다며 이발소 운영을 멈추셨다. 딸들은 아픈 아버지의 곁을 지키기 위해 이발소 자리에 작은 분식집을 차렸다. 분식집 한 편에는 어르신과 함께 이발소를 지켜온 이발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곧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섬사람으로 70여 년을 살아온 어르신은 언젠가는 고향 흙을 만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긴 시간을 견뎠다.
김순임(92세) 어르신은 스무 살 때 시어머니와 시동생 그리고 1살 된 딸을 업고 쌀 서 말을 머리에 이고 피난을 나왔다. 연백군 해성면이 고향인 할머니는 인민군을 피해 가까운 교동으로 피난을 오셨는데 쌀이 떨어지면 강 건너 집에 들어가 식량을 가져다 드시곤 하셨다고 한다. 어르신의 마당 장독에는 아직도 고향에서 지고 나오신 된장 항아리가 자리하고 있다. 그 항아리에 담긴 된장은 오래된 고향의 기억과 함께 대룡시장의 명물이 됐다.
한강하구와 합수되는 벽란도 입구의 예성강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피난 온 문경헌(72세) 어르신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물려주신 공책을 아직도 간직하고 계신다. 누렇게 바랜 공책에는 통일이 되서 고향에 가면 누구를 찾아 봬야 하는지, 살림집과 조상의 묘소는 어디인지, 상세한 지도와 친인척의 이름들이 기록돼 있다.
공책을 소중한 보물처럼 품고 있는 할아버지는 교동도 사람들이 자신들보다 몇 배나 많은 피난민을 쫓아내지 않고 함께 도우며 살아왔기에 지금 같은 평화로운 섬으로 가꾸고 지킬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전쟁으로 생의 막다른 길에서 피할 곳을 찾아 흘러들어 온 사람들을 따뜻이 품어준 교동도. 그 안에는 여전히 고향 땅과 가족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따뜻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쌀을 머리에 이고 젖먹이 딸을 업고 배를 타고 교동도로 왔어요. 뻘이 나오면 쌀자루를 내려놓고 그 위에 앉아 젖을 먹이던 기억을 떠올리면 비극도 그런 비극이 없었죠.”
- 김순임
교동도의 어린이들은 한강하구의 뱃길이 복원되면 분단 전처럼 남과 북의 어린이들이 왕래하며 수학여행 가는 꿈을 꾸고 있다. 교동도와 연안군을 연결하는 해주대교가 놓이면 목포에서 시작된 서해안 고속도로는 신의주까지 연결된다. 한강의 끄트머리가 아닌 서해의 시작점인 한강하구를 품은 교동도는 유라시아시대를 기대하며 세 번째 변화를 꿈꾸고 있다.
김 영 애
민주평통 이북5도지역회의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