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2032023.09.

북한이탈주민 정착 이야기

인천 서구 통일교육복지센터장 이순실 씨

“기적같이 새로 얻은 인생,
남북 주민 대화 물꼬 틀 것”

“남북 주민 10명이랑 울고 웃으면서 집단상담을 진행하고 있어요. 인생을 돌아보며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공통점을 찾아가는 게 이 상담의 목표랍니다.”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이순실(53) 씨가 말했다. 책임감과 자부심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이 씨의 일터는 인천 서구 통일교육복지센터. 2019년 설립해 2021년 인천시에 등록된 비영리 민간단체다. 사회복지학과 심리상담학을 전공한 그는 이곳에서 북한이탈주민을 대상으로 상담 및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탈북민 교육사업 운영에 대한 우수성을 검증받아 6월부터 남북 주민 48명을 대상으로 ‘남북생애나눔대화’ 위탁사업도 실시하고 있다. 남북생애나눔대화는 통일부 산하 인천통일플러스센터가 주관하는 통일 사업으로, 탈북민과 일반 주민이 모여 생애사와 관련한 주제를 통해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소통 프로그램이다.

“남북 주민이 대화를 통해 상호간 이해를 도모하도록 애쓰고 있습니다. 부부관계, 부모·자녀관계, 직장문화 등 다양한 주제로 상담 프로그램을 제공합니다. 남북 주민의 공동체 의식 함양을 위해 라인댄스 수업도 운영하고 있고요. 굳이 남북 주민을 구분할 필요는 없죠. 서로의 삶을 있는 그대로 나눌 때 비로소 남북 화합이 이뤄지는 거니까요.”

대한민국에 입국하던 2004년만 해도 상황이 달랐다. 그때는 이 씨가 탈북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인생은 나를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이끌어왔고, 여전히 어딘가로 데려가고 있다”고 말했다. 1999년 9월 북한을 탈출해 중국으로 넘어온 것도,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가 기적처럼 건강을 되찾은 것도, 대한민국 땅을 밟은 것도 모두 불가항력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탈북이 선물한 새로운 인생
어쩌면 북한 땅에서 태어난 것,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떠난 것, 대한민국 국민이 되고 사회복지학과 상담학, 신학을 공부해 상담심리사가 되고 20년가량 남북 주민 심리 상담에 헌신해온 것도 다 그의 힘으로 이뤄진 게 아닐지 모른다. 그의 이 영화 같은 삶이 얼마나 많은 탈북민에게 희망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 늦여름 어느 날, 그와 마주 앉았다. ‘당신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가’를 묻기 위해서였다.

“처음 북한을 탈출할 때 대한민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고난의 행군’ 후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중국으로 넘어가 돈을 버는 사람을 많이 봐왔거든요. 저도 같은 이유로 중국으로 건너간 것이고요. 만약 계획대로 중국에서 돈을 벌었다면 가족이 있는 북한으로 돌아갔겠죠.”

함경북도 회령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이 씨는 도자기공장에서 일하다 공장 간부로 근무하던 시부모를 통해 남편과 가정을 이뤘다. 잘살던 시댁 덕에 1990년대 초반까지 유복하게 지냈다. 그러나 바로 그 시절, 그는 인생의 가장 깊은 수렁을 지나게 됐다. 이 씨 부부가 하던 장사가 잘못돼 거액의 부채를 지게 된 것. 때마침 1994년 북한 경제가 나락에 빠져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고, 이 씨 가족은 졸지에 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됐다. 그는 기울어진 가세를 다시 세우기 위해 1999년 9월 중국으로 넘어왔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일해 돈을 모았다.

당시 중국 지린성 옌지(延吉)시 동시장에서 중국인 여성이 운영하는 반찬 가게에서 일하던 이 씨에게 난소낭종은 갑자기 닥친 시련이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밤 10시에 잠들어도 끄떡없을 만큼 튼튼하고, 29세의 혈기 넘치는 그였다. 그러나 종양은 어느 날 불쑥 찾아왔다. 발견했을 때는 이미 종양을 절제해야 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담당 의사는 이 씨에게 “지금 당장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그도 수술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긴 했다. 6개월 전부터 아랫배에 심한 통증과 하혈이 발생했던 것. 그의 난소 오른쪽에 자리 잡은 종양 크기는 달걀만큼 커졌고, 만약 종양이 터지면 다른 장기에 세균에 감염될 수 있었다. 재발률과 전이율도 높았다.

이 씨는 남편과 두 딸이 있는 북한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 악물고 통증을 참고 일했다고 한다. 1년 6개월 동안 모은 중국 돈 1500원을 난소낭종 치료비로 썼다. 겨우 몸과 마음을 추슬렀을 때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난소 오른쪽에서 처음 발견된 종양이 수술한 지 2개월 만에 왼쪽으로 전이된 것. 그는 “내 인생이 허망하고, 내 처지가 가여워 밤낮으로 울었다”고 회고했다. ‘다시 가족이 있는 북한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삶에 희망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아픈 몸으로 일을 어떻게 하지…’ 하는 갖가지 고민도 그를 괴롭혔다.

인생 뒤흔든 성경 구절
“중국인 의사에게 수술해야 할 정도로 종양이 커지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으니 ‘한 달에 0.5cm 정도 자랍니다. 8개월 지나면 종양이 달걀만큼 커질 겁니다’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며 두 번 다시 수술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이 씨가 택한 방법은 한약을 복용하며 상태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죽을 운명이라면 돈이라도 왕창 벌어 가족에게 돌아가자는 심산이었다. 그는 중국인 브로커를 만나 한국인이 모여 사는 중국 산둥성 칭다오(靑島)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한국인 밑에서 일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지인의 말이 그에게 삶의 빛줄기가 됐다. 하지만 중국인 브로커는 그를 돈으로 인신매매하려 했고, 이 씨는 그 사실을 눈치 챘다. 열차가 정차한 순간에 뛰어내린 덕에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 씨가 내린 곳은 휴양지로 유명한 산둥성 웨이하이(威海)시. 그곳에서 우연히 한국인 목사를 만나 그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게 됐다. 이 씨가 맡은 업무엔 한국인 목사가 중국어로 번역한 성경 내용을 교정하는 일도 포함됐다.

2016년 2월 서울신학대학교 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 학위 수위식 기념사진. (이순실 제공)
그렇게 접한 성경이 이 씨 인생을 뒤흔들었다. 성경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10장 29절)는 구절을 읽고 그는 울분을 터뜨렸다.

“그 시절 저는 가슴에 분노가 차올랐어요. 고난의 행군 당시 북한 길거리에서 굶어 죽어가는 북한 아이들이 그렇게 불쌍해 보일 수 없었죠. 어느 날 시장을 가는데, 예닐곱 살쯤 된 북한 아이가 굶어 죽어가는 걸 목격했어요. 숨이 껄떡 넘어가려는 순간, 까마귀 열 마리가 떼로 몰려와 아이 눈과 살을 파먹더군요. 그러고 나서 성경에서 그 대목을 읽고 화가 치밀었어요.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북한 백성이 새 한 마리보다 못한 존재라는 거냐. 대체 하나님이 어디에 살아 계시느냐’고 목사님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또 하나 이 씨의 마음을 바꾸게 한 건 잠깐이라도 북에 두고 온 두 딸을 만나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어느 날 그는 오기가 생겨 한국인 목사를 따라 무작정 5일 금식기도를 했고, 그 과정에서 난소낭종이 자연 소멸되는 기적을 경험했다. 이 씨는 “쉴 새 없이 일해 번 돈을 두 딸에게 주고 나는 북한에서 죽음을 맞이하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난소의 종양이 사라져 무척 당황스러웠다. 이후 이때 경험한 걸 바탕 삼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탈북자 아닌 북향민으로 불러달라
“제 인생 후반 사명은 북한 주민을 돕는 일을 하는 거였어요. 북한 정권의 행태와 식량 부족으로 추위와 굶주림에 신음하는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었죠. 막상 이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니 북한에 두고 온 딸들이 걱정돼 내적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이 들었어요. 이때 한국인 목사님과 중국인 선교사님의 기도와 격려가 제게 큰 힘이 됐죠.”

그러나 바로 그 사명을 깨닫게 된 경험은 그의 인생을 다시 한번 바꿔놓았다. 북한 주민을 도우려면 한국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2004년 5월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그때부터 남한에 정착하기 위한 고군분투가 시작됐다. 통일부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하나원)에 입소해 강의를 듣던 때였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관한 설명을 듣다 이 씨는 사회복지제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내친김에 그해 9월 국내 한 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해 낮엔 사회복지학을 공부했고 밤엔 신학교 야간대에서 훈련받았다.

남북 주민을 대상으로 집단상담을 진행하는 이순실 씨. (이순실 제공)
이후 한국노인복지센터를 10년 넘게 운영하며 남한 문화와 인간관계 경험을 쌓았다. 사회복지에 대한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는 판단에 2008년 다세움상담목회대학원에 진학했고, 2016년 서울신학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 석사 학위를, 2023년 동 대학원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각각 취득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해 통일교육복지센터를 설립할 수 있었다. 이씨는 “상담 공부를 통해 나는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탐구하게 됐다. 치열하게 고민한 덕에 내게 많은 기회가 왔다”고 했다.

이 씨가 가장 강조하는 건 우리 사회가 규정한 탈북자라는 용어 대신 새로운 용어 ‘북향민(北鄕民)’으로 불러보자는 것. 북향민은 북쪽에 고향을 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북한을 떠나 한국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한 사람들은 모두 ‘탈북’이라는 틀에 묶이게 된다는 게 이 씨 생각이다. 그는 “‘탈북’은 분단의 상징이다. 분단과 체제, 이념을 넘어서는 실존 그 자체로 ‘북향민’으로 부르는 게 어떨까 싶다”고 제안했다.

이 씨는 “내가 경험한 것들을 통해 현재 남한 생활에 적응 중인 이들이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절망에 빠져 있던 사람이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이렇게 남북 주민과 소통하며 나누는 삶을 사는 게 앞으로 내 삶의 목표”라고 했다. 그가 지리멸렬한 고통 속에서도 활짝 미소 지을 수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