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 Vol 1672020.09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8월 15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청와대

특집

8·15 경축사로 본 우리 시대의 평화

남북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 위해
생명공동체 실현해 나가야

문재인 대통령의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사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사람과 국민’, ‘생명과 안전’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모두가 함께 잘 살아야 진정한 광복”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판 뉴딜’의 핵심을 관통하는 정신을 사람 중심의 ‘상생’이라고 밝혔다. 더불어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의 정신을 강조하며, 지금은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는 헌법 10조의 시대”란 점을 환기시켰다.

사람 중심의 생명공동체 회복
문재인 대통령은 모든 국민이 행복추구권을 실현하려면 “사회안전망과 안전한 일상을 통해 저마다 개성과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야 한다며 “진정한 광복은 평화롭고 안전한 통일 한반도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꿈과 삶이 보장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우리가 평화를 추구하고 남과 북의 협력을 추진하는 것도 남과 북의 국민이 안전하게 함께 잘 살기 위해서”라고 강조했다.

이어 “남과 북이 생명과 안전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안보이자 평화”라고 말했다. 코로나19 시대 새로운 안보상황에 남북이 더욱 긴밀히 협력하여 평화공동체, 경제공동체, 생명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상생과 평화의 물꼬가 트이길 희망하면서 “남북협력이야말로 남북 모두에게 있어서 핵이나 군사력의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고의 안보정책”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문재인 대통령이 경축사를 통해서 강조한 것은 생명공동체 회복을 위한 남북협력이다.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로 북·미관계와 남북관계가 교착국면에 빠져 있지만, 생명과 안전을 위한 남북협력 사업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경축사는 하노이 노딜로 평화체제와 비핵화를 교환하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교착국면에 빠졌지만, 생명 공동체 형성을 위한 협력 사업들은 본격화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방역협력과 공유하천의 공동관리, 보건의료와 산림협력, 농업기술과 품종개발 에 대한 공동연구,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 인도주의 협력, 죽기 전에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가보고 싶은 곳을 가볼 수 있게 협력하는 것, 철도연결 등 협력 사업들을 추진하고 남북 합의사항을 실천하여 ‘평화와 공 동번영의 한반도’를 만들겠다고 강조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통일, 평화, 비핵 같은 거대 담론보다는 남북 주민들의 생명과 안전, 그리고 편안한 일상을 강조한 것은 일종의 ‘작은 발걸음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협력을 통한 생명과 안전을 강조한 것은 남북한 주민들이 분단체제의 대립과 갈등에 따른 피로에서 벗어나 평화를 누리는 것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노이 노딜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교착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미 사이의 평화협상이 본격화되어 4·27 판문점선언, 6·12 싱가포르 북·미 공동성명, 9월 평양공동선언이 채택됐다. 한반도에 ‘봄이 왔다’라고 외칠 만큼 정세가 급반전됐지만 2019년 2월 말 하노이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과 남북공동 연락사무소 폭파로 결실의 계절인 ‘가을이 왔다’고 선언하지 못하고 곧바로 겨울로 접어들었다. 급진전할 것 같았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난관에 봉착한 것은 무엇보다 하노이 노딜에서 근본원인을 찾을 수 있다. 톱다운(Top-down)방식의 한반도 평화-비핵 교환협상에 대한 남·북·미 국내 구조의 반발, 본격화된 미·중 간의 패권 경쟁, 코로나19 팬데믹 등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진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하노이 노딜 이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판문점선언과 북·미공동성명에서 평화체제와 비핵화를 교환하는 ‘안보-안보 교환’에 합의했지만, 북한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기존 입장을 바꿔 비핵화 초기 조치와 제재 해제를 교환하는 ‘안보-경제 교환’ 카드를 들고나왔다. 이는 영변 핵시설의 영구폐기와 제재 해제를 교환하여 2018년 4월에 당의 기본노선으로 채택한 ‘경제건설 총력집중노선’을 본격화하겠다는 의도였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북한은 지난 7월 10일 김여정 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명의의 담화를 통해서 하노이 협상 당시에는 “거래 조건이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제재의 사슬을 끊고 하루라도 빨리 우리 인민들의 생활 향상을 도모해 보고자 일대 모험을 하던 시기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식대로, 우리 힘으로 살아나 갈 것”이라며 북·미협상의 기본주제가 ‘비핵화조치 대 제재 해제’에서 ‘적대시 철회 대 조·미협상 재개’의 틀로 고쳐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대선 때까지 ‘새로운 계산법’을 제시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지난해 말 당 중앙 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정면돌파전’과 ‘자력 갱생’을 선언하고 장기전에 들어갔다. 북한은 미국을 향해 전략도발을 할 경우 궁지에 몰린 트럼프 대통령이 군 사옵션을 사용할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고 보고, 위험부담이 큰 대미 전략도발 대신에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라는 ‘충격요법’을 통한 국면전환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6월 8일 대남사업부서들의 사업총화회의에서 김영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과 김여정 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대남사업을 ‘대적사업’으로 전환했다고 선언했다. 또한 6·15 남북공동선언 채택 20주년 다음날인 6월 16일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함으로써 큰 충격을 주었다. 북한이 “적은 역시 적”이라고 주장하면서 화해협력·공존공영을 합의했던 6·15 남북공동선언을 부정하는 ‘말 폭탄’과 함께,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함으로써 남북관계는 전면적으로 단절됐다. 아마도 남 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는 김여정 제1부부장에게 대남· 대미 사업의 책임을 분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무리수’로 남북관계 복원에 더 많은 공력(功力)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생명공동체 형성을 통한 일상의 평화 만들기
하노이 노딜로 평화협력공동체와 경제협력공동체를 형성하여 ‘신한반도체제’를 만들려는 문재인 정부의 평화구상이 차질을 빚게 됐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순 없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남북한 주민의 생명과 안전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남북 평화공동체와 경제공동체 못지않게 생명공동체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지금 우리 국민들은 북한 핵 문제보다 코로나19를 더 무서운 위협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북한은 제재와 셀프봉쇄에 따른 경제 위기를 코로나19보다 더 위협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북한은 지난 6월 당 정치국회의에서 ‘평양시민의 생활 보장과 관련한 의제’를 다룰 정도로 경제 사정이 악화되고 있다.

8·15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생명공동체를 강조한 것은 남북한 주민들의 생명과 안전이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외교안보라인 정비와 함께 우리 정부가 역점을 두는 것은 생명공동체 형성을 위한 남북협력이다. 남북관계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찾아 당장 할 수 있는 협력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먹고 싶은 것, 아픈 것, 죽기 전에 보고 싶은 것 등 인도적 교류 협력”과 물물교환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경축사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 인도주의적 협력과 함께 죽기 전에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가보고 싶은 곳을 가볼 수 있게 협력하는 것이 실질적인 남북협력”이라며 “남북협력이야말로 핵이나 군사력의 의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고의 안보정책”이라고 강조했다. 핵 문제 해결 노력이 교착국면에 빠져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조건에서 남북협력을 통해 핵 문제를 돌파하겠다는 전략구상을 밝힌 것이다.

8·15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생명공동체를 강조한 것은 남북한 주민들의 생명과 안전이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외교안보라인 정비와 함께 우리 정부가 역점을 두는 것은 생명공동체 형성을 위한 남북협력이다. 남북관계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찾아 당장할 수 있는 협력 사업은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남북을 흐르는 DMZ 역곡천. 문재인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방역협력과 공유하천 공동관리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남북 합의사항을 실천해 ‘평화와 공동번영의 한반도’를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연합

평화-비핵 교환협상과 같은 정치·군사 문제는 ‘고위정치(High Politics)’ 영역이고, 경제협력과 인도협력은 ‘하위정치(Low Politics)’ 영역이다.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이후 외교안보라인을 정비한 문재인 정부가 인도주의협력과 물물교환을 강조하는 것은 고위정치 영역에서 진전을 보지 못하자 하위정치 영역을 활성화하여 고위정치 영역의 진전을 이뤄보겠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1월 미국의 대선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평화-비핵 교환협상을 본격화할 수 없는 여건을 감안해 당분간 생명공동체론에 입각해서 인도주의 협력에 주력하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재가동을 모색해보겠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7월 10일 발표한 김여정 제1부부장 담화에서는 개인 생각임을 전제로 “조·미 수뇌회담과 같은 일이 올해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고 하면서도 “하지만 또 모를 일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북한은 김여정 담화를 통해서 미국이 “결정적인 입장변화”, “중대한 태도 변화”를 보이고, “수뇌들 사이의 특별한 관계”가 훼손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설 경우 북·미 정상회담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했다. 미국 관료체제의 반발로 북·미 사이의 평화-비핵 교환협상이 교착됐지만 양 정상들이 신뢰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미국 대선 전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남·북·미 정상이 다시 나서야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본격화한 한반도 평화-비핵 교환프로세스는 문재인 대통령, 트럼프 대통령, 김정은 위원장이 톱다운방식으로 추진한 것이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좌초할 경우 세 지도자 모두 리더십에 상처를 입을 것이다. 지금의 교착을 풀기 위해서는 남·북· 미 정상들이 다시 나서야 한다. 여러 국내적 사정으로 정상들이 나서기 어렵다면 인류 공통의 위협인 코로나 19에 공동 대응하면서 상황을 관리해 나가야 할 것이다. 군사안보 문제는 적우(敵友)가 분명하지만 코로나19와 같은 인간안보 문제는 적우가 따로 없다. 코로나19는 인류 공동의 적이다. 북한도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생명 공동체를 위한 우리의 협력 제안을 수용하고 공동 번영의 길로 나와야 할 것이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통일연구원의 공식적 견해가 아님을 밝힙니다.

고 유 환 통일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