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
닫힌 북한 열려면
생존권과 발전권 보장 필요
올해 초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사를 기점으로 정부는 북·미 비핵화 협상과는 별도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정책적 행보를 시작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하고 북한이 대북전단을 빌미로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등 대남 강경 대응에 나서면서 남북관계는 악화 일로를 면치 못하고 있다.
7월 들어서야 청와대는 국정원장과 통일부 장관, 청와대 안보실장 등에 대한 교체인사를 단행하면서 남북 관계의 출구를 모색하는 작업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나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주변 여건은 결코 녹록지 않다. 남북관계의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전략적 사고와 전략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이다.
남북관계를 저해하는 3가지 요인
남북관계의 해법 모색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북관계 개선을 저해하거나 발전을 촉진하는 요인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남북관계의 저해 요인은 제거하고 촉진요인은 강화하는 방식으로 남북관계의 활로를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관계 개선을 저해하는 요인은 대략 △북한의 대남무시 전략 △코로나19 이후 북한의 국경 봉쇄 △남북관계 진전 속도를 둘러싼 한미 간 견해차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북한의 ‘대적(對敵)선언’과 대남 비난이 남북관계 진전을 가로막는 근본적 요인이고 코로나19 사태가 현실적 요인이라고 볼 수 있다. 한미 간 견해차가 인도주의 협력조차 가로막는 걸림돌이 된 것도 사실이지만 우선순위로는 그다음이다. 각각의 요인을 형성하는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의 대남무시 전략의 배경은 복합적이다. 하노이 노딜에 대한 책임 전가와 한미훈련에 대한 반발, 경제난 등 내부 동요 요인을 희석하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 판문점선언과 9·19 평양공동선언에서 남북 정상이 합의했던 사업들이 전혀 이행되지 않고 있는 데 대한 불만의 표시인 것은 물론이다.
한국 정부가 수행해왔던 북·미 중재 역할이 한계에 부딪혔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김정은-트럼프 정상회담과 수시 친서외교를 하게 되면서 북한은 한국 정부가 북·미회담을 단순 중개하는 데에 더 이상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북한은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더는 얻어낼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남북관계의 ‘복원’보다 연락 사무소 폭파 등 ‘파탄’을 통해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즉, 남북관계라는 ‘약한 고리’를 타격함으로써 전략노선인 자력번영과 정면돌파의 명분과 추진 동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둘째, 코로나19 확산과 8월 홍수 사태는 인도적 차원에서 남북협력을 재개할 수 있는 기회요인을 제공한다. 그러나 북한은 하노이 노딜과 스톡홀름 협상 결렬 이후 고수하고 있는 자력번영과 정면돌파 노선을 훼손하면서까지 외부에 손을 벌릴 생각이 없다. 향후 어떤 형태로든 북·미협상 재개를 염두에 두고 정면돌파 노선을 고수하는 것이 전략적 이익을 보장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북한은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국가방역체계를 ‘최대비상체제’로 전환하면서 ‘남한책임론’을 주장했다. 개성 지역으로 밀입북한 탈북민 김모 씨가 ‘코로나19 감염이 의심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김 씨의 밀입북 사건을 계기로 개성 봉쇄 조치가 내려지고 식량 등 특별지원 조치까지 취해졌지만 아직 김 씨의 확진 소식은 없다. 세계보건기구(WHO) 평양사무소장이 외신과의 인터뷰를 통해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Inconclusive)’고만 밝힌 바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강원도와 황해도 지역의 홍수 피해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19 방역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외부지원을 받지 말라’고 지시했다.
셋째, 유엔 대북제재 국면에서 남북협력사업을 재개하기 위해서는 한미협의라는 사전작업이 불가피하다. 그런데 한미워킹그룹을 통한 정책협의는 여전히 남북관계 진전의 장애물로 존재하고 있다. 입이 마르도록 강조하는 한미동맹이 남북관계의 최대 걸림돌로 존재하는 역설적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트럼프 행정부의 대한반도 정책 목표는 양면적이다. 북한으로부터는 비핵화를 성취하고 한국 정부로부터는 방위비 분담금 대폭 인상을 이끌어내려고 한다. 남북관계의 획기적 진전이 비핵화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주한미군의 존재 근거를 약화시키는 것은 비교적 분명하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러한 전략이익 구도는 한미워킹그룹 재편 논의에 미국이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지난 8월 20일 북한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다시 열어 경제목표 달성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내년 1월 제8차 당 대회 개최를 예고했다. ⓒ연합/조선중앙통신
삼중고에도 남북관계 개선에 소극적인 북한
지금까지 살펴본 남북관계 제약 요인과 달리 유엔 제재, 코로나19, 홍수 피해라는 삼중고에 직면한 북한의 경제난은 남북관계의 수요를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경제 회복을 위해 북한이 외부의 지원을 필요로 하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은 지난해 말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해 정면돌파 노선을 선언했지만, 1월 말부터 국경을 봉쇄하고 북·중교역과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전면중단했다. 김정은 위원장의 ‘플래그십(Flagship)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는 원산갈마 해안관광지구 역시 세 차례의 연기에도 불구하고 4월 15일 완공 예정일을 넘겼다. 10월 완공 목표로 건설 중인 평양종합병원도 김정은 위원장이 ‘마구잡이식’이라고 질책하며 책임자 전원 교체를 지시한 만큼 목표 달성 여부는 불투명하다.
마침내 북한은 8개월 만에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다시 열어 경제목표 달성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내년 1월 제8차 당 대회 개최를 예고했다. 결국 ‘승리자의 대축전’을 예고했던 오는 10월 10일 당 창건 75주년 행사의 의미도 퇴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측의 대북지원과 인도협력사업 재개 움직임은 남북관계 개선의 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일부 지자체와 민간단체들이 추진하는 코로나19 방역물품 지원사업이나, 정부가 세계식량계획(WFP)를 통해 북한 영유아·여성 지원 사업에 1,000만 달러(120억 원)를 지원하기로 한 결정 등도 긍정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평양종합병원 완공 후 남북협력기금을 활용해 의료장비를 지원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이 수해지원 물품을 수령하지 말라고 공개적 지시를 내린 데서 보듯 북한은 경제난 해소를 위한 외부 지원에 분명히 선을 긋고 있다. 유엔 제재를 우회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인도협력이나 남북 경협사업 추진이 쉽지 않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결국 장기적 안목에서 남북관계의 전략적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대남무시 전략을 수정하도록 되돌려 세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대남무시 전략의 배경이 복합적인 만큼 여기에는 우리 정부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과 미국·중국과의 협력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혼재되어 있다. 단계적, 병렬적 접근은 불가피하다.”
북한의 생존권, 발전권 보장 위한 전략 마련
앞서 북한이 우리에게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다양한 불만과 요구사항을 살펴봤다. 남북관계를 정상화하려면 이들 중 가능한 한 많은 사안을 해소해야 한다. 우리의 국익을 고려해 취사선택한 뒤, 수용이 불가능한 사안은 소통을 통해 상호 이해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한미연합훈련의 경우,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위반하고 핵과 미사일을 개발해 우리의 안보 딜레마가 발생했으므로 그 필요성이 더 커졌으며, 북한이 비핵화에 성의를 보이면 규모를 줄일 것이고 비핵화를 완성해 검증까지 받으면 중단할 수도 있다고 당당하게 설명해야 한다.
결국 장기적 안목에서 남북관계의 전략적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대남무시 전략을 수정하도록 되돌려 세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대남 무시 전략의 배경이 복합적인 만큼 여기에는 우리 정부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과 미국·중국과의 협력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혼재되어 있다. 단계적, 병렬적 접근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이 대남전략을 포함한 대외전략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것들의 우선순위를 파악하는 작업이다. 비핵화 협상 중단과 자력번영을 선언한 북한의 대외전략 우선순위는 경제난 해소와 체제 안전 보장이다. 다시 말해 북·미 비핵 화 협상에서 북한이 생존권과 발전권이라고 표현한 것들이다.
남북관계 발전을 통해 경제난 해소와 체제 안전 보장을 모두 제공할 수 있다면 최선이겠지만, 북한이 자력번영을 선언한 마당에 경제난 해소를 위한 대북접근에는 한계가 있다. 유엔 대북제재라는 견고한 구조 안에서 북한의 경제난을 해소할 수 있는 대규모 경제협력사업을 추진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대신 남북교류협력의 제도적 절차를 정비함으로써 군사적 긴장 상태가 민간의 경협사업을 가로막는 구조를 손보는 것이 필요하다. 규제 중심의 남북교류협력법제를 경협 촉진을 위한 실질적 장치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은 비핵화의 진전과 더불어 경협 재개를 위해 필요한 첫 단계 조치이다.
지난 8월 6일 통일부는 제316차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를 열고 세계식량계획(WFP)의 ‘북한 영유아·여성 지원사업’에
1,00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회의를 주재하는 이인영 통일부 장관 ⓒ연합
남북경협사업의 재개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이 신뢰할 수 있는 체제 안전 보장 방안을 마련해 미국과 중국 등 이해관계국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모으는 일이다. 사실 상 북한의 핵보유로 인해 한반도 주변의 지정학적 원심력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남북관계의 안정이 동북아 평화에 기여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청와대를 중심으로 통일부와 외교부 등 유관부처들이 ‘원팀(One Team)’으로 움직여나가야 한다. 남북관계는 통일부가, 한미, 한중관계는 외교부가 담당한다는 도식만으로는 남북관계의 해법을 모색하는 것조차 불가능해질 수 있다. 한미워킹그룹 운영방안을 개선하기 위한 과정에서 통일부와 외교부의 불협화음이 드러나서도 안 된다. 한미워킹그룹 재편은 남북관계의 전략적 해법 모색을 위한 여러 가지 필요조건 중 하나를 충족하는 작업이다.
동시에 비핵화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남북관계 개선만큼은 이뤘다는 성과중심주의도 경계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남북관계 진전을 통해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체제 마련을 위한 디딤돌을 놓고, 미·중·일·러 등 한반도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자들을 중심으로 평화협정을 도출해낼 때 비로소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 기 영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