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 Vol 1702020.12

평화 LIFE

우리의 말이
세계를 터뜨리길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 전시회

“말씀의 세계에서 내쫓기는 것도 비참하지만
그것에 감금당하는 것은 더욱 비참한 일이다.”
- 버지니아 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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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국민이고 비국민인가? 누가 애국자이고 빨갱이 인가? 누가 우리 편이고 누가 우리의 적인가? 우리는 이 러한 이분법에 놓인 채 국가라는 허울을 뒤집어쓴 폭력 에 답하기를 강요받아 왔다. 미처 질문이 던져지기도 전 에 몸을 사리고, 무엇인가 트집 잡힐 일은 없었는지, 나 의 생각이 조금 ‘불순’하거나 어딘가 ‘불온’하지는 않은 지 스스로 검열해야 했다. 그 세월이 70년이 넘었다. 어 쩌면 해방 이후 분단 체제 속에서 대한민국은 국가보안 법으로 유지된 체제였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은 현행법 으로 남아 잊을 만하면 그 위력을 떨치고 있기에 ‘말의 세계에 갇힌 대한민국’은 현재진행형이다.

전시 중인 옛 남영동 대공분실 앞마당의 설치물 <12개의 문, 12개의 질문>

국가보안법에 갇힌 세계
누군가는 국가보안법에 의해 내쫓기는 세계, 누군가 는 국가보안법으로 갇힌 세계를 벗어나고자 인권활동가 와 인권변호사, 사회운동가와 예술가들이 모였다. 국회 에서 법률이 폐기될 기약이 없는 까닭에 시민의 힘으로 국가보안법을 박물관에 보내자는 논의를 시작했다. 당 장은 박물관을 지을 터도, 돈도 없으니 해묵은 숙제이자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국가보안법의 문제를 널리 알리는 자리를 만들기로 했다.

70년이 넘은 세월인 만큼 국가보안법에 연루된 사람 은 정치인, 법조인, 언론인, 학생, 지식인, 문화예술인들 뿐만 아니라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어부, 재외동포 등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국가보안법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치안유지법부터 들자면 근 100년의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무엇을 보여주든 우리가 내밀 것은 ‘새 발의 피’일 수밖에 없었다.

1부 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 5층 조사실 11개에서 여성 한 명 한 명의 목소리를 듣고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이제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국가폭력의 상징적인 장 소인 옛 ‘남영동 대공분실(민주인권기념관)’을 전시회 장소로 정했다. 전시의 주 테마는 ‘여성 서사로 본 국가 보안법’이었다. 전시 기간은 애초 2020년 3월이었으나 코로나19 사태로 두 차례 연기된 끝에 9월에서야 온라인으로 오픈되었고, 추석 연휴가 지난 10월이 되어서야 2주간 오프라인으로 관람할 수 있었다.

2부 국가보안법 연대기

왜 여성 서사인가?
국가보안법은 ‘너는 어느 편이냐?’에 이어 ‘너는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협력자인가, 방조자 혹은 방관자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누가 말할 수 있고 누가 말할 수 없는지, 왜 어떤 이는 끝까지 싸웠고 어떤 이는 싸움을 포기했는지(또는 굴복했는지) 끊임없이 내부의 경계를 지어왔다. 이런 질문은 은밀하고 예리했기에 그 상처는 더 깊다. 그 가운데 언제나 ‘피해자’로, ‘조력자’로만 조명되었던 여성의 위치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통해 새롭게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고 증언할 때 이 국가폭력의 일상성, 현재성이 드러날 것이라 생각했다. 여성이야말로 국가보안법에 연루돼 말의 세계에 내쫓긴 동시에 감금된 이들이었다. 열 한 명의 구술자들의 이야기를 인권기록활동가들과 사진가가 기록했고, 이 기록은 전시와 같은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은 여성 서사와는 별개의 2부 국가보안법의 연대기로 이 폭력의 역사적 기원과 주요 쟁점을 전시했다. 남영동에서의 전시는 끝났지만 지역에서의 전시는 여러 단체, 기관과 의논 중이다.

1층 국가보안법 전문을 들으며 나희덕 시인의 <파일명 서정시>라는 시의 요약본을 필사하는 장소.
전시의 마지막을 관람객이 참여하는 퍼포먼스로 마무리하게 된다.

사유의 분단과 고립을 넘어
배나 비행기를 타지 않고서는, 육로로는 다른 나라를 갈 수 없는 한국은 분명 섬나라다. 그럼에도 이 갇힘과 고립을 인식하고 사는 이들은 드문 것 같다. 전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갈 수 있지만 대한민국 국민만은 유일하게 가지 못하는 나라와 ‘휴전선’을 맞대고 있다. 이 긴장과 단절을 인식하는 이들도 많지 않은 것 같다. 한국인은 지리적으로만 아니라 머릿속도 섬이 되어버렸다.

국가보안법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기, 다른 말하기, 새로운 말 걸기, 그로 인해 다시 국가보안법 없는 세상을 꿈꾸기를 이번 전시회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충분하지않았지만 이제 비로소 그 첫 발걸음을 떼었다고 답하고 싶다. 전시회 1부, 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 제목은 “나의 말이 세계를 터뜨릴 것이다”였다.

강 곤 인권기록활동가,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 구술기록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