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 Vol 2072024.1.

통일비전

젊은 과학도에게 꿈을 가르치는
박명규 GIST 초빙석학교수

“통일이 합리적 이익 있다면
청년세대도 동의하고 지지할 것”

미·중 패권 경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간 무력 충돌 등 전례 없는 복합 위기 속에 한국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 기조를 바탕으로 대북·통일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 통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는 설문조사는 우리 사회에 큰 숙제를 안겨준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가 여론조사기관 글로벌알앤씨에 의뢰해 지난해 11월 24일부터 26일까지 3일간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통일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통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긍정적 답변을 내놓은 응답자가 64%에 그쳤다. 관련 조사를 실시한 2015년 1분기 이후 역대 최저 기록으로, 20~30대 남성을 중심으로 청년세대에서 부정적 답변이 크게 늘어난 결과라는 분석이다.

박명규 광주과학기술원(GIST) 초빙석학교수는 민족적 일체감이란 당위성을 기조로 한 과거의 통일론은 이제 수정 보완돼야 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해왔다. 다양성과 복합성이 커지는 21세기 환경에 적응하면서 청년 세대가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문화적 감수성을 함양하고 증진하는 방향으로 통일정책을 혁신할 것을 역설해 왔다. 젊은층을 중심으로 한 통일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점차 커지는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통일 인식 제고 방안은 뭘까. 박 교수를 만난 것은 그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다.

‘통일학의 기틀’ 마련한 사회학자
박 교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회학자다. 1955년생으로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고도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한국의 역동성을 학문적으로 규명하고자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석·박사 과정까지 마쳤다. 어린 시절 즐겨 듣던 구약성경 이야기에서 영향을 받아 민족 문제와 통일 연구에 힘을 기울여왔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한국사회사, 동아시아 민족 문제, 남북관계와 통일 전망 등을 강의했다. 2006년 서울대 통일연구소(통일평화연구원 전신) 초대 소장으로 취임해 2016년까지 10년간 이끌며 학제적 통일학의 기틀을 마련했다. 2014~2017년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한국사회학회 회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정책위원, 통일부 정책자문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수많은 저서를 냈다. 현재도 GIST 초빙석학교수로서 왕성한 강연·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인터뷰는 2024년을 앞둔 세밑 서울에서 진행됐다. 박 교수는 일흔을 앞둔 나이를 믿기 어려울 만큼 건강하고 에너지 넘치는 모습이었다. 오랜 기간 학자로서 천착해온 학문의 깊이에 북한 학자들과의 학술 교류 경험까지 더해져 생동감과 깊이가 남달랐다. 젊은 과학도들과 대화한 내용까지 떠올리는 기억력도 대단했다. 젊은 과학도에게 사회 현실과 미래의 꿈을 가르치는 소감을 묻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GIST는 국가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설립된 학교인 만큼 영재학교, 과학고 출신 학생들이 많아요. 인문학과는 인연이 상대적으로 적은 과학도 대상 사회학 강의였음에도 학기를 거듭할수록 학생들의 관심사가 확장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과학도의 한반도와 국제사회에 대한 시야를 넓혀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문명으로 보는 21세기’, ‘꿈의 사회학’ 강의를 주로 하고 있습니다.”

박명규 교수는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국민들의 통일 의식조사를 실시해
남북한 간 통합의 정도를 계량화한 지수를 발표하는 일을 연례화한 주역이다.
그는 강의를 시작하며 학생들에게 자신들이 추구하는 꿈이 무엇인가를 묻는다고 했다. 이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미래의 목표를 통해 청년들의 내면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요즘 MZ세대가 으레 그러하듯 개인주의적이고 다양하면서도 실용주의적인 지향을 보인다. 반면 남북관계나 통일에는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박 교수는 이에 대해 “이것이 대한민국 젊은이에게서 나타나는 통일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지형도가 아닐까 싶다”고 분석했다.

“사실 젊은 세대만 특별히 통일에 관심이 식었다고 할 것은 아니지요. 이것은 전 세대적 현상이라고 봅니다. 최근 북한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이미지는 5년 전보다 더 부정적이에요. 2018년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한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면서 생긴 부정적 학습효과가 큰 영향을 끼쳤지요. 계속되는 북한의 핵 위협이 주는 실질적인 위기의식도 무시할 수 없고요.”

박 교수가 보기에 젊은 세대에게 통일은 단순한 정치적 목표라기보다 복합적인 미래비전으로 여겨진다. “기성세대에게 통일은 헌법적 가치이고 역사적 소명이었던 데 비해 젊은 세대에게 민족통일은 자유민주주의, 경제적 기회, 사회 정의, 문화적 다양성 같은 가치와 함께 고려해야 하는 목표”라는 것이다.

북한에 대한 인식은 복잡하고 다층적
박 교수가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을 운영하면서 통일 의식조사를 연례화한 이유도 세대별 시기별 의식변화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는 2007년부터 매년 국민들의 통일 의식조사를 실시하며 변화의 속도와 내용을 장기적으로 확인하고자 했다. 박 교수는 통일에 대한 논의가 객관적이고 초당파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만 불필요한 갈등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남북한 통합의 정도를 계량화한 지수를 개발하고 매년 발표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국민들의 북한에 대한 인식은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세대별로 처한 상황과 경험에 따라 통일에 대한 생각도 다를 수밖에 없다. 통일에 대한 청년들의 무관심을 탓하는 평가도 없지 않다. 그러나 박 교수는 청년들의 무관심이 통일에 부정적 영향을 가져오리라는 세간의 통념이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미래에 대한 청년세대의 태도는 소극적이고 탈정치적인 것처럼 보여도 다른 측면에서는 매우 혁신적이고 역동적입니다. K-팝의 진취성이 요즘 전 세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잖아요? 그런 새로운 동력을 북돋우고 격려하며 그것이 한반도 통일로 이어질 참신한 발상을 넓혀가야 할 겁니다. 젊은 세대는 디지털 환경에 익숙해서 한반도 이슈를 새로운 방식으로 수용하고 혁신적인 문제 해결을 모색하는 데 빠릅니다. 이전의 시각으로 ‘왜 통일에 관심 없느냐’고 묻는 것은 낡은 방식이에요. 글로벌한 시야와 다국적 환경에서 자라온 그들에게 민족적 당위성만으로 통일의 필요성을 주입하는 방식은 극복할 필요가 있어요. 청년세대가 지향하고 고민하는 부분을 파악한 뒤 유연하고 미래지향적인 통일비전을 구축하는 일이 긴요하다고 봐요.”

21세기에 통일에 대한 기대와 열망을 강화하려면 사회적으로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박 교수는 무엇보다 통일이 청년세대의 미래비전으로 재정립돼야 함을 강조한다.

”청년들이 살아가야 할 21세기 미래는 문명적 대전환기입니다. 인공지능(AI)과 초연결사회의 도래, 유럽과 중동에서의 전쟁, 기후위기와 생태적 전환, 저출산과 인구 감소 등의 심대한 변화가 이들의 앞에 놓여 있습니다. 통일이 저런 쟁점들을 극복하고 밝은 미래를 약속해줄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을 키우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박 교수는 포괄적인 미래 기획과 통일비전이 결합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이 지향하는 미래사회, 개방적이고 자율적이며 민주적이고 혁신적인 공동체 구성에 북한과 통일이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점차 다원화하고 다국적화하는 한국 사회의 변화와 통일비전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혁신적인 준비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정주외국인 비율이 높아지고 이민청 신설이 논의되는 현실에서 남북한 간의 민족정체성과 지구적인 다문화 정체성을 통합적으로 결합하는 정책과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이미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포용력을 익힌 젊은 세대가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또한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생활권을 아우르는 지구적 네트워크를 지닌 민주평통은 이런 다문화적 통합 역량을 구축하고 확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분단평화’ 아닌 ‘통일평화’ 지향해야
통일과 민주주의를 결합시키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고 박 교수는 지적한다. 민족 정서를 강조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서로의 다름을 수용하는 민주적 자세 또한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는 “서독의 민주시민 교육은 훗날 동독 사회를 포용하는 원동력이 됐다”며 “우리가 먼저 타협과 공존의 문화를 성숙시켜나간다면 남북 통합도 수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남남갈등도 민주주의 원리를 통해 해소될 수 있다는 게 박 교수 생각이다.

“통일 의식조사를 실시하면 대북 지원 사안에는 진보와 보수 간 의견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아요. 현재 상황은 의견 차이보다 정치적 레토릭(수사) 영향을 적잖게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국민 간 이견으로 생기는 남남갈등은 양보하고 토론해 합의를 이루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면 해소될 수 있어요.”

박 교수는 2015년 중국 옌볜대에서 서울대, 김일성종합대, 옌볜대가 공동으로 학술대회를 주최하는 역할을 맡아 학문을 고리로 한 남북 교류를 추진했던 일을 언급했다. 박 교수는 “당시 내가 ‘민족의 문제, 대학의 문제라는 보편적인 공감대가 있으니 허심탄회하게 얘기해보자’고 요청했다. 마음이 통해 첫해엔 하루 반나절 동안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남북한 및 옌볜 조선족 학자들이 서로 깊은 얘기를 나눴지만, 다음 해는 북한의 반응이 폐쇄적으로 바뀌며 대화를 피해 안타까웠다. 다양성과 민주주의에 기반한 미래공동체를 꿈꾸고 이것을 기획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평화통일 대신에 통일평화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평화통일은 평화적인 수단으로 통일하자는 뜻이어서 한반도에 갇혀 있는 개념이지요. 이에 비해 통일평화는 통일을 통해 평화를 구현한다는 뜻으로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와 지구촌 차원에서의 평화를 지향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한반도 통일이 한민족만의 목표가 아니라 주변 국가 및 세계 보편의 꿈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한반도가 통일이 돼야 미국과 중국, 중국과 일본도 훨씬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한반도 통일이 평화로 이어진다는 개념이 국제사회에서도 통하거든요. 중국은 한반도가 현 상태를 유지하면서 안정되길 원해요. 분단 상태에서 평화를 유지하라는 겁니다. 하지만 분단평화는 끊임없이 불안과 갈등을 재생산할 수밖에 없어요. 분단평화가 아니라 통일평화로 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