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탈주민 정착 이야기
‘탈북 1호 작곡가’ 김영남
탈북문화예술인 총연합회 회장
“죽을 때까지 아코디언 작곡하며
대한민국 음악 세계에 알리고 싶어”
신의주 압록강변에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앉았다. 중국 단둥을 건너다보며 남자가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나를 따라 어디든 갈 수 있어?”
“영남 동지가 조국을 배반하지 않는 이상 어디든 가겠습니다.”
결혼 뒤 남편은 아내에게 한국 라디오 방송을 듣게 했다. 딱 두 달이 지나자 아내가 말했다.
“우리가 속고 살았습니다. 남조선에 갑시다.”
지옥에서 탈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중국에서 3년 동안 마음을 졸이며 숨어 살아야 했고, 미얀마 감옥에서 1년 3개월이나 수감생활을 했다. 그렇게 도착한 한국에서 남자는 음악가라는 꿈을 찾아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는 아코디언 교본이 단 한 권밖에 없었던 한국에서 9권의 아코디언 편곡집을 펴냈고 탈북민 1호 작곡가가 됐다.
지난해 11월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김영남 음악회’를 열었다. 6월에 이은 두 번째 음악회였다. 자신의 인생이 녹아 있는 노래들을 들으며 탈북문화예술인총연합회(NK예총) 회장 김영남 씨는 걸어온 60년의 삶을 눈시울을 붉히며 돌아봤다.
“꿈 깨라. 너는 큰아버지가 월남해서 안 돼”
김 씨는 1962년 평북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김 씨는 학교에 다닐 때 아코디언 소조에 뽑혀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다. 1978년 황해남도 주둔 4군단에 입대할 때만 해도 음악인생은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숨겨진 재능은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이다.
당시 북한군은 2년에 한 번씩 ‘군무자축전’이라는 것을 열었는데, 김 씨는 1983년 열린 21차 군무자축전에서 직접 작곡한 중창으로 전군에서 2등을 차지했다. 그러자 군단에서 바로 소환했다. 4군단 선전대 소속으로 전문적으로 작곡을 하게 한 것.
선전대에서 그는 너무 행복했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피아노와 아코디언 연주가 혁명임무가 됐기 때문이다. 북한에선 피아노가 원한다고 아무나 칠 수 있는 악기가 아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건반을 치고 또 쳤다. 얼마 뒤 그는 군단 음악창작조장으로 임명됐다.
1988년 군 복무 10년을 마치고 제대할 때 그는 평양음악대학에 가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하필 그때 음악대학 학생은 제대군인을 받지 말고 유학생 출신으로 받으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하달됐다. 어쩔 수 없이 김 씨는 신의주 제2사범대학 예능학부로 갈 수밖에 없었다.
1993년 대학 5년 과정이 끝나갈 즈음 사회주의청년동맹(사로청)에서 그를 찾아 평안북도 사로청 청년기동해설대 대장(단장)에 임명했다. 청년기동해설대는 성악, 기악, 화술, 무용 등으로 구성된 25명 좌우의 미혼 전문예술인들로 구성돼 있다.
지난해 6월 3일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 열린 제1회 ‘김영남 음악회’
대학 졸업 전에 대장으로 임명된 그는 첫해부터 ‘사고’를 쳤다. 그해 10월 평양에서 열린 각도 사로청 청년기동해설대 경연에서 당당하게 1등을 차지한 것. TV 5대, 6000달러어치의 음향설비, 각종 악기 세트를 우승 상품으로 받았다. 그런데 정작 그에게 돌아온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직책이 높은 사로청 고위 간부들이 다 나눠가졌다. 그는 환멸을 느꼈다.
하지만 더 큰 환멸을 느끼게 한 사건은 이듬해에 찾아왔다. 1994년 10월 3일 도당 조직부에서 그를 평양으로 소환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김 씨는 갑자기 찾아온 행운에 얼떨떨했다. 마침 도당 조직부에 먼 친척이 있어 자신이 어디에 선발됐는지 알아봤다. 며칠 뒤 친척은 큰 비밀을 알려주는 듯이 속삭였다.
“네가 장군님 집안 음악 가정교사 후보로 뽑혔어. 신원조회가 끝날 때까지 몇 달 기다려봐. 그동안 사고치지 말고 모범적으로 살아야 돼.”
김 씨는 부푼 꿈을 안고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말했다. 당시 어머니는 암 투병으로 사경을 헤매느라 말을 못 할 때였는데, 온 힘을 짜내 간신히 한마디 하셨다.
“꿈 깨라. 너는 큰아버지가 월남해서 안 돼.”
어머니는 두 달 뒤 세상을 떠났다. 아무리 기다려도 당에선 그를 다시 부르지 않았다. 어머니가 유언처럼 남긴 말이 실감이 됐다. 북한 체제에 대한 배신감이 점점 커졌고, 이 사회에서 내가 한계가 있다면 내 자식도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절망감마저 들었다.
1995년부터 북한에선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배급이 끊겨 장사를 해야 먹고사는 삶이 시작되자 아내도 변했다. 남편이 권유한 한국 라디오를 듣기 시작하면서다. 김 씨는 자신의 탈북 결심을 근처에 사는 작은누나에게도 터놓았다. 누나 가족도 같이 탈출하기로 의기투합했다.
한겨울 어둠 틈타 목숨 건 탈북 결행
1998년 1월 21일. 김 씨 가족 일행은 마침내 탈북 길에 올랐다. 그와 아내, 8살 아들과 4살 딸, 그리고 작은누나와 매형, 9살 난 누나의 딸까지 모두 7명이었다. 그들은 자강도 위원군에 있는 댐 상류가 겨울에는 얼어붙는다는 정보를 알게 됐다. 그곳까지 어렵게 찾아가 어둠을 틈타 경비대원을 따돌리고 강을 건넜다. 우여곡절 끝에 선양까지 무사히 당도했고, 한국 목사의 도움으로 숨어살 집과 한국 기업에서 일감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3년을 선양에서 보냈지만 목적지인 한국으로 가려니 길이 없었다.
김 씨 일행은 무작정 떠나기로 했다. 지도 한 장에만 의지해 동남아에 가서 한국대사관에 들어가면 뭔가 방법이 생길 것이라 판단했다. 당시엔 동남아나 몽골을 거쳐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탈북 루트가 없을 때였다. 그만큼 국경 경비도 허술했다. 그런데 쿤밍을 경유해 미얀마 북부에 도착했을 때 미얀마 군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당시는 군부가 일시적으로 마약왕의 통치에 있던 북부를 점령하고 다스리던 시기였다. 김 씨 가족은 남녀 따로 갈라져 구치소에 갇혀 있어야 했다. 여기서 영영 벗어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한국대사관에서 이들을 데리러 왔다. 대사관에 연락한 지 8개월 만이었다. 2002년 5월 마침내 김 씨 가족 7명은 한국에 도착했다.
지난해 2013년 부산에서 진행된 KBS 열린음악회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김영남 씨.
2002년 8월 김 씨는 가족과 함께 서울 양천구의 임대주택을 받았다. 서울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되자 그는 북에서 배운 지식을 활용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과거 피아노를 쳤던 경험을 되살려 낙원악기상가 피아노대리점에 취직했다. 악기상가에는 처음 보는 악기들이 즐비했다. 어느 날 아코디언 매장에 들러 연습 삼아 연주를 하는데, 그의 연주를 가만히 지켜보던 사장이 말했다.
“선생님, 그 정도 실력이면 피아노 수리하지 말고 아코디언만 가르쳐줘도 돈을 벌 수 있어요.”
그 말에 희망을 가진 김 씨는 한국 아코디언 실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가 봤을 때 한국 아코디언의 수준은 북한의 1960년대 수준보다 못했다. 교본도 전국에 단 한 권밖에 없었다. 그는 큰맘을 먹고 65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이탈리아제 아코디언을 샀다. 두 달 정도 열심히 훈련을 하니 10여 년 전 전성기 시절의 기량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저기 광고를 해 아코디언 교습을 시작한다고 알렸고 2~3명의 학생이 아코디언을 배우겠다고 찾아왔다. 그중 한 명이 그의 연주를 찍어 자주 인터넷에 올렸다.
아코디언 작곡 인생 이제 다시 시작
2005년 어느 날 그에게 한 연주 강의 사이트 운영 업체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연주 강의 영상을 제작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김 씨는 76개의 아코디언 연주 강의를 제작했다. 강의를 하려니 교본이 없어, 스스로 각종 곡을 아코디언 연주에 맞게 편곡해야 했다. 각각 100곡씩 수록된 김영남 아코디언 명곡집 1, 2권이 그렇게 나왔다. 그걸 시작으로 그는 수백 곡의 가요를 아코디언에 맞춰 편곡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9권의 편곡집을 냈다. 그 영상을 보고 전국에서 연락이 왔다. 지금까지 그에게 아코디언을 배운 사람은 수천 명에 이른다.
아코디언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면서 그의 목표도 점점 높아졌다. 2006년 그는 북에서 도급 청년예술단을 이끌었던 경험을 살려 2006년 평양예술단을 만들었다. 이듬해엔 사회적 기업인 NK예총도 만들었다. 코로나19가 터지기 전까지 그는 18명의 단원들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북한 예술을 알렸다. 동시에 그와 가족들도 한국에 잘 정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 씨가 가장 바라던 꿈은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는 것이었다. 코로나19 사태로 활동이 중단되자 그는 오히려 해방감을 느꼈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작곡에 매진할 시기라고 판단한 그는 예술단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든 곡으로 올해 두 차례나 음악회를 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품고 살 세가지 꿈이 있다고 말한다.
2018년 한국문화예술인협회 송년의 밤 행사에 참가한
김 씨(왼쪽에서 두 번째)가 송해 선생과 손을 잡고 사진을 찍었다.
지역사회 봉사의 일환으로 노인들로 구성된
아코디언 동아리에서 아코디언을 가르쳐주고 있는 김영남 씨.
“우선 죽을 때까지 아코디언 편곡을 계속할 겁니다. 한국 아코디언의 기술 발전에 한 획을 그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이는 그가 지금도 종로에 허름하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이름을 딴 아코디언 학원을 유지하며 제자들을 키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감칠맛 나는 김영남만의 주법 영상은 지금도 유튜브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두 번째 목표는 세계가 인정하는 곡을 만드는 것입니다. 탈북자라는 신분을 넘어 세계에 대한민국 음악을 알리는 당당한 음악인이 되고 싶습니다. 세 번째 목표는 탈북민들을 위해 뭔가 하고 싶습니다. 일부 탈북민은 정착에 실패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저만 잘살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도우면서 살고 싶습니다.”
유치원 시절부터 김 씨는 해외로 음악 유학을 떠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K팝의 원조 대한민국에 유학이 아닌, 음악인으로 당당히 정착했다. 그의 음악 인생은 이제 다시 시작이다.